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01화 (450/1,000)

00501  52. 북유럽  =========================================================================

에이모이덴 시청에서 이민호가 협상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상품의 견본을 공개해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미 품평회를 마쳤다. 물량도 게시판에 미리 공개해서 일찍 산 상인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이 시대 기준으로 고산국 상품은 품질이 매우 균일한 편이었고, 품질 차이가 조금이라도 날 경우 확실히 표시해서 가격 차이가 나도록 했다. 이로써 상인들에게 확실하게 신뢰를 얻었다.

부두에 정박한 수송선에서 옆문이 열리고, 포장된 상품들이 손수레에 실려 차례로 나왔다. 경매가 시작되는 순간 상인들이 일제히 가격을 제시하고, 칠판에 최고가가 표시되는 즉시 서로 올리기 바빴다. 수송선이 접안한 부두에 혼란이 극에 달해 의용병들이 질서를 유지하느라 혼쭐이 났다.

네덜란드 북부에서 직접 생산하는 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모직물과 면직물을 뺀 나머지 품목을 판매했다. 이미 프랑스에서 상품을 판매했으니 다른 방면으로 수출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이민호가 권고했다. 내륙으로 신성로마제국에, 또는 발트 해를 통해 폴란드에 판매하면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에서 올덴바르네벨트를 따라온 상인들의 눈이 완전히 뒤집혀서 제대로 말을 알아들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무역 국가라지만 작은 나라에서 왜 이렇게 많이 사는 건지 모르겠소. 내가 더 불안하오.”

“이런 고급 상품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에스파냐의 적이지만 불쌍하네요.”

상품을 사겠다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달려들어 아우성을 치는 암스테르담 상인들을 지켜보며 이민호와 비올레타가 혀를 찼다. 상인들이 품목과 물량을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 바람에 수송선에 적재한 상품이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그러나 북미 원주민들에게 나눠줄 선물이 있어야 하기에 일부는 재고로 남겨뒀다.

상인들은 에스파냐 두캇과 베네치아 플로린, 금괴와 은괴로 대금을 결제했다. 플랑드르 플로린 금화는 아직 주조되지 않은 시대였다. 어이없게도 프랑스에서 판매한 액수의 세 배 이상을 이 작은 도시에서 판매했다.

봄가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이 고산국 왕궁에서 거래하는 물량이 계속 늘어나 올해는 매 반기에 은 2천만 냥에 달했다. 그러나 수많은 품목의 상품을 거래하려면 며칠씩 걸렸기에, 한나절에 은 천오백만 냥이 넘는 상품을 판매한 것은 이민호도 이 날이 처음이었다.

항구에서 교역이 계속되는 동안 이민호는 비올레타, 호위들과 함께 시장을 구경했다. 흉갑을 입고 투구라기보다는 철모에 가까운 모자를 쓴 네덜란드 의용병들이 따라다니면서 이민호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검집이나 창대로 밀어붙였다. 주로 사업제의를 하는 상인이거나, 탄광에서 일하는 해적들의 석방을 청원하는 가족들이었다. 해적 가족에게는 시장에게 물어보라고 했고, 사업 제안서는 시청에 내라고 권했다.

시장을 돌면서 이민호는 양털과 면화 가격을 중심으로 조사를 했다. 잉글랜드 양모는 품질은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도 가격은 예상보다 비쌌다. 과연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양이 농민을 잡아먹을 만했다. 면화도 멀리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상품이라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잉글랜드와 이집트를 바로 망하게 할 수 있겠군.”

“전하께서는 무역을 하면서도 항상 국가 전략을 고민하시는군요. 비록 에스파냐의 적국이지만 전하께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는 잉글랜드가 불쌍해요.”

“내가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것을 알고 있었소? 잉글랜드 놈들이 힘이 커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오.”

잉글랜드는 아직 본토에서도 제대로 기반을 잡지 못했다. 16세기 중반에 통합시킨 웨일즈에서는 불온한 분위기가 감지됐고 스코틀랜드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몇 년째 반란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나 프랑스에 비하면 허약한 섬나라 주제에 조만간 해가 지지 않은 대영제국으로 발전한다. 이민호가 노려보는 한 앞으로 그럴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이곳 에이모이덴에서 교역을 시킬 건가요?”

