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1 55. 1599년 =========================================================================
“너희들은 호위를 지망한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여진족 출신 왕립여학교 졸업생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들 작은 부족의 추장이나 패륵의 딸들이라 원래라면 신부 수업이나 받아야 할 신분이 높은 처녀들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건국 전부터 여진족 출신들을 호위로 발탁하는 바람에 여학생들의 장래 희망도 왕비나 현모양처에서 호위로 변했다. 여진 출신 여학생들은 열심히 운동을 하고 무예를 닦다가 이번에 졸업을 앞두고 전원 이민호의 호위로 지원했다.
“호위가 좋아? 여자로서 꽤나 힘든 일인데.”
“그야 전하를 항상 가까이서 모실 수 있으니까요. 앗!”
한 명이 대답한 직후 씩씩한 호위 지망생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호위들이 자주 원정을 떠나는 이민호를 수행하면서 다른 후궁들보다 승은을 입을 기회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민호도 수긍했다.
“알았다. 하지만 호위 일이 더 중요하니 젯밥에만 관심을 가지면 안 돼. 너희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겠다.”
“믿어주십시오, 전하!”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탄탄한 근육을 유지하더라도 임신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근육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출산을 하면서 호위대장에서 물러난 민희는 궁성의 경비대장을 맡았다.
다시 호위로 복귀하려는 민희를 이민호가 말렸다. 이민호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궁성에 더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민희는 왕실 가족 경호뿐만 아니라 궁성 지하의 황금을 지키는 임무도 맡았다.
“고산국은 왕실 사람들도 예외 없이 일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일을 하는 후궁들을 이해하고 협조해주도록 해. 호위대장 민영에게 배속 신고하고 근무 일정을 조정하도록.”
“예! 전하!”
여진족 졸업생들이 마치 군인이나 된 것처럼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들에게 따로 호위 훈련을 시킨 사람들이 군인 신분이기도 한 여진족 호위였고, 졸업생들도 졸업과 동시에 장교 계급을 부여받을 예정이었다. 곧 진짜 군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동해국의 여진족이 할 일이 많아질 거야. 그래서 너희들이 호위만 하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
“일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뭐든지 시켜주십시오, 전하.”
신임 호위들이 군인처럼 꼬박꼬박 뒤에 전하를 붙여서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승은을 내린 다음에는 주인님이라고 호칭이 바뀔 것이다.
“일단은 시베리아 탐사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해. 목축지와 경작지 확대도 신경 쓰고. 지금도 땅이 넓은데 시베리아까지 관리하려면 어렵겠다.”
“넓은 영토를 관리하는 것은 여진족으로서도 영광입니다, 전하!”
동해국 중심지가 이미 포화상태라 여진족 주민들의 농지와 목축지가 점점 북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아이누 섬처럼 만주지역도 조만간 소빙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서 여름 한 철에만 농사를 짓고 가축들은 겨울에 축사에 가둔 채 건초나 옥수수를 먹여 길러야 했다. 원가가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동해국은 모피와 가죽을 꾸준히 수집해서 소빙기가 오더라도 소득 수준이 갑자기 뚝 떨어질 가능성은 적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진족들이 직접 사냥하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모피를 교역해 고산국 본토로 보내는 식의 경제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렇게 여진족이 앞으로도 먹고 살 길은 마련해주었다.
“전하! 어째서 건주 여진을 복속시키지 않습니까? 계속 전쟁만 일으키는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을 제압해서 여진족을 일통시키고 전하께서 대칸으로 즉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진족이 할 일은 여진족들이 알아서 결정하겠지. 신경은 쓰되 내버려 둬.”
여진족 출신들에게 가장 의아스러운 일이 건주 여진에 대한 처우 문제였다. 고산국의 무력이라면 단 며칠 만에 건주 여진을 멸망시킬 수 있는데도 이민호는 계속 내버려뒀다.
