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43화 (492/1,000)

00543  56. 지중해 원정  =========================================================================

“그것 참 대단하군. 나는 고산국 국왕이다. 왕립음악당에 둘 시계 오르간을 하나 주문하고 싶은데 자네가 만들어주겠나?”

“저로서도 무척 기쁜 일입니다만, 고산국에 가기에는 너무 멀지 않겠습니까?”

토마스 달람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일 년 넘게 걸렸다. 범선을 타고 적국인 에스파냐 군함들이 지키는 지브롤터 해협을 몰래 지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을 것이다.

지중해에 널린 섬들과 이탈리아 반도 남쪽은 에스파냐 영토이거나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교황령이었고,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해군을 빙자한 해적들의 본거지였다. 여기까지 살아서 온 것만으로도 선장과 선원들을 칭찬해줄 만했다.

“이번 일을 마치고 크레타에 가서 기다려라. 매달 고산국 연락선이 입항할 테니 그걸 타고 오면 된다. 작업을 마치면 잉글랜드에 돌려보내주겠다. 범선을 타는 것보다는 훨씬 빠를 것이다. 선금을 받게.”

베네치아 금화가 가득 찬 상자를 하나 보냈는데도 토마스 달람이 별로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제작비가 걱정되는지 오히려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에 금화 한 상자를 더 보냈다. 딱히 다른 기계 장치로 변환하지 않더라도 토마스 달람이 킹스 칼리지 등에 만들어준 오르간은 진짜 예술품이었다.

항해하는데 애를 먹고 있던 잉글랜드 배를 수송선에 연결해 예인시켰다. 그리고 함대는 다시 이스탄불로 향했다.

“주인님은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지 않으셨나요?”

“잉글랜드와 공식적으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에밀리아가 묻자 이민호가 잠시 생각해본 다음에 대답했다. 지중해에서 잉글랜드 해적선 몇 척을 쳐부순 것 말고는 잉글랜드와 싸운 적이 없었다. 포츠머스 앞바다와 템스 강 하구에서는 잉글랜드 함대와 잠깐 대치만 했다.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전쟁 중인 아일랜드는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엉뚱하게 스코틀랜드하고는 에든버러에서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싸울 의향은 있으셨군요.”

“안타깝게도 잉글랜드가 의외로 몹시 신중해서 말이야.”

유럽에 오면 잉글랜드하고 충돌이 잦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정반대였다. 잉글랜드는 고산국 함대와 의도적으로 충돌을 피했고, 포츠머스 앞바다에서도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다. 심지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는 고산국으로 이민할 자들이 수용된 숙소의 경비를 잉글랜드에게 맡기기도 했다.

네덜란드도 인도양에서는 포르투갈과 싸움을 좀 벌였으나, 아시아에서는 의외로 고분고분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대비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해군 전력을 증강했던 이민호만 허탈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상선을 만나고 나서 함대는 한 시간 넘게 계속해서 달렸다. 멀리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여러 줄기를 발견한 순간 예니체리 장군이 털썩 주저앉았다.

“제도가 불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불타버렸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서 확인하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이민호는 함대의 속도를 높이라고 지시했다. 오랜만에 바이오 디젤을 연료로 사용하는 기관 2기까지 최고 속도로 작동했다.

황궁에도 수비 병력이 있을 테니 해적의 공격을 하루나 이틀 정도는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한때 철옹성으로 불린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지금도 갖고 있었다.

“사라센 해적선들이 몰려나옵니다!”

탐사선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함장이 이민호에게 북동쪽 방향을 가리켰다. 서쪽으로 이동하는 배 30척은 작년에 베네치아 시녀들이 탄 배를 공격했던 것과 같은 갤리선과 갤리어스들이었다. 베네치아 해군이 기동력을 제공하는 갤리선과 대포를 쏘는 갤리어스 한 쌍으로 조합해서 움직이는 것을 이 시기 일부 사라센 해적들이 따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산국 함대 51척을 상대로 사략선 30척이 공격하러 나온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보고가 맞는다면 이스탄불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략선이 있어야 했다. 일대일 비율로 싸워서는 절대 고산국 함대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 텐데도 이렇게 적게 보낼 리가 없었다.

시간이 가면서 다시 확인하니 그 배들이 고산국 함대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사략선들은 적대적인 기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고산국 함대를 피해 도망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폐하! 저 도적놈들을 잡아주십시오!”

“장군! 저들은 법적으로 오스만 해군이 아니오?”