“아니오. 상선만 보낼 때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야겠지요. 이번이 처음 교역이고 대동한 군함이 많아서 직접 암스테르담으로 간다면 아마 위협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맞아요. 그렇지 않아도 고산국이 에스파냐의 동맹으로 알려져 있으니 혹시나 오해로 인해 전쟁이 나면 큰일 나지요.”

물론 이민호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 문제도 중요했고, 이 시대 기준으로 오버 테크놀로지인 순양함의 비밀도 지켜야 했다. 현재 고산국에서 중형 철선이 건조 중인데 돌아갈 때쯤 완성될 예정이었다.

“오호! 유럽에서도 양탄자를 만드네?”

“페르시아 양탄자하고 좀 달라요.”

이민호는 양탄자를 판매하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네덜란드 상인에게 물어보니 직물공업이 발달한 남쪽 레이던에서 양탄자 생산도 활발하다고 했다. 가격이 꽤 비싸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견본 몇 장만 구입했다. 직조기술은 별로 배울 게 없었고 유럽에서 인기 있는 문양과 디자인을 참조하기 위해서였다.

“비올레타의 침실 바닥에 깔아야겠소.”

“너무 비싼 물건 아닌가요?”

“바닥이 딱딱해서 혹시나 우리 마르그레타가 다칠까봐서 그렇소.”

“어머! 고마워요.”

판매 외에도 네덜란드에서 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사들였다. 맥주 품질이 프랑스보다 훨씬 나아 대량으로 매입했고, 며칠 동안 함대 승조원들이 다들 즐거워했다. 이곳 유제품의 품질이 좋아 치즈와 버터도 대량으로 사들였다. 물량이 부족해 다른 도시에서 급히 가져오기도 했다.

에이모이덴 항에서 딱 하룻밤만 머물렀다. 체류하는 기간이 짧아서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그림 몇 점을 입수할 수 있었다. 성상 파괴 운동 때문에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그림은 거의 남지 않았고, 명화나 조각품은 주로 잉글랜드에서 대량으로 매입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민 희망자는 없었지만 학자와 학생, 화가 몇 명이 고산국 본토에 가길 원해서 받아들였다. 첫날이라 이민호가 그들을 집무실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했다.

포크와 나이프는 이탈리아, 프랑스 순으로 요즘 귀족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뿐, 아직 네덜란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민호를 흉내 내면서 포크와 나이프를 힘겹게 사용하던 자들이 결국 손을 써서 음식을 먹고 말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고산국 식단 중에서 스테이크를 특히 좋아했다. 커다란 덩치들이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고기를 손으로 잡고 칼로 썰어먹는 꼴을 보면 의외로 귀여웠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귀여워서.”

“어머!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에요.”

이민호가 대답하자 상대방이 두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남자라면 몹시 역겨운 반응이겠지만, 이민호가 다시 보니 여자가 맞았다. 현대 한국에서 살 때 네덜란드 출신의 멋진 모델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 인물은 아직까지 못 봤다.

“직업이 뭔가?

“화가예요. 아시아에는 아시아 특유의 화풍이 있다고 해서 배우러 가는 길이에요.”

“네덜란드의 화가라면 먼저 이탈리아부터 가보는 게 낫지 않나? 고전 건축물이나 조각품 일부가 아직 남아있고, 르네상스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 아닌가?”

“이탈리아는 몇 년 전에 다녀왔어요. 배운 게 많아요.”

이민호가 하마터면 용병이냐고 여자 화가에게 물을 뻔했다.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이 시대 기준으로 철학이나 신학, 외국어 등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너무 많이 해서 외교관이나 정치가를 겸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처럼 네덜란드에 왔는데 북부나 남부에서 데려갈 만한 유명한 화가가 없었다. 렘브란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루벤스는 이제 갓 그림공부를 마치고 안트웨르펜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신교도 화가는 성화나 종교적 주제를 가진 작품을 잘 안 그리지? 그럼 뭐 먹고 살아?”

“귀족 초상화나 여러 가지를 그려야지요. 대서양을 건널 때 폐하와 비올레타 공작부인을 함께 그려드릴까요? 배 삯 대신으로 해요. 배 삯을 안 받겠다니 미안해서요.”

“오! 그거 좋지. 여기 화가가 여러 명이지? 그릴 사람은 참가하도록 해. 선불로 금화 5두캇, 그림을 완성하면 금화 10두캇을 주겠어. 하루에 한 시간만 서 있으면 되나?”

