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9 53. 북미 순행 =========================================================================
53. 북미 순행
나흘 밤을 바다에서 보내고 그 다음 날 아침, 뉴펀들랜드 남쪽 바다에 함대가 도착했다. 지난해보다 에스파냐 포경선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함대가 나타난 뒤에도 여러 나라의 어선들이 평화롭게 조업했으나, 유독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어선들만 놀라서 황급히 달아났다.
“스코틀랜드 어선 한 척만 잡으시오.”
두 나라 어선 10여 척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이민호가 전단장에게 명했다. 곧 예하 순양함 두 척이 스코틀랜드 어선 한 척을 몰이사냥 하듯이 잡아왔다.
총을 겨누고 있는 해병들 사이로 이민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갑판에서 내려다보는 동안 작은 범선에 탄 스코틀랜드 어민들이 와들와들 떨었다. 통역관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물어봤는데 선장이 영어는 별로 못했고 프랑스어가 의외로 잘 통했다.
“너희들은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잘못했습니다. 북미 대륙은 고산국 영토입니다. 다시는 안 오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너희들이 페로 제도에서 해적질을 하던 놈들이냐?”
“저희는 절대 아닙니다. 여기서는 페로 제도보다 스코틀랜드가 더 가깝습니다. 해적질한 어부 놈들은 아이슬란드나 페로 제도에서 대구 잡이를 하던 놈들이 대부분입니다.”
뉴펀들랜드 어장에서 조업하던 스코틀랜드 어선들이라도 가끔 방향을 잘못 잡거나, 풍랑에 밀려서 우연히 갈 수도 있었다. 혹은 의도적으로 해적질하려고 갔을 수도 있었다.
“알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계속 여기서 고기잡이를 할 거야?”
“할아버지 대부터 여기서 고기를 잡아왔습니다. 귀족님께서 쫓아내지만 않으신다면 계속 여기서 고기를 잡고 싶습니다.”
“그런 배가 몇 척이나 돼?”
“스코틀랜드 어선 말씀이십니까? 계절에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대대로 조업한 배는 한 40척 됩니다.”
이민호가 추측한 것보다 배가 의외로 많았다. 선장은 잉글랜드 어선도 그 정도가 조업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사이 다른 순양함들이 북유럽 다른 나라에서 온 어선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는 기본이고 덴마크와 한자 동맹 도시 소속 어선들도 뉴펀들랜드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쳇! 더럽게 많군. 선장 이름이 뭐야?”
“하미쉬입니다. 제임스라고도 합니다. 성은 존스톤입니다. 항해사는 싸미, 아니 새뮤얼이라 하고, 저놈은 이안입니다. 존이라고도 부릅니다.”
“좋다. 어선 선장 하미쉬 존스톤에게 조업 허가장, 그러니까 어로 면허장을 내주겠다. 판매는 불가능하고 상속만 할 수 있다. 항구는 플라센티아를 이용하도록 하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어선들은 새강릉에 가서 조업 허가를 받으라고 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족님.”
귀찮아서 다 쫓아내버릴 수도 있지만 뉴펀들랜드 어장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의 소속 국가 대부분이 고산국의 고객이 될 나라들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어선들은 앞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추방할 수도 있었다.
“전하! 물고기가 풍부한 어장을 일부러 외국 어선들에게 내주십니까? 소신의 미욱한 생각으로는 미래의 우리 어민들을 위해 어선들을 쫓아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전단장은 작년에 이곳에 없었으니 모르겠군요. 어선들이 하는 일이 조업뿐만이 아니오.”
“흔히 밀수와 밀항을 담당합니다. 더 나쁜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오. 이민선이 왕복해서 실어 나르는 숫자보다 더 많은 이주민을 태워 올 것이오.”
얼마나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유럽에서 이주민들을 이민선보다 많이 실어올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정식 교역이 아니더라도 어선들이 새원산 등에서 수입해가는 양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봤다. 한대기후에 가까운 북미 북동부를 개척하는데 조업 허가를 받은 어선들이 두 가지 방면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함대가 북미 북동부 해안선을 타고 남하하면서 매사추세츠 보스턴 근처를 탐사했다. 잉글랜드에서 이민선을 보낸다면 이 근처, 아니면 새원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곳은 메이플라워호가 잘못 도착했다가 청교도들이 눌러앉아 개척한 곳이기도 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잉글랜드 남부 플리머스 항에서 서쪽으로 항해해 케이프 코드(Cape Cod), 즉 대구 만에 도착하기까지 두 달이나 걸렸다. 멕시코 만류와 강한 서풍을 받으면서 갔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었다. 그러나 메이플라워호가 상선이라서 뱃길을 몰라서 시간이 걸렸지, 100년 넘게 조업을 한 북유럽 어선들은 보다 효율적인 항해를 했다.
