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7 54. 남태평양 =========================================================================
아주 기분 좋게 교역이 끝나서 즐거워진 이민호가 원주민 남자들을 불렀다. 그리고 쌀과 밀, 소금을 한 포대씩 공짜로 나눠줬다. 20킬로그램씩 60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였지만 장대한 체구를 가진 원주민들은 가뿐하게 어깨에 메고 씩 웃어 인사를 대신한 다음 유유히 걸어갔다.
교역이 진행되는 동안 질서를 유지해준 추장에게는 별도로 정글도 세 개를 주고, 쌀과 밀, 소금을 열 가마씩 선물했다.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순수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추장이 몹시 기뻐하더니 이민호에게 흑진주 한 가마를 선물로 주었다. 오늘 이곳에서 교역한 전체 양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많아서, 이민호는 설마 여기서도 북미 원주민들처럼 포틀래치가 이뤄지는지 의아했다. 추장이 내민 흑진주 한 가마는 아무래도 추장의 개인 재산 같았다.
“주인님! 선물을 더 많이 줘보세요. 흑진주가 아직 남아있나 봐요.”
“그래야겠지? 아니, 그만하자. 선물은 선물이니까.”
이민호는 민영이 조바심을 내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어 그럴 마음을 접었다. 선물을 서로 많이 주는 경쟁을 통해 부와 신분을 뽐내는 선물 배틀을 원주민 추장을 상대로 벌이고 싶지 않았다. 어느 원주민들은 일 년 동안 모은 재산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움으로써 부와 신분을 과시한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비슷한 관습일 것 같았다.
함대는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깨끗한 식수를 싣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 전에 원주민들이 가는 길에 먹으라고 각종 과일을 배로 실어 날랐다. 바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고 원주민들의 마음도 따뜻해서 근래에 행했던 교역 중에서 가장 좋은 기억이 되었다.
“민영이도 작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에요. 하지만 주시면 받을게요. 헤헤!”
마지막에 받은 흑진주 한 가마에서 몇 말을 퍼서 수병과 해병, 기병 등 승조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필리핀 총독부에서 근무하는 에스파냐 관리들도 얼떨결에 비단손수건에 싼 굵은 흑진주 하나씩을 받았다. 마침 국왕좌승함에 세공사가 동승한 덕택에 일을 맡겼다.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팔라완 백작부인, 그리고 민영에게 지난번 백진주 목걸이에 이어 이번에는 같은 디자인으로 흑진주 목걸이를 선물했다. 여진족 호위들과 베네치아 시녀들에게도 진주 팔찌를 나눠주었다. 우크라이나 하녀들에게는 진주 귀걸이 한 쌍씩 나눠주었다. 다들 좋아서 폴짝폴짝 뛰어 선물을 한 이민호도 기분이 좋았다.
팔찌 정도만 해도 유럽 귀족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간신히 살 수 있을 고가의 선물이었다. 갈리시아 시녀들은 이민호가 아닌 비올레타의 시녀이므로, 팔찌 몇 개를 비올레타에게 넘겨서 나눠주도록 했다.
이민호가 비올레타의 방에서 마르그레타와 놀아주는 동안에도 갈리시아 시녀들이 자꾸 팔찌를 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유럽에 가서 팔 수 있다면 팔자를 고칠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민호는 팔찌로 갈리시아 시녀들의 충성심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흑진주는 직접 유럽에 가서 파는 게 낫겠죠?”
“아직은 아니요. 대서양 무역을 좀 더 활성화시키는 것이 우선이오. 유럽 상인들이 가만히 있기보다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오게 할 작정이오.”
“편하게 장사하려는 의도는 아니실 테고, 역시나 북미 동해안에 우리 배가 너무 적어요.”
타히티에서 얻은 흑진주 두 가마를 새원산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북유럽 상인들을 북미로 유인하는데 흑진주가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했다.
아시아에 진입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은 상품 매입 금액이 결정돼 있어서 많이 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매번 그랬듯이 흑진주를 외상으로 넘기고 대금은 나중에 받기로 했다.
“아바바!”
“와! 마르그레타가 날 아빠라고 불렀소! 감동 받았소.”
“그냥 소리를 낸 것 같은데요?”
천사처럼 예쁘게 생긴 아기 마르그레타가 비올레타를 엄마라고 부른 것이 벌써 석 달 전이었다. 이제 아빠를 알아볼 즈음이 되었다. 이런 자그마한 아이가 아빠와 엄마를 알아본다는 사실이 이민호는 무척 신기했다.
비올레타는 항상 마르그레타와 함께 있기에 머무는 곳이 어디든 육아실로 변했다. 그래서 비올레타가 집무실이나 함교로 잘 안 나오려 했다.
