00494 51. 프랑스 =========================================================================
“해사위원회 해군경이라면서 직접 배를 타면서 지휘해야 하오?”
“왕립함대 말고는 그 빌어먹을 해적 놈들이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요.”
양국이 각각 100여 척 넘게 동원했던 칼레 해전 당시 에스파냐 왕립함대는 20척에 불과했고 영국도 비슷했다. 그 왕립함대도 평시에 계속 유지할 비용이 없어서 돈을 받고 상인에게 빌려줘야 했다.
당연히 대규모 해전에 참가한 대부분의 잉글랜드 함선들은 원래 상선이나 사략선들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해적선장들이 날뛸 수밖에 없는 해군 구조였다.
“그런데 해군경이 무슨 일로 직접 남의 배에 오셨소? 혹시 아일랜드에서 이주민을 받는 문제 때문에 왔소?”
“허허!”
이민호는 잉글랜드의 해군경이 국왕좌승함에 왔으니 뭔가 외교적인 접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찰스 하워드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이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바다가 아주 깨끗하게 비었다.
“어? 그 많던 배들이 다 어디 갔지?”
대화하는 사이 80척이 넘는 영국 배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포츠머스 항으로 쏙 들어가는 마지막 갈레온의 꼬리만 볼 수 있었다.
이민호가 화난 표정으로 찰스 하워드를 노려봤다. 프랑스 사략선들이 삽시간에 몰살당하는 것을 확인한 하워드는 잉글랜드 배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그저 시간을 벌려고 왔을 뿐이었다. 사실 하워드는 런던과 연락해 이민호에게 외교적인 제안을 할 시간도 없었다.
“허허! 죄송합니다. 이제 저를 처형하셔도 좋습니다, 폐하.”
“끙! 귀관의 의도는 성공했소. 돌아가도 좋소.”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유용한 정보를 하나라도 폐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을 북미로 이주시키는 일을 잉글랜드에서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아일랜드 주민들을 고산국 영토인 북미로 이주시키는 것이 잉글랜드의 이익에도 합치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쓸 만한 경작지 대부분을 잉글랜드 군대의 도움을 받은 지주들이 탈취하는 중이었으므로 아일랜드의 인구 절반 이상은 유휴 노동력으로 떨어져 쓸모가 없었다. 이민호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어서 하워드에게서 특별히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영국의 모든 군함, 사략선, 상선들이 고산국 배에 대한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아니, 뭐. 공격해도 상관없는데 말이오.”
이민호가 입맛을 다셨고, 찰스 하워드가 충분히 그 의도를 알아챘다.
“괜히 고산국 배를 공격했다간 배도 잃고 선원과 화물도 다 잃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프랑스 사략선들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우리가 포탄을 소모했으니 프랑스 국왕에게 손해 배상을 받으려고 하오.”
“푸하! 역시 고산국 국왕폐하이십니다. 무운을 빕니다, 폐하!”
노 제독이 유쾌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영국 기함마저 바다에서 사라지자 영불 해협에는 고산국 함대만 남았다. 그 흔한 상선이나 어선 한 척 보이지 않았다.
북동쪽에서 내려오던 네덜란드 상선들이 고산국 순양함에 걸린 태극기를 확인하고 부리나케 달아나버렸다. 어쩐지 깡패가 되어 혼자만 뎅그러니 남아 외로워진 기분이었다.
“전단장! 센 강 하구로 가시오!”
고산국 함대가 남동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콧대 높은 프랑스에게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줄 심산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배에서 내려 고향에 돌아갈 날만 꿈꾸던 신교도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멱살을 틀어잡고 결판을 볼 작정이었다.
“항법사! 저기 강 하구의 도시 이름이 뭔가?”
“르아브르(Le Havre)입니다, 전하.”
“도시 이름 자체가 항구야? 이름을 참 무성의하게 지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왜 나를 보는 거야?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 아닙니다, 전하.”
파리 분지를 지나는 센 강은 바다까지 꼬불꼬불 지독한 사행천이 되어 흘렀다. 센 강에서 수도 파리의 외곽 항구 역할은 르아브르가 아니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강상 항구인 루앙이 맡고 있었다. 전란의 시대에 르아브르는 활발하게 무역을 하는 항구도시가 아니라 강 하구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맡는데 그쳤다.
“적 요새에서 포격입니다!”