“해안에서 북미 원주민이 접촉을 원합니다.”
낚싯바늘처럼 꺾인 만 안으로 함대가 들어가서 탐사하는 중에 해안에서 원주민들과 접촉했다. 북미 원주민들이 손을 흔들며 함대를 환영했다.
“웰컴! 잉글리시맨!”
“노 잉글리시.”
“오! 쿡! 고산 쿡!”
“쿡이라고 하지 마!”
이민호가 잘 안 통하는 영어로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원주민들은 가끔 찾아오는 잉글랜드 어민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프랑스어 통역이 그 동안 배운 영어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눴다.
원주민들이 함대를 부른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두 부족 추장들이 모이는 날 아침에 전사들이 큰 사슴 일곱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사람 수에 비해 고기가 너무 많이 남아 걱정하던 차에 마침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눠 먹자고 무작정 불렀다는 것이다.
초청했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라서 이민호가 몇 가지 음식과 선물을 갖고 내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고기를 소금을 쳐서 나눠 먹었다. 선물로 칼과 면직물을 추장들에게 나눠주니까 아주 좋아했다.
“저들은 왐파노아그 부족과, 그 갈래 부족인 파두셋 부족입니다. 수렵과 농경, 어로를 행하며 옥수수를 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평화로운 부족이네. 그런데 잉글랜드 어민들하고 접촉했다면 천연두로 몰살하고 그러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전염병이 번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서쪽 내러갠셋 부족들이 하던 대로 물을 끓여 마시자 그 이후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천연두가 물 끓여 마셨다고 사라질 질병이 아닐 텐데?”
이민호는 몰랐지만 잉글랜드 어부들이 해안에서 북미 원주민과 접촉하면서 유행시킨 병은 천연두가 아니라 렙토스피라였다. 렙토스피라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라 몇 십 년 전부터 사람에서 사람 또는 쥐 등에게 전염돼 북미 전역에 유행했다. 당연히 수많은 북미 원주민들이 죽었고, 고산국이 맨해튼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구가 많이 줄어든 시기였다.
그런데 새원산에서 고산국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북미 원주민들이 생명줄을 얻었다. 고산국 의사들이 원주민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무조건 물을 끓여 마시도록 설득했고, 이것이 원주민들 사이에 유행이 됐다. 결국 북미 북동부 원주민들이 절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왐파노아그 부족의 마사소이트다, 라고 합니다. 마사소이트는 알곤킨 공통어로 대추장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고산국의 마사소이트들의 마사소이트다. 원하는 것이 뭔가?”
“맨해튼 고산국의 마사소이트보다 높은 사람인가? 반갑다. 서쪽의 내러갠셋 족이 자기들 영토를 넘어 자꾸 침략한다. 침략자를 상대로 함께 싸워주길 부탁한다. 보답으로 우리 부족에서 남는 모피를 모두 주고, 앞으로 5년 동안 사냥한 동물의 모피를 주겠다.”
통역이 내러갠셋 족에 대한 정보를 이민호에게 알려줬다. 내러갠셋은 허드슨 만 동쪽부터 로드아일랜드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원주민 부족이었다. 맨해튼 동쪽 롱아일랜드에도 거주해서 새원산과 거래를 튼 부족이었다.
“전쟁에 참가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내러갠셋 족은 고산국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부족 간의 영토를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하길 권고한다.”
“우리 힘들다. 우리는 농사짓고 사냥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 하지만 서쪽에는 내러갠셋, 북쪽과 북서쪽에는 모호크와 모히칸 같은 도둑놈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고산국 백성으로 들어와라.”
“우린 그냥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바로 그것을 도와주겠다. 너희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곳에서 편히 살면 된다. 고산국 백성이 되면 전쟁을 막아주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다.”
두 부족 추장들이 말을 빠르게 하며 의견을 나눴다. 그러나 추장들끼리 협의한다고 해서 바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돌아가 전사들을 모아서 의견을 물어보겠다.”
“맨해튼의 대추장을 찾아 내 이야기를 하고 백성이 되겠다고 해라.”
맨해튼 개척을 맡은 이조 참판이 졸지에 대추장이 되었다. 이민호는 왐파노아그 및 파두셋 추장들과 악수를 나누고, 선물을 더 준 다음 헤어졌다. 칼을 너무 많이 줬다간 오히려 두 부족이 내러갠셋 부족을 침공할까봐 일부러 인원수의 두 배만 줬다. 추장들이 가장 신뢰하는 전사에게 칼을 주면 그 추장의 권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함대는 오후에 새원산으로 입항했다. 이조 참판과 새원산 관리들이 부두에 나와서 함대의 입항을 환영했다.
