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1 56. 지중해 원정 =========================================================================
“만약 유럽이 신성동맹을 조직한다면 함선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을까?”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가 110여 척, 에스파냐가 80척 정도를 동원했어요. 그 전에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베네치아 55척, 에스파냐 49척, 교황령과 몰타 기사단 27척이에요.”
에밀리아는 다른 베네치아 시녀들이 그렇듯 베네치아의 역사에 정통했다. 얼마 전에 조선말을 연습한다고 5세기 아틸라의 침공과 피난에서 비롯된 베네치아 연대기를 조선말로 줄줄 외우기도 했다. 모국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여자는 더욱 고상해 보였다.
교황의 주도 하에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맺은 신성동맹에서 베네치아가 의외로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을 제외하면 오스만 제국의 해군을 상대로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 시대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는 물론 지중해 곳곳에 영토와 식민지를 둔 것은 이민호도 알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라면 일단 물의 도시라는 인상부터 떠올랐다. 지금 두칼레 궁전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풍경이 바로 그 유명한 베네치아의 야경이었다.
“도시가 참 아름답다.”
“그렇죠? 건물이 물에 잠기지만 않는다면 더 아름다울 텐데, 아까워요.”
에밀리아를 뒤에서 안은 이민호의 손이 하나는 풍염한 가슴으로, 다른 하나는 기다란 다리 사이로 향했다. 부드러운 몸에서 좋은 향기까지 나서 꽉 안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물이 맑은 편이라서 물 밑에 조명을 설치하면 건물 벽이 은은하게 비치겠어.”
“전기가, 필요하잖아요.”
궁전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베네치아의 밤은 화려했다. 좁은 골목길을 두고 밀집한 건물들마다 불을 켜서, 하룻밤에 고래 기름이 몇 십 드럼은 필요할 것 같았다. 이민호는 바다로 통하는 입구에 조력발전소를 세워서 베네치아에 전기를 공급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에밀리아의 치마 속에 더 관심을 쏟았다. 치마를 걷어 올리자 에밀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주인님! 사람들이 봐요.”
“여기가 높아서 다 안 보이니까 상관없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에밀리아를 이민호가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결합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피하지 않은 에밀리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호는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향긋한 몸을 가진 에밀리아가 완전히 자기 여자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움직임이 빨라지자 에밀리아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베네치아에는 밤에도 곤돌라를 타고 뱃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자꾸 테라스를 쳐다보는 것 같아 이민호는 몹시 불안했다.
“벌써 끝났어요, 주인님?”
“응. 야경이 참 멋지다. 미안.”
이민호는 에밀리아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너무 빨리 끝나 남자의 자존심에 금이 간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시선이 닿는 곳에서 다시는 여자를 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베네치아 시녀들의 고향에 있는 동안 가급적 그녀들을 자주 안았다. 낮에는 시녀들과 그 부모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베네치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다. 인구가 적으면서도 무역을 통해 강한 해군력과 넓은 영토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베네치아는 고산국과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확실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도 교역을 계속하는 베네치아의 상인정신은 실로 대단했지만, 대서양 무역으로 중심이 옮아가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단기간에 부자가 될 꿈을 안겨준 고산국 함대는 입항 나흘 만에 출항했다. 고산국 함대를 환영한다는 이유로 베네치아에서 나흘 내내 축제를 열었는데, 함대가 떠나고 나서도 축제가 계속될 것 같았다.
베네치아에 대사와 예조 관리 몇 명을 남겨두고, 구르카 용병 열 명에게 대사관 경비를 맡겼다. 베네치아의 높은 물가 수준에 맞게 급료도 인상시켜주었다.
내리는 자들을 대신해서 함대에 동승한 자들도 있었다. 고산국에 대사관을 개설할 베네치아 외교관과 상인들, 그리고 대사관을 경비할 스위스 용병들이 수송선에 탑승했다. 주 고산국 베네치아 대사관의 근무 인원 교대는 정기 연락선을 통해서 해주기로 약속했다.