“전하! 사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반격하겠습니다. 전단, 해안 요새를 향해 5인치 함포 발사!”
해안 요새에서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에 5인치 함포를 쏴서 날려버렸다. 요새에서 쏘는 대포는 함대 가까이 날아오지도 못했다. 단지 함대에 위협사격만 가했을지 모르지만, 전단장은 함대에 위협이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대형 갈레온 네 척이 싸우러 나왔습니다. 사략선이 아니라 프랑스의 정식 해군입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바로 얼마 전까지 종교로 인한 내란으로 신교도와 구교도가 갈려 치열하게 싸웠고, 올해 봄까지는 에스파냐하고도 싸웠다. 네덜란드 영토에서 쏟아져 나온 에스파냐 기병대에게 아미엥을 점령당해 파리가 곧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 프랑스는 해군을 증강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 동안 사략선을 적극 활용했던 셈이었다.
“전하! 더 접근하기 전에 적함들을 격침시켜야 합니다. 순양함은 유럽의 대포에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지만 수송선에는 약한 부위가 많습니다.”
“알겠소. 적함을 격침시키되, 가급적 희생자를 적게 내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단장이다! 3전대가 한 척씩 맡아서 흘수선을 향해 함포 사격을 한다. 단정을 구조용으로 내보내라. 발포!”
프랑스 갈레온 네 척이 고산국 함대를 대포 사정거리에 두기 위해 돌격해오자 네 척 모두 단번에 격침시켰다. 대형 갈레온은 사략선보다 커서 제법 맷집이 좋았으나, 내부로 뚫고 들어가 터지는 파열탄에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배가 빠르게 침몰하는 동안 프랑스 수병들이 물로 뛰어들었다.
이민호는 단정들이 프랑스 해군 승조원들을 구조해서 해안에 내려놓는 것을 지켜봤다. 고산국 수병들은, 불리한 싸움인 줄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고산국 함대를 향해 돌격한 프랑스 해군에게 거수경례로 경의를 표한 다음 돌아왔다.
“전단장! 3직제로 전환해서 휴식을 취하게 하시오.”
“전하! 이곳은 적지 바로 앞입니다.”
“뭐가 있어야 우리를 상대할 것 아니오?”
“프랑스에 해군 전력이 없다는 뜻입니까? 알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몰려오는 배는 다 때려잡겠습니다.”
“네덜란드 방향만 신경 쓰시오. 나는 쉬러 가겠소.”
프랑스는 에스파냐는 물론 영국과도 전통적으로 싸우던 사이였다. 비록 엘리자베스 1세가 에스파냐와 싸우는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지원했다고 하나 유럽 국가들끼리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프랑스가 유일하게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상대는 이웃 네덜란드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면서도 프랑스의 영토 야욕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프랑스의 반응이 기대됐다. 처음에는 국내 해안에 정박 중인 사략선들을 동원해 봉쇄를 풀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겨우 12척에 불과한 고산국 함대의 강력함은 이 시기 프랑스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지난봄에 에스파냐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앙리 4세는 남동쪽 사보이 공국에 군사적 역량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사보이 공국은 스위스 서부와 니스를 포함한 현대 프랑스 남동부 등을 영토로 보유한 이탈리아 북서부의 국가였다.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도 만만치 않은 영웅이었다. 게다가 펠리페 2세의 딸 카테리나 미켈라와 결혼해 에스파냐의 뒷배를 얻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사보이 공국은 나중에 시칠리아를 얻었다가 사르데냐와 바꾼 다음 이탈리아 통일왕국의 초석이 된다.
“얼굴에 심심하다고 쓰여 있네요. 전쟁 중이 아닌가요?”
“파리에서 고민하다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는데 며칠 걸릴 것이오. 그 동안 우리 마르그레타하고 놀아야겠소.”
몹시 불안해하는 비올레타에게서 아기를 받아 들었다. 이민호가 안았다 하면 아기가 울기 때문이다.
“아기님 머리를 왼쪽 가슴에 두세요.”
“아! 심장 소리를 느끼면서 아기가 안정감을 얻는 모양이오?”
“아마 그럴 거여요.”
앙증맞게 작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잡고, 아빠를 알아보는 작은 아기와 눈을 마주쳤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이민호가 씩 웃자 아기가 갑자기 울먹거렸다.