명나라 노무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 일 년 만에 본 맨해튼 섬은 어느덧 도시로 변해 있었다. 남쪽 끝은 바다에서의 침략에 대비한 요새가 세워져 있고, 그 동쪽에 항구가 위치했다.
맨해튼 내륙 쪽에는 이민호가 옛날에 한국에서 봤던 저층 시민 아파트 단지가 세워져 있었다. 한국에서야 재개발을 앞두고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 단지였지만 이곳은 건축된 지 일 년도 안 된 깔끔한 거주 시설이었다. 현재는 명나라 노무자들이 절반 정도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비어 있었다.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구한 기독교도 노예들이 이제는 자유민이 되어 항구에 내렸다. 2천여 명이 갖가지 나라 말로 떠들며 북적거렸다. 노예였을 때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맨몸이었지만 새 옷 몇 가지를 얻어 입고 얼떨결에 전리품을 받아서 최소한 은 몇 냥씩은 갖고 있었다.
“너희들을 노예에서 구할 때 지불한 매입비용은 빼더라도, 대서양을 건너는 운임과 식대 등을 돈으로 계산하면 꽤 많다. 그러니 3년 동안 일해서 갚아라. 그래도 월봉은 한 달에 은 한 냥을 주겠다. 3년이 지나면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해도 좋다. 여기서도 몇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다면 남자들은 대부분 도로를 닦는 노무자가 될 것이다.”
“국왕폐하! 은 한 냥이라면 1과 3분의 1온스가 약간 넘는 것으로 압니다. 배 삯이 많이 들어서 3년 동안 일을 해서 갚아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겨우 은 한 냥을 받고 어떻게 삽니까?”
“겨우?”
여기서 환율 차이에 의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한 달에 은 1파운드, 12냥 정도 받아야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괜히 머스킷 가격이 조선보다 몇 배나 비싼 것이 아니었다.
에스파냐가 중남미에서 은을 대량으로 실어온 이래 유럽에서는 가격 혁명이 진행되면서 모든 물가가 폭등했다. 식량과 옷, 농기구 등 모든 물품이 새로운 가격을 형성한 것이다. 지금까지 옥 도자기나 비단, 모피 등을 유럽 상인들에게 팔면서 몇 배나 되는 폭리를 취했다고 이민호가 양심에 가책을 받았으나, 사실은 유럽 물가 자체가 비싸서 별로 폭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은 기준으로는 비싸지만 주식인 쌀과 밀로 놓고 본 식량 기준으로는 동서양의 가격이 비슷했다. 대표적으로 머스킷과 조총 가격을 은 기준으로 비교하면 유럽이 몇 배나 비쌌지만, 주식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했다.
“너희들은 3년 동안 식대,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가 무료야. 월급으로는 간식이나 사 먹고 나머지는 저축해. 그리고 북미에서는 모든 것이 유럽보다 싸다.”
“싸봤자 가격 차이가 얼마나 크다고 그러십니까? 고산국이 부자 나라니까 물가가 더 비쌀 것 같습니다.”
“월급으로 은 한 냥을 받으면 쌀 두 섬, 여섯 가마를 살 수 있어. 도정한 밀가루 열 가마를 넘게 살 수 있는 큰돈이다. 그 동안 배에 있을 때 나눠준 은이 얼마나 큰돈인지 이제 알겠지?”
“우워어~”
“앞으로 받을 돈은 저축해서 나중에 예쁜 마누라 얻어서 장가가도록 해.”
“감사합니다! 국왕폐하 만세!”
2천여 명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평생 하던 일인 선원으로 빠지고 3백여 명이 제화공, 직공 등 기술자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나머지는 명나라 노무자와 같은 건축, 토목 일을 배우게 했다.
새원산에서 출발한 탐사대가 철도 노선을 정하기 위해 현재 오대호 주변까지 접근했다고 한다. 조만간 철로 건설이 시작되면 모리스코들과 함께 이들이 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모리스코들도 조만간 새원산 쪽으로 올 예정이었다.
해방 노예들에게 전깃불을 키고 끄는 일을 가장 먼저 배우게 했다. 전기난로와 취사용 석유곤로 사용법도 배웠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불이 날까 걱정이었다. 기본적인 것을 배운 유럽인들이 연립주택을 배정받아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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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원산에서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