그러나 앞으로 건주 여진이 커져야 명나라의 북쪽 국경을 압박하고, 그래야 고산국에게 기회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만약 고산국이 지금 건주 여진을 복속시킨다면 명나라의 현재 국경선을 그대로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럴 경우 만주의 절반이 날아간다. 명나라가 여진족 때문에 매년 어마어마하게 지출하는 국방비가 확 줄어들면서 명나라 경제의 숨통이 터지는 것도 이민호는 바라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명나라가 기존에 여진족 추장들에게 시행했던 조공체계를 명분으로 만주 전체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명나라가 여진족 추장들에게 벼슬을 나눠주고 무역 권리 칙서를 주면서 만주 전역에 건주위 등 형식상 명나라의 위소체계를 갖췄기 때문에, 만주 전체를 명나라 영토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명나라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고산국의 현재 입지에서는 명나라와 정면 대결하는 모양새는 피하는 편이 좋았다. 명나라를 상대로 고산국이 패배하지는 않겠지만 지금도 명나라와 교역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으므로 지금처럼 우호적인 편이 나았다. 이민호 입장에서 건주 여진은 당분간 살아남을 필요가 있는 적이었다.
현재 몽골에서 건주 여진을 통해 동해국과 교역 체계가 완성돼 건주 여진이 급속히 성장하는 중이었다. 실제 역사보다 빠른 시기에 건주 여진이 명나라를 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이민호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그 사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에 갔던 예조 판서가 돌아왔다. 우연이겠지만 장갑차들이 시베리아에서 혹한지 운행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날과 같았다.
“외교적인 시도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전하!”
“최 판서께서 원행에 수고하셨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소.”
서 지중해를 전쟁수역으로, 동 지중해를 평화수역으로 분리하자는 제안을 오스만 제국에서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지금 무역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이익을 많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라센 해적의 약화는 곧 에스파냐와 기독교 국가들의 침략을 불러일으킨다는 극심한 반대를 받아 교섭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럴 때는 황제의 어머니 사피예 술탄의 힘도 소용이 없었다.
“사라센 해적에게 경제적인 이득을 줘야겠구려. 그래도 거절하면 소탕하는 수밖에요.”
“자칫 오스만 제국과 전면적으로 맞서게 됩니다. 수에즈 운하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집트 총독과 예니체리 지휘관들이 이집트의 독립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만, 대군을 파병할 경우 빠른 시간 내에 반란이 제압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스만 제국과 싸우지 않으려면 유럽은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하고만 무역을 하면 된다. 향신료나 다른 고산국 상품들을 오스만에게 넘기면 오스만에서 베네치아로 판매하고, 그럼 베네치아가 알아서 유럽에 판매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격이 몇 배로 뛰더라도 고산국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산국이 오스만과 대립할 경우 수에즈 운하는 차치하더라도 오스만 영토와 가까운 아부다비가 위험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앞으로 두바이와 카타르까지 영유할 장기적인 계획이 흔들리게 생겼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석유가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19세기부터는 수에즈 운하보다 아부다비가 몇 십 배나 높은 가치가 있었다.
범선을 운용하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고산국 입장에서 수에즈 운하는 필수적인 교통로가 아니었다. 기관을 갖춘 고산국 상선은 멀리 아프리카 남단을 돌더라도 서유럽에 가는 시간은 며칠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민호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사실 우리는 오스만과 전쟁을 할 이유가 없소.”
“그러하옵니다. 헌데 페르시아에서 몰래 편지를 보내 함께 오스만 제국을 치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정작 전쟁이 나면 돕지는 않고 구경만 할 것 같소. 페르시아도 동쪽 국경 때문에 바쁘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무굴 제국과도 접촉했습니다. 제가 강력히 항의했더니 벵갈 태수에게 경고를 하겠답니다. 구르카 여단 병사들이 고향에 월봉을 보내는 일이 수월해질 전망입니다.”
“그거 참 잘 됐소.”
물론 구르카 족은 아직 생기지 않았고 라지푸트 족과 선주민인 네와르 족의 혼혈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부대 명칭은 구르카 여단으로 정했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어째서 구르카 여단 병사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약간 야만적이긴 하나 말도 못하게 대단한 강병들입니다.”