아기를 가운데에 두고 비올레타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누웠다. 외정으로 바쁜 정복군주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반적인 여인들과 달리, 이민호의 후궁들은 왕도에 남겨지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민호가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야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함대는 며칠 동안 사모아, 피지 등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들렀다. 통가와 몇몇 섬들은 항로에서 벗어나 생략하고 넘어갔다.
현재 태평양 탐사전단이 남태평양의 섬들 대부분을 해도에 등재하고 바닷가에 영토표지석을 세웠다. 원주민들과의 교역은 천천히 진행해도 급할 것은 없었다. 소와 양을 목축하게 된 새섬에 들러보려 했으나 시간이 촉박해서 나중으로 미뤘다.
나우루도 구아노 수입 문제 때문에 반드시 들러야 했으나, 상인들에게 원주민들과 교섭해서 구아노를 수입하는 일 전체를 맡기기로 했다. 해일이 일어날 때 모든 원주민들이 쓸려가지 않도록 고지대를 남겨두도록 해야 하는데, 이민호의 지시가 잘 지켜질지 모를 일이었다.
사모아 서쪽 우베아 섬의 동해안 마타우투라는 지역에 식인종들이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민호는 새섬과 파푸아 섬처럼 같은 지역 내에서 식인 문제가 생기는 것은 혐오스럽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주변 다른 섬들을 원정하면서 그 섬 원주민들을 다 잡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태평양 전체 섬들을 전란으로 몰아넣을 만한 큰 문제였다.
함대가 우베아 섬 동쪽의 환초 틈새를 간신히 지나간 다음 섬에 포격을 퍼붓고 카누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 남은 숲도 불태워서 더 이상 카누를 못 만들게 했다.
자그마한 섬 전체가 불타올랐다. 우베아 원주민들이 몇 명 살아남더라도 조만간 굶어죽을 것 같았다.
원주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전혀 없고 원시 공산주의 사회 같은 피지 섬에서 학을 뗀 다음 날, 폭이 50km 정도이며 길이가 400km나 되는 ‘길쭉한 섬’의 남쪽에 도착했다. 새원산 남동쪽의 긴 섬보다 훨씬 길었고, 탐사대가 처음에 붙인 이름이 상스럽다 해서 지금 이름으로 바꿨다.
남쪽은 현대 뉴칼레도니아의 수도인 누메아가 되는 인구밀집 지대였는데 이 섬에는 폴리네시아인보다 멜라네시아인 카낙 족이 더 많았다. 그래도 폴리네시아인이 통역에 나서준 덕택에 교섭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교역 전체를 어용상인에게 맡기고 이민호는 비올레타의 방에 있었다.
“너무 덥다.”
“겨울에 이렇게 더우면 여름에는 얼마나 덥겠어요?”
이민호는 마르그레타가 걱정돼서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간접적으로 받도록 조정했다. 더운데 아기가 자꾸 엄마에게 안겨서 비올레타가 더 고생이었다. 주방에서 가져온 얼음이 없다면 모녀가 함께 온몸에 땀띠가 났을 것이다.
“남반구라서 지금이 여름이오.”
“아! 자꾸 깜빡해요.”
“백단목 교역만 하고 바로 출발합시다. 마닐라로 직행해야겠소.”
이민호는 이 섬에서 하와이에서도 샀었던 백단목을 구하러 왔다. 백단향이 명나라에서 최고급 향목으로 알려졌으나, 하와이에서 벌목한 양만으로는 무역을 하기 곤란했던 참이었다. 마침 이 섬에서 백단목이 자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뻐했다.
“전하! 황송하오나 잠깐 나와 보십시오.”
“잠깐 기다리시게.”
어용상인이 수시로 이민호를 찾아 비올레타의 침전에 들락거렸다. 이민호가 상인에게 권한을 대폭 넘겨줬는데도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열 그루에 비단 한 필이라고 했더니 백단목을 매년 일천 그루나 넘기겠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비싼 것을 자기들도 알지만 여기까지 와서 사갈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백단목은 약재나 향료로 쓰기도 하고 향불 재료나 불상 조각에도 사용됐다. 붓이나 칼자루 등 오래된 일본 문화재에 사용되기도 했다.
“천 그루? 이 섬에 나무가 별로 없던데, 그런 식으로 다 벌목하면 몇 년 못 갈 거야. 그리고 천 그루라면 우리 함대 모든 배가 최소 50그루씩 나눠서 실어야 해. 그게 가능할까?”
“제가 욕심을 과하게 낸 것 같습니다. 줄이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고 내게는 보고만 하게.”
“예! 전하!”
어용상인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나갔으나 금방 다시 돌아왔다.
