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25화 (474/1,000)

00525  54. 남태평양  =========================================================================

“비행기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번에 사람이 기구에 직접 타고 하늘을 날지 않았나요? 왕도에도 기구가 떠 있잖아요. 기구는 안 써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구조가 복잡하고 안정성이 떨어지는 비행기보다 기구가 훨씬 안전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이민호도 비교적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기구나 비행선을 쓰고 싶었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도 비행선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21세기에도 열기구를 사용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비행기가 하늘을 제패한 사실을 이민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왕도에 있는 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땅에 묶여서 그저 떠 있기만 하는 풍선에 불과해. 기구도 사람이 탈 수야 있지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서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울 거야.”

프로펠러가 달린 헬륨 비행선은 괜찮은 항공 수송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악천후에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는 인식이 강해서 이민호가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구는 해상 경계용 또는 과학용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었다.

“비가 금방 그쳤어요.”

“더운 낮에 비가 잠깐 오는 것도 괜찮네.”

이민호가 다시 침상에 편히 드러누웠다. 비올레타가 무릎베개를 해주고 민영이 야자수 즙을 국자로 떠 먹여줬다. 시녀와 하녀들 거의 30명이 이제는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본격적으로 물놀이를 하며 놀았다. 바로 이곳이 천국이었다.

이틀 동안 남쪽으로 항해해 원주민 말로 올로고야라는 산호섬에 도착했다. 현대 지명으로 키리바시 제도의 키리티마티 섬이었고, 발견자가 붙이려던 이름은 길버트 제도의 크리스마스 섬이었다. 이곳 원주민 언어에서 모음과 자음이 부족했다.

“아싸! 월척이다!”

“나도!”

산호섬 서쪽 만 안에 들어온 함대에서 때 아닌 낚시 대회가 열렸다. 갑판에 늘어선 수병과 해병들이 잡아 올리는 물고기 중에 월척 아닌 것이 드물었다. 튼튼한 군용 낚싯대가 버티다 못해 부러지고 특별히 굵은 낚싯줄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주인님. 미끼 끼워주세요.”

“그래. 잠시만.”

이민호가 베네치아와 갈리시아 시녀들을 위해 새우를 낚싯바늘에 끼워주었다. 징그럽게 생긴 지렁이도 아니고, 요리할 때는 잘도 만지면서 이럴 때만 내숭을 떨었다. 시녀들이 생긴 것과 달리 힘도 좋아서 60cm나 되는 작은 참치를 줄줄이 낚아 올렸다.

“주인님! 물속을 들여다보세요. 물 반 고기 반이에요.”

“그래. 정말 좋은 곳이다. 이 섬에 원양어업 기지를 건설해야겠다. 다랑어 종류가 다양한 것 같아.”

산호섬이 전반적으로 해발고도가 낮아서 태풍이 불면 섬 절반이 파도에 휩쓸리곤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섬 전체가 잠길 위기에 처하려면 아직 수백 년이 남았다. 원양어업, 특히 참치 잡이 어업기지로 이곳과 투발루, 타라와 등 현대 키리바시 지역을 선점하기로 했다.

“전하! 원주민들이 곡식보다는 철제 무기를 원합니다. 통가와 피지, 사모아 등에서 침략자들이 자주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어용상인이 묻자 이민호가 가장 먼저 이 섬 원주민들의 무장 상태를 살폈다. 대부분이 석기나 나무로 만든 무기를 썼으나 추장급은 철제 창촉이 달린 창을 쥐고 있었다. 외부 섬들과 오래도록 이어진 교류를 통해 소수나마 원주민들이 철제 무기를 이미 입수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적당히 내주게. 대신 항구를 만들 지역을 영구적으로 넘겨달라고 하게.”

“우리 어선들이 자주 들르면 더 이상 외부 침략자들이 몰려오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겠습니다.”

“그거 좋은 핑계일세.”

함대에 따라다니는 어용상인이 다시 원주민 대표들과 협상하려고 돌아갔다. 피부가 갈색보다는 빨갛게 보일 정도로 햇볕에 그을린 원주민들이 개인적으로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물고기 말린 것을 넘기는 대신 무기를 달라고 졸랐으나, 원주민 대표들로 교역 창구를 단일화시켰다.