“도적놈들이 싣고 가는 것은 황궁의 보물이 틀림없습니다. 잡아주십시오! 잘못 되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예니체리 사령관이 말한 것처럼 북아프리카 사략선들은 이미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아니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약탈을 마친 다음 보물을 배에 가득 싣고 도망치려는 해적일 뿐이었다.

이스탄불이 걱정되긴 했으나 일단 순양함들을 동원해 해적선을 모두 나포했다. 나포 과정에서 해적선 한 척이 침몰했다. 5인치 함포로 위협사격을 한다는 것이 조작 실수로 그만 배에 명중해버린 탓이었다.

덕택에 나머지 해적선들은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갤리선에서 노를 젓던 노예들이 평상시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침몰 중에 한 명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갤리선을 격침시키면 노예 수십 명이 한꺼번에 물에 잠긴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갤리선 16척, 갤리어스 13척을 나포했습니다. 격침된 것은 안타깝게도 갤리선이었습니다.”

“잊어버리게. 갤리어스가 함수 회전 포탑에서 대포를 쏜다고 생각했는데, 저 길쭉한 갤리선에도 대포가 있네?”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청동대포입니다. 자칫 전복될 위험이 있습니다.”

갤리선에 탑재된 대포는 포신이 무지막지하게 컸으나 구경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물론 동 시대 유럽 대포보다 확실히 컸고, 수십 킬로그램의 철제 포탄을 날릴 수 있었다. 화약도 무지무지하게 들어갈 것 같았다.

일부 사략선 외에 대부분 오스만의 해군 함선들은 여전히 갤리선에 커다란 대포를 탑재하고 다녔다. 그런데 오스만 갤리선은 길고 재질이 약하며, 대포는 너무 크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1516년 홍해에서 포르투갈 배들과 해전을 벌일 때 거대한 대포를 딱 한 방 쏜 다음 갤리선이 뒤집혀서 배 바닥을 구경시켜준 적이 있었다.

“작은 청동 대포도 있습니다. 수입품이나 전리품으로 파악됩니다.”

“철제 대포는 없겠지?”

“철제 대포가 있더라도 워낙 소수라서 큰 의미는 없습니다.”

함장에게 보고를 받고 이민호는 조금 안심했다. 유럽에서 철제 대포를 조금 만들어서 사용하긴 했으나 아직 대부분의 대포는 구리를 주 소재로 만든 청동대포였다. 오스만에는 구리광산이 있어서 그 비싼 구리를 마음껏 녹여서 커다란 대포를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좁은 갤리선에도 큰 구리 대포를 싣는 것이었다.

철제 대포가 청동대포에 비해 제작비가 훨씬 적게 들고 정확도와 내구성이 높았다. 그러나 철제 대포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아직은 대량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대포의 발전은 철제 대포를 발사해도 깨지지 않을 시점부터였다.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18세기 정도 돼야 철제 대포의 대량 주조가 가능했으나, 그때도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거대한 청동대포를 사용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도 주로 황동대포를 제작했다. 충무공 장계에 쇠가 부족하다는 말은 구리를 지칭했다. 조선에서 제작한 철제 대포 유물로는 1871년 이양선으로부터 군산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된 오식도 화포가 있었다.

해적선으로 넘어간 해병들이 저항을 포기한 해적들을 생포하고 해적선을 수색했다. 갤리선 아래 갑판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이 풀어달라고 울면서 소리를 질렀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대신 조리병들이 묽은 죽을 끓여 노예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동안 수병들이 나포한 해적선을 순양함에 연결했다.

잠시 후 해병들이 해적선과 연결된 널빤지를 통해 천으로 포장된 것들을 실어 옮겼다. 일부는 함미에 위치한 기중기를 통해 옮기는 것이 꽤나 무거운 것이 많았다. 작고 반짝이는 것은 처음 몇 명이 실어 옮긴 상자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포로를 지킬 몇 명만 해적선에 배치하고 전리품 수송 작업은 그쳐라. 바로 출발하겠다.”

함대가 다시 이스탄불로 향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전리품들을 확인했다. 오스만 제국의 황성에 있기에는 약간 어색한 것들이 많았다.

“이슬람 문화에 어울리지 않게 웬 조각품이 이렇게 많지?”

“유럽 각국에서 황제에게 보낸 헌상품인 것 같습니다.”