베네치아에서 출항한 함대는 이틀 만에 아테네를 지나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 바로 앞 교크체아다 섬에 도착했다. 해병들이 상륙해 부두에서 붙잡아온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오들오들 떨어서 불쌍해 보였다.
“위에서 고산국 함대를 상대로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졸병인 너희들은 모르겠지?”
“압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해협 안쪽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킬리트바히르 요새 말고도 산등성이에 대포 수십 문과 예니체리 부대가 배치됐습니다. 그 전에 북아프리카 사략선 수백 척이 이미 해협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고산국 함대에 대비한 전쟁 준비입니다.”
오스만 병사들이 저마다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정보를 불었다. 제대로 모르는 정보까지 아는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해적을 퇴치하려는 고산국의 의도를 알고 있는 오스만 제국은 결국 전쟁에 대비했다. 예조 판서가 오스만 대신들을 강하게 압박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불과했다.
“해협에 진입하라고 함대 기함에 연락해.”
“전하! 이미 날이 늦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입항하려면 오전에 출발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쟁을 하자고 가는 게 아니라서 상관없다.”
함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현재 고산국과 오스만 제국은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우호관계였다. 오스만 제국이 고산국과 협상도 안 해보고 다짜고짜 함대를 공격할 나라도 아니었다. 일단 오스만 제국이 고산국을 향해 대화 창구를 열어둔 것으로 믿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명령이 전달되자 함대가 2열종대로 해협에 들어섰다. 폭이 좁고 긴 다르다넬스 해협의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였다. 입구 근처 소아시아 바닷가에 트로이가 있다는데 이민호는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해협 반대쪽에서 나오던 배들이 함대를 발견하고 황급히 해안으로 피했다. 그리고 오스만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도망쳤다. 이쪽이 고산국 함대임을 분명히 알아보고,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우리가 적이 된 것을 오스만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아.”
“킬리트바히르 성이 포착됐습니다, 전하.”
킬리트바히르 요새는 메흐메트 2세 재위 때인 1463년에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가장 좁은 지역의 바닷가 비탈에 쌓은 하얀 석성이었다. 중심에 삼각형으로 자른 케이크처럼 생긴 본성이, 그 바깥에 세 잎 클로버처럼 생긴 높은 성곽이, 가장 바깥에 포루를 이은 보통의 성벽이 세워진 밀도 높은 요새였다.
킬리트바히르 요새는 해협 건너편 차나칼레 요새와 함께 폭 1km 남짓한 해협을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였다. 보이는 것만으로도 성벽이 무척 두껍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조 판서가 보고한 대로 본성의 성벽 두께가 5미터가 넘습니다.”
“재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5인치 함포에 안 무너지겠군.”
옛날에 대포의 사거리가 짧았을 때 바닷가에 바짝 붙여 지은 성이라지만, 대포 사거리가 늘어나고도 산 쪽으로 요새를 옮기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시대 어떤 대포를 쏴도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양함의 함포로 쏴서 요새의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병력을 상륙시켜 직접 공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갈리폴리 반도, 터키어로 겔리볼루 반도의 지형이 문제가 됐다.
“전하! 상륙하기에는 최악의 지형입니다.”
“여기서 상륙을 해? 아군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는 작전이겠지. 무기의 성능 차이는 승패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어.”
일차대전 당시 영국군과 호주군, 뉴질랜드군 30만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패한 갈리폴리 전투가 이곳과 남쪽 해안 일대에서 벌어졌다. 병사들이 해안의 좁은 지역에서 산등성이를 힘겹게 오르는 도중 높은 곳에서 총격을 퍼붓는 터키군에 의해 연합군 병사들이 정말 무의미하게 속절없이 죽어갔다. 호주 영화 <갈리폴리>에서는 참호를 나선 다음 5야드 이상 전진한 병사가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됐다.
“적의 포격입니다! 아! 우리 함대를 환영하는 예포입니다.”
- 퍼엉!
킬리트바히르 요새 정상에서 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발사된 대포는 딱 한 문뿐이었다. 뒤쪽 산에 배치된 대포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아시아 쪽 해협 연안 도시인 차나칼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력은 평소보다 많이 배치돼 있되, 공격은 하지 않았다.