“와아! 많이 주시네요. 대서양을 건너는데 한 달쯤 걸리죠? 채색까지 해서 완성하려면 시간이 부족하겠어요.”

“대서양? 사흘쯤 걸릴 텐데?”

그래서 바로 그 날부터 이민호와 비올레타는 가장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네덜란드 화가들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사진기는 시간을 들이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 지금은 너무 바빴다. 그리고 유럽 왕족들처럼 커다란 초상화를 남겨 복도 벽면에 걸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함대가 출항하기 전에 에이모이덴 시청에 관세 150만 냥을 납부했다. 수레 여러 대가 동원돼 은 5.6톤을 시청 광장으로 실어 나르자 시장이 기절했다.

시민들이 몰려와 지켜보는 가운데 시청 관리들이 은이 담긴 궤짝을 일개미처럼 실어 날랐다. 도시가 생긴 이래 최대의 대박이었다.

“영수증을 발행한 공무원이 수전증에 걸렸나?”

“당연히 손이 떨리겠죠. 금화 환산 117만 두캇이라니.”

이민호와 비올레타는 세금 납부 영수증을 기념품으로 챙기고 출항했다. 작은 도시 에이모이덴 시청과 시민들에게 큰 이익을 남겨주고 떠나는 함대를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송했다. 상품을 매입한 암스테르담 상인들도 한자 동맹 도시나 독일 내륙 지방으로 판매하는 동안 몇 달이나 호황을 누렸다.

고산국 함대는 오전에 북해 연안 엘베 강 하구에 위치한 쿡스하펜에 도착했다. 이 항구는 130km나 떨어진 한자 동맹 자유시 함부르크에 속한 항구였다. 엘베 강의 폭이 500미터 정도로 꽤 넓었으나 함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함부르크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일단 위험을 감수하기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쿡스하펜의 해안요새에서 대포 여러 문이 함대를 향했고, 한자 동맹에 속한 군함에 탄 선원들이 고산국 함대를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강 주변에 숱하게 많은 요새들이 세워져 있어서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봤다.

항구 거리는 의외로 활기가 넘쳐흘렀다. 거리에는 다락방이 딸린 3, 4층 석조 건물도 있고, 지붕이 아주 커다란 독일 전통 방식으로 지은 초가집도 섞여 있었다. 불이 나면 아주 끝내주게 잘 탈 것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그러니까 이슬람 해적에게 붙잡혀 북아프리카 노예시장에 팔리던 독일인들을 사서 멀리 여기까지 데려왔다고요? 단지 그들을 풀어주기 위해?”

“그렇다니까. 제발 좀 믿어라!”

노를 젓는 자그마한 배를 타고 온 관리와 통역이 자기들끼리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관리인 듯한 자가 믿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관리나 통역은 고산국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나는 향신료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이민호가 수송선에 연락해서 독일인들이 갑판에 오르게 했다. 관리가 탄 배가 수송선 쪽으로 가더니 또 한참 동안 대화했다.

“확인됐습니다. 정체를 밝히길 꺼리지만 저들은 아마도 외국 상선이나 사략선에서 선원으로 일하던 자들인 것 같습니다. 용병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 그냥 평범한 민간인 행세하던데?”

전투에서 불리하면 도망치는 일반적인 용병과 달리 고용주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는 스위스 용병도 유명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른 나라에서 용병으로 일하는 독일인들도 많았다. 17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바다에서 여러 번 싸울 때 네덜란드 배에 타고 싸운 자들은 태반이 독일인이었다. 체구는 크지만 겁이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영국 함대를 상대로 잘 싸운 이유였다.

“어느 나라 귀족이신지 참 대단한 분이시군요. 어쨌든 노예에서 해방해 여기까지 데려오신 이국의 귀족님께 감사드립니다. 세 번째 부두에 정박해서 그들을 석방시켜주십시오. 나머지 배는 상선이 아닌 군함이므로 입항을 불허합니다.”

“알았다. 그런데 저들이 고향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그거야 알 수 없지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에는 괜찮겠지만 육로는 영지 경계를 지날 때마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실 통행료를 바치면서 수로를 이용할 때도 그곳 영주가 괜히 심통이 나면 가끔 대포를 쏘고 그럽니다.”

============================ 작품 후기 ============================

북유럽도 거의 끝나가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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