함대가 정박하고 있는 동안 다른 마을 원주민들과도 교역을 진행했다. 이번에 교역에서 빠진 마을은 아마도 다음에 왔을 때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 확실했다. 남태평양에서는 외부 섬에서 수시로 침략할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마을들끼리 항상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용상인이 원주민들에게 넘긴 철제 무기는 주머니칼이나 작은 식칼이 아니라 커다랗고 튼튼한 정글도였다. 창날과 화살촉도 많이 넘겼다. 추장이 몹시 기뻐하며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외부 침략자들과 세력이 역전될 것이 확실해서, 그 동안 이 섬을 침략해오던 사모아, 통가, 피지 등이 거꾸로 침략 당할지도 몰랐다.

자그마한 카누를 타고 바닷길 2천 km를 건너와서 공격하는 침략자들도 참 대단한 정성이었다. 그러나 현대 키리바시는 국토의 폭이 나중에 독립한 투발루까지 포함하면 한때 3천 km가 넘었다.

이민호는 남태평양 원주민들의 해양 활동 영역이 의외로 넓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상식에서 벗어나기에 그 사실을 자꾸 잊어먹게 된다.

산호섬은 모래사장을 비롯해 경치가 굉장히 좋았지만 관광지로 개발하기에는 고산국 본토에서든 북미에서든 너무 멀었다. 그리고 물고기 외에 다른 자원도 없어서 일단 영토 표지석만 사방에 세웠다.

다랑어 종류는 가격이 비싸기에 조만간 고산국 어선들이 멀리 이곳까지 몰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업하는 어선들과 본토를 왕복할 대형 냉동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은 아니었다.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오늘 낚시로 잡은 물고기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이민호가 비올레타, 팔라완 백작 부부, 필리핀 구스만 총독과 함께 자리한 식탁에 원주민들이 작살로 잡은 커다란 참다랑어가 떡하니 누워 있었다. 길이가 1미터가 넘는데도 이 참다랑어는 치어로 취급됐다. 식탁이 워낙 푸짐해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런데 아직도 고산국 영역에서는 생선회 요리가 금지됐기에 아깝게도 참치 회가 아닌 참치 찜을 해먹게 됐다. 그나마 주방장이 참다랑어 머리 부위를 즉석 숯불구이로 요리해주어 별미를 맛볼 수 있었다.

“구스만 총독! 에스파냐는 태평양에 산재한 여러 섬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고산국에서 다 차지해도 이의가 없습니까?”

에스파냐는 사이판과 괌 등의 섬을 고산국보다 훨씬 빨리 탐사를 마치고 해도에도 등재했다. 그 섬들에 에스파냐 상인들이 수시로 방문해 차모로 원주민들과 교역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카풀코까지 정기 항해를 하는 마닐라 갈레온 외에도 여러 에스파냐 배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태평양을 항해하면서 수많은 섬을 발견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섬의 위치를 해도에 올리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민다나오처럼 필리핀 영역으로 지정된 섬에는 수시로 군대를 보내 원주민들을 지배하려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야 당연히 외따로 떨어진 섬들은 계속 영토로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에스파냐 항해자들도 새로운 섬을 발견하면 측량도 하고 해도에도 올리지만 영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다른 모양입니다.”

“신대륙을 고산국과 에스파냐가 반분했으니 다른 나라들은 작은 섬이라도 영토로 얻고 싶겠지요. 새로운 영토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이해합니다만, 에스파냐에 배타적일 테니 차라리 고산국이 태평양의 모든 섬을 영유하는 게 낫습니다.”

“양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그마한 섬이라도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내주면 나중에 골치 아플 것 같아 고산국에서 탐사선을 보내 미리미리 선점하고 있었다. 유럽 항해자들이 새로운 섬을 발견해 신이 나서 탐사하다가 고산국 영토 표지석을 발견하고 낙심할 생각을 한 이민호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식사 중에 시간을 확인한 이민호가 커다란 상자 모양의 단파수신기를 켰다. 단파는 날씨나 기상조건에 따라 수신이 불안정하지만 전파 도달 거리가 최고였기에 선택한 방송용 주파수였다. 국내 방송은 현대 기준으로 AM, 즉 중파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나, 고산국은 영토가 워낙 넓고 중간에 일일이 중계기를 세우기도 어려워서 초기에는 단파가 더 유용했다.

잠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흘러나오다가 또렷한 사람 목소리가 울렸다. 방송국 개국일은 아직 멀었으나 방송 관계자들이 계속해서 시험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 고산국 왕립방송국에서 제1 방송주파수를 통해 시험 방송 중입니다. 하나, 둘, 셋.