“군에서 5년 이상 근무하면 고산국 국적을 취득하게 해줬지만 신청할 사람이 거의 없다고 들었소. 그리고 핏줄이나 문화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거친 환경이 구르카를 강병으로 만드는 것이오. 고산국에서 태어난 구르카 아이가 강병이 된다는 보장이 없소.”
어릴 때부터 히말라야 고지대에서 자라야 높은 폐활량과 지구력이 갖춰지는지 이민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구르카의 신체 능력과 감투정신은 실로 모든 군인의 귀감이었고, 계속해서 용병으로 고용하기로 했다. 다른 나라 용병이라면 고용주를 잡아먹을 생각을 하겠지만, 스위스 용병처럼 구르카들이 배반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황태자 주상락이 새해 들어서 고산국에 유학 왔다. 황태자로 책봉됐으면 열심히 학문을 닦아야 하는데, 황실에서 세력 다툼을 하다가 정 귀비 일파에게 밀려 쫓겨난 것 같았다.
정 귀비 소생 주상순은 뒤룩뒤룩 살이 찌고 있었다. 만력제는 그런 주상순이 애비를 닮았다며 더욱 귀여워했다. 정 귀비가 황제의 맘에 들게 하기 위해 일부러 아들의 살을 찌웠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형님! 고산국에서 거하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 동생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인생을 길게 보고 심지를 굳게 다지십시오.”
“고맙습니다. 형님이야말로 진정한 대명의 충신이십니다.”
이민호에게 인사하러 온 주상락이 서러움에 북받쳐 결국 찔찔 짜고 말았다. 이민호는 주상락을 위해 작은 궁전을 지어서 내주고, 북경에서 따라온 환관과 궁녀들 외에 명나라에서 수십 명을 고용해 주상락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주상락은 왕립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다. 경제학이나 과학을 배우고 싶다는 주상락에게 이민호가 명나라 환관들과 함께 두 시간에 걸쳐 설득한 다음 권한 학문이었다. 이민호는 다음 대 명나라 황제가 실질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철학과 문학은 제왕학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황태자가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학생들과 자주 어울린다고? 그 나라 말을 배워서?”
“곧 죽어도 황제의 핏줄인가 봐요, 주인님.”
이민호는 미카에게서 보고를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데 황제의 아들에게 그런 재주 하나쯤 있다고 해서 특이할 것은 없었다. 황제의 아들이라 특별하게 보일 뿐이었다.
“황태자가 기거하는 별궁을 남들 모르게 금의위와 동창에서 보호하고 있어요.”
“감시가 아니고? 만에 하나라도 암살자가 방문할지 모르니까 경호를 철저히 해줘.”
왕도에 외국 공작원들이 우글우글했다. 명나라나 조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우방국이라는 핑계로 대놓고 첩보원들을 보냈고, 상인들도 첩보 업무에 종사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안남과 버마 등 동남아 국가들은 관리들을 파견해 고산국의 경제와 신문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진족이 왕성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체포돼 추방되곤 했다.
“최소한 1개 분대가 황태자를 밀착 경호하고 있어요. 그런데 동창과 금의위 위사들을 황제가 보낸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주인님.”
“어째서?”
“황태후와 대신들의 지지로 간신히 황태자 책봉을 받았다지만 주상락은 황제 눈에서 벗어난 지 오래예요. 아마 자성 황태후가 금의위와 동창 제독에게 부탁한 것 같아요. 황태자를 모시는 환관과 궁녀들도 자성 황태후를 모시던 이들이니까요.”
“권력 다툼을 하필 남의 나라에서 하지? 상관없지만, 이 기회에 뭐라도 챙겨봐.”
“당연히 대가를 받아내야죠.”
명나라 황태자가 고산국에 오는 바람에 부담감이 생겼으나, 주상락이 제위를 잇게 된다면 고산국이 명나라에서 얻어낼 이익이 클 것으로 기대했다. 주상락도 고산국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 더욱 의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미카와 왕명명을 시켜 명나라에서 얻어낼 이권이 뭐가 있는지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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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출발을 못했습니다.
제목을 바꿔야 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