“남쪽에 백단향이 많이 나는 섬을 넘길 테니 비단 100필을 달라고 합니다. 추장이 신부에게 선물할 결혼 예물로 비단 100필이 당장 필요하다고 합니다.”
“얼씨구! 결혼하느라 나라 팔아먹을 추장이네. 그런데 자기네 섬이 확실하대?”
해도에서 그 지역을 찾아보니 길쭉한 섬의 남동쪽 50km 정도에 위치했다. 현대 지명은 프랑스어로 빵 섬이었다.
어용상인이 인질극 때 보니까 용기는 넘치는데 아직 젊어서 그런지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리저리 치이고 사기도 당하다 보면 노회한 상인으로 성장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부족들에게 물어보게나. 그리고 계약서 확실히 작성해. 아랍어를 하는 사람은 없겠지?”
“무슬림은 못 봤습니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주 가끔 향료제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이 좋은 점이, 꾸란을 읽느라 무슬림들이 웬만하면 글자를 안다는 것이었다. 신교도 혁명으로 자국어 성서가 인쇄되는 유럽에서도 아직 문자해득률은 낮은 편이었다.
조선이나 일본에서도 문자의 기준을 한자로 놓으면 문맹이 대폭 늘어났다. 풍신수길이 다이묘에게 히라가나와 한자로 쓴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글자를 몰라서 운운’한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
어용상인이 나가고 나서 비올레타가 물었다.
“고산국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을 것 아녀요?”
“글쎄요. 원주민들은 이렇게 사는 지금이 더 행복할 것 같소. 당분간 의료만 지원해줄까 하고 있소.”
원주민들이 교육을 받거나 부유해진다 해서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유엔에서 국민행복도 지수를 발표할 때마다 가난한 나라들이 수위를 차지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민호가 살던 한국은 국가가 부유할지 몰라도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매우 낮은 편이었고 오히려 OECD 자살률 1위를 아이슬란드와 매년 다툴 지경이었다.
“전하께서는 브루나이 사람이든 북미 원주민이든 어떻게든 먹여살려주려고 하시던데 여기서는 다르시군요. 섬이 많은데도 일정을 이유로 들며 계획된 방문 예정지도 건너뛰고 계세요.”
“인종 차별은 절대 아니오.”
이민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일을 시켜서 고산국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노동에는 임금이 뒤따라야 하고 은화 대신 식량을 나눠준 경우가 많아서 비올레타는 그것을 좋게 본 모양이었다.
“남태평양에서 굶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오. 해산물도 풍부하고 열대 과일도 충분하오. 비올레타가 이곳 원주민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알겠지만, 사실은 이곳이 지상낙원이라오.”
“피지 사람들이 그렇게 게으른 이유가 있었군요. 이곳 원주민들도 얼굴에 근심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아요.”
피지, 즉 비티 섬은 토지가 비옥해서 밭에 씨만 뿌리고 놔둬도 곡식이 알아서 잘 자라는 천혜의 옥토였다. 게다가 개인 소유권 의식이 희미한 원시 공산사회라서 원주민들이 도무지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교역이나 뭐나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섬에서도 원주민들이 순양함에 가까이 와서 구경도 하고, 어린이들은 함대 바로 옆에서 물장구치며 놀았다. 추장부터가 고산국이 공격할 가능성은 아예 제쳐놓은 것처럼 우유부단했다.
이민호가 하품을 늘어지게 했을 때 어용상인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쪽 섬이 카낙 족 추장의 개인 소유 땅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백단목 100그루를 사고 남쪽의 섬 두 개를 샀습니다. 비단은 110필이 들었습니다.”
“아주 잘했다.”
어용상인이 한글과 아랍어로 작성된 계약서를 받아왔다. 추장의 가슴에 새겨졌던 문신이 사인이랍시고 계약서 하단에 삐뚤삐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 원주민이 가끔이나마 접할 수 있는 외국어가 아랍어였으므로, 앞으로 이 계약은 유효했다.
“카낙 족 추장이 비단 100필을 받고 바오 섬과 코토모 섬을 할양해서 영원히 고산국 영토가 됐음을 확인한다. 좋아!”
원주민들 사이에서 토지거래를 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에 북미 원주민들이 백인과 맺은 계약과 달리 사기는 아니었다. 섬을 관리하면서 꾸준히 백단목을 팔아 큰돈을 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항법사! 두 섬을 합해서 빵 섬이라 칭하겠다. 오늘부터 호주에 속하는 고산국 영토다.”
“해도에 지명을 등록하겠습니다.”
남태평양 다른 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호주에서 가까웠다. 정문부가 투덜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작품 후기 ============================
외국으로부터 남태평양 섬들을 영토로 인정받는 과정입니다.
이제 귀로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