“어? 어? 울지 마!”
“당장 나가세요! 시녀들하고나 노세요.”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비올레타가 아기를 빼앗아 안았다. 엄마 품에서 거짓말처럼 울음이 그쳤다.
비올레타에게서 쫓겨나니까 국왕좌승함 안에서 갈 곳이 없었다. 정말로 시녀들한테 갈까 했으나 아직 벌건 대낮이었다. 이때 함내 방송이 울렸다.
- 전하! 함교로 와 주십시오.
“쳇! 식당 종업원 부르듯이 걸핏하면 부르네.”
좁은 군함 안에서 금방 찾을 텐데도 요즘에는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방송으로 불렀다. 이민호가 툴툴거리며 함교로 올라간 순간 국왕좌승함 갑판에 손님들이 올라왔다. 여자 손님을 배로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자들 사이에 검은 상복을 입은 여자는 커다란 진주를 이어서 만든 목걸이를 걸쳐 눈에 띄었다. 지난해 이민호가 펠리페 2세에게 선물로 보냈던 해남도 진주로 만든 큼지막한 목걸이가 이 여자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이민호는 당연히 이 여자를 에스파냐 왕족 여자로 판단했다.
그런데 좌승함 옆에 현재 고산국의 적국으로 인식된 네덜란드 선박이 널빤지로 연결돼 있었다. 이민호는 잠시 이해하기 어려워 손님들의 복장을 확인했으나 분명히 에스파냐 복식을 하고 있었다. 아직 법적으로 네덜란드도 에스파냐 영토였고, 네덜란드 남부를 에스파냐가 확실히 쥐고 있으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러려니 해야 했다.
“고산국 국왕폐하! 선왕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라고 합니다.”
“어서 오시오. 아! 안면이 있군요. 혹시 마드리드에서 모리스코 대표들을 만나게 해줬던 외교관이 아니었소?”
“제 일의 하나였습니다. 선왕 밑에서 비서나 번역 외에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동생이 즉위하니까 예전처럼 편하게 일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시집을 가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사벨은 30대 초반으로 자그마치 20년 넘게 사촌인 루돌프 2세와 약혼 상태였다. 루돌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의 왕이었으나 예술과 과학, 그리고 연금술에 전념하느라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헝가리 땅에서는 1593년부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는 중이었다. 주요 교전국의 황제들이 오래도록 지속된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현재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 오스만 제국 황제 메흐메트 3세,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 명나라 만력제 신종 황제는 전형적인 암군이었다. 이민호가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바탕이 이렇게 마련되어 있었다.
“집무실로 안내하겠소.”
“국왕좌승함이란 폐하의 행궁인데 생각보다 검소하군요.”
“집무실이 넓은 것 빼고는 다른 배와 똑같은 구조와 장식이오.”
이사벨 공주가 서른 살이 넘었다 하나, 그리고 주걱턱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핏줄을 이었다 하나 꽤나 고상하게 생겼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표정이 이민호 얼굴에 알기 쉽게 드러났는지 비올레타가 열심히 옆구리를 찔렀다.
“전하! 이사벨 공주를 취하세요. 네덜란드를 얻을 수 있을 거여요. 최소한 에스파니아령 네덜란드라도 얻을 수 있어요.”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와 독립 전쟁 중이지 않소?”
네덜란드 땅 중에서도 남쪽은 현재 에스파냐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은 나중에 벨기에가 된다.
“이사벨 공주가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좋아요. 그러니 네덜란드를 다 차지할 수도 있어요. 이사벨 공주가 누구와 결혼하든 이사벨과 그 남편의 영지로 펠리페 2세로부터 사전 상속이 됐어요. 명목은 총독이라지만 실질적인 영지에요.”
“네덜란드 땅을 가질 필요가 없소.”
“안트웨르펜 하나만으로도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걷을 수 있어요. 고산국의 정식 왕비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면서 진지하게 구혼을 해보세요.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결될 절호의 기회예요.”
“헉! 이사벨 공주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깜빡했소. 주걱턱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소.”
비올레타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순간 이민호와 민영이 간신히 붙잡았다. 민영이 소리를 안 내고 표정만으로 미친 듯이 웃었다.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턱이라 알려진 가문 특유의 주걱턱은 보통 주걱턱이 아니라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중증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한 회에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페인까지 동시에 나오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