식탁에 모인 사람들이 소리가 나오는 단파수신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방송 진행자가 스페인어를 비롯한 몇 가지 언어로 고산국 방송임을 알렸으나, 단파수신기를 보유한 국가는 고산국이 유일해서 사실 필요 없는 멘트였다.

“전하. 다른 배에서 보내는 무선 통신입니까?”

“아닙니다, 백작. 왕도 고북 시에서 보내는 방송입니다.”

전파를 이용해 전화선이 연결되지 않은 순양함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팔라완 백작은 고산국과도 말이 전달된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은 방송의 전략적 가치를 단박에 파악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즉시 의사소통이 가능하겠습니다. 이건 세계의 군 역사에서 최대의 사건입니다. 혁명입니다!”

“물론 그렇게 이용할 수도 있겠지요, 총독.”

그러나 단파수신기에서는 고산국 최고 사령부가 발하는 작전 명령이 아니라, 경쾌한 르네상스 음악이 흘러 나왔다. 오를란도 디 라소가 작곡한 플랑드르 세속곡이었다. 총독이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단파수신기를 소유한 민간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산국 군함에 한 대씩 들여놓기는 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방송이 되지 않는 시점이어서 대부분 수병들은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조만간 배나 부대마다 표준 장비로 보유하고 일반 백성들도 사서 들고 다니도록 작게 만들 예정이었다. 건전지는 기원전부터 이론적 근거가 제시된 물건이라 제작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하. 실내 관현악단이 연주하고 있나요?”

“왕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이 연주했소.”

“제 말은 지금 연주하는 것을 방송하는 것이냐고요.”

“아니요, 비올레타. 연주할 때 낸 음악소리를 원판에 새긴 것이오. 녹음이라고 하오. 그 원판을 돌리면서 바늘을 얹으면 언제라도 같은 소리를 재생할 수 있소. 그 재생된 소리를 지금 방송하는 것이오.”

음향 저장도구로서 레코드판이 이미 완성됐다. 라디오는 초기 뉴스 매체로서 역할도 크지만 음향 전달 전용 매체라서 장기적으로 음악방송으로서 가장 효용이 컸다. 그러나 이민호는 TV를 만들 자신은 없었다.

“이렇게 대단한 것을 개발하고선 겨우 음악을 들려주다니, 무척 놀랍습니다.”

“총독은 의아할지 모르겠으나 군용 통신체계는 따로 갖출 계획이고 이것은 고산국 모든 지역에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우선할 예정이오. 그리고 장기적으로 여러 주파수를 통해 백성들에게 음악이나 유흥을 제공하거나 경제 정보도 제공할 예정이오.”

소형화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단파수신기를 각 지역마다 비치해서 새로운 소식을 전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어선에는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 단파수신기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이 정보를 얻지 않습니까? 그럼 저희가 수신기를 사서 그 정보를 들어도 됩니까?”

“외국인이라도 수신기를 소유하는 것은 상관없소. 아무래도 정보는 어느 정도 제한될 테니까 말이오.”

단파수신기를 고산국 백성들이 보유하면 외국으로 유출될 것을 당연히 예상해야 했다. 일반 백성들은 단파수신기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기계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고, 외국인에게 팔지 말라는 설득이 먹혀들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핵심 기술은 송신 쪽이지 수신기가 아니었으며, 이 시대 기술로 외국에서 복제는커녕 이해하기도 불가능했다.

총독이 이민호에게 할 말이 많은 듯했으나 이민호는 그저 씩 웃어넘기고 말았다. 필리핀 총독부나 에스파냐에 방송국을 설립해서 전파기술을 넘겨줄 의향이 전혀 없음을 내비치자 총독이 아쉬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닐라에서 더 많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조선말을 배워야겠군요.”

구스만 총독은 큰 충격을 받은 채 수송선으로 돌아갔다. 이민호는 방송국이 개국한 이후 몇 년 동안 단파수신기를 아주 비싸게 팔아먹을 음모를 꾸몄다. 식당에서 시연한 단파수신기는 사실 부피만 큰 빈 깡통이나 다름없었고 실제 내용물은 별로 없었다.

수송선 한 척에서 한 층 절반의 실내공간을 개조해 구스만 총독과 팔라완 백작 부부 등 에스파냐 귀족들을 태웠다. 이 사람들은 함대와 동행하면서 유럽과 북미 여러 지역을 지켜보는 동안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전자출판 2권 원고 교정 중입니다.

아마 오늘도 하나만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충하도록 노력겠습니다.(가능...하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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