“킬리트바히르 요새에 정박한다.”
오스만에서 자제한다면 이쪽도 충분히 조심해줄 필요가 있었다. 함대 모든 함선에 하달한 사격 금지명령은 아직 유효했다.
킬리트바히르 요새 북쪽에 항구가 있었다. 요새와 산기슭에 배치된 대포가 함대를 노리는 가운데 함선들이 차례로 부두에 접근했다. 그러나 항구 접안 시설이 부족해 일부 함선들은 건너편 차나칼레 항에 정박했다.
“오스만 제국을 방문하신 고산국 국왕폐하를 환영합니다.”
“노고가 많으시오, 장군.”
킬리트바히르 요새가 아니라, 그 위쪽 산에서 내려온 예니체리 사령관이 국왕좌승함에 와서 인사를 올렸다. 이민호는 민영이 말리는데도 배에서 내려 사령관 일행을 만났다.
사령관을 따라온 호위병들을 향해 여진족 호위들이 강렬한 기세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요새와 산등성이에 배치된 대포가 실체적인 위협이었다. 총함장 이순신이 오스만 대포의 위치를 파악하고 함대의 모든 함포마다 목표를 배정해 놓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해협을 단단히 방비한다면 황제폐하께서 편안히 지내실 것 같소.”
“사실은 고산국 국왕폐하 덕택에 강화된 셈입니다.”
“내가 함대를 좀 많이 데려왔다고 설마 제국에서 긴장한 것이오?”
“고산국은 우방국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스만의 모든 해군에게 충성 서약을 받느라 북아프리카 사략선들이 제도에 몰려와서 방어태세가 상향된 것입니다.”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상대방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려고 노력했다. 예니체리 사령관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임시 방어 진지로 돌아갔다.
이민호도 안전한 국왕좌승함에 다시 탑승했다. 킬리트바히르 요새가 대포에 무너지지 않듯이, 순양함도 오스만 제국이 보유한 대포에 관통되지 않았다.
함대가 지중해 바다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지만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나오는 배를 붙잡고 선원들에게 제국의 사정을 캐묻기도 하고 들르는 항구마다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정보는 고산국 탐사선에게서 나왔다. 며칠 전 함대가 크레타에서 베네치아로 향할 때, 돛을 달아 상선으로 위장한 탐사선이 이스탄불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야 함대에 합류했다.
“갤리어스가 70척에 갈레온이 100척? 사략선이 500척이라는 것도 예상보다 많군.”
“그렇습니다, 전하. 함선이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의 패배를 교훈으로 받아들였는지 현재의 오스만 해군은 구경이 큰 대포를 충실히 갖췄습니다.”
탐사선 선장은 이번 작전을 위해 몇 달 전부터 턱수염을 길렀다. 거무스름한 피부색에 터번까지 쓰니 완전히 터키인과 다름없었다. 선장은 위험하고도 중요한 정찰을 하면서도 이스탄불 상인들에게 후추와 계피를 팔아 황금 여러 상자를 만들어왔다.
“반드시 싸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좀 부담 가는군. 이스탄불 사정은 어떤가?”
“헝가리에 교대 병력으로 파병될 예정이었던 예니체리 부대 몇 개가 이스탄불 방어로 전용됐다고 합니다. 항구뿐만 아니라 시내에도 병사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특히 황궁 주변은 요새나 다름없이 변했습니다.”
“우릴 뜨겁게 환영할 준비가 된 모양이군. 협상이 깨지는 즉시 전쟁에 돌입하게 될 것 같아.”
이민호는 협상이 깨지더라도 오스만과 전쟁을 할 의향이 없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달리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강력하다고 소문 난 고산국 함대가 비좁은 다르다넬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에 스스로 갇힌 기회를 놓치는 것은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무척 아까운 일이었다.
“오스만이 쓸데없는 호기를, 헙!”
그러나 지금까지 이민호가 염려하던 일은 항상 실제로 일어났다. 이번에도 말이 씨가 될 것 같아 얼른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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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