조각품과 그림 외에도 초승달이 그려진 접시, 거대한 샹들리에, 주전자 같은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심지어 벽화를 뜯어낸 돌조각들을 상자에 담아놓기도 했다. 명나라에서 만든 도자기가 특히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맙소사! 황제가 계시는 제3 중정의 보물들입니다.”

물건들이 모두 황궁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서 약탈한 물건이라서, 장군이 부들부들 떨었다. 같은 제3 중정에 위치한 하렘의 여자들도 피해를 입었을 거라고 장군이 탄식했다.

이것들은 모두 황제가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이 보물들이 해적들과의 교전 과정에서 얻은 정당한 전리품이라는 사실을 직접 목격했기에 제국에 반환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다.

“장군! 황실의 물건이라면 모두 돌려주겠소.”

“아아! 고맙습니다. 원래는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하는 겁니다. 대신 보상금을 받도록 재상께 진언하겠습니다.”

예니체리 장군이 몹시 기뻐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신생국의 한계 때문에 오래된 예술품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래서 예술품을 가져가는 게 더 좋겠지만, 오스만 황실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라서 이민호가 흔쾌히 양보해줬다.

이스탄불에 접근할수록 하늘로 높이 치솟는 검은 연기가 점점 굵어졌다. 함대가 계속해서 달리자 정오쯤 드디어 수평선상에 이스탄불 언덕들이 나타났다.

“제도가 너무 바다 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이 문제야. 심지어 바닷가에 황궁의 정원이 있다니, 오스만 제국은 이 얼마나 오만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메흐메드 2세가 수도를 이곳으로 옮길 때에는 바다를 지킬 자신이 있었을 거여요.”

“그때야 그랬겠지만, 상황은 항상 변하는 법이다.”

보스포루스 해협 남쪽 출구의 서쪽, 즉 유럽 방향 영토의 바닷가 언덕에 황제의 궁전이 위치했다. 바다에서 톱카프 궁전 본관 성벽까지, 가까운 곳은 20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에밀리아가 말한 것처럼 이곳에 황궁을 둔 자들은 황궁의 성벽을 최전선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적의 공격을 바다로 예상한다면 흑해 방면은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에서 가로막고 지중해로부터의 공격은 다르다넬스 해협 양안의 요새에서 막아낼 수 있었다. 지상으로부터의 공격도 좁은 지형을 이용해 쉽사리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르다넬스 해협이 뚫리거나 소아시아 방면에서 배를 타고 마르마라 해를 건너온다면 이곳 황궁이 당장 최전선으로 변했다. 해적이나 적 해군이 공격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라는 뜻이었다.

특히 대포를 가진 함대에게 황궁이 목표로 노출될 수 있어 극히 취약했다. 이민호는 바닷가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절벽에 건설된 왜성들을 깨면서 일본 해안선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게다가 육지 쪽은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갖추고 있었으나 바다 쪽은 야트막한 성벽 한 줄밖에 없었다. 사라센 해적들이 욕심내기 딱 좋았다. 원래는 하얀 건물들이 화재로 인해 시커멓게 변색돼 있었다.

다만 황궁 바로 남쪽, 모스크로 개조된 하기야 소피아는 들어가 봐야 약탈할 것이라곤 융단과 쿠란밖에 없어서 비교적 멀쩡했다. 북아프리카 해적들 중 다수가 원래 동유럽 기독교도였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다음에도 신앙심이라곤 쥐뿔도 없었다.

“해안에 배가 잔뜩 몰려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불타거나 부서졌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웠나?”

이스탄불의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연기 대부분은 불타는 함선들에서 치솟고 있었다. 함교에서 보이는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은 600여 척이나 되는 갤리선과 갤리어스, 갈레온으로 뒤덮여 있었다.

갤리선과 갤리어스 일부와 갈레온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 정규 해군의 것이었다. 상식적으로는 해군이 해적과 싸우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해군 일부가 반란에 참가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었다.

- 콰앙~

- 텅!

예니체리 장군의 깃발을 선두 탐사선에 달고 함대가 접근하는데도 해안에 정박된 갤리선 몇 척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커다란 쇳덩이가 함대를 향해 날아와, 몇 발이 순양함에 명중했으나 함교에 정통으로 맞아도 끄떡없었다.

“목표는 갤리선이다. 갤리선을 피아 가리지 말고 격파해!”

- 쿠쿠쿵!

갤리선 일부가 초승달이 그려진 붉은 깃발을 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피아 구분이 됐다고 보기 어려웠다. 몇몇 오스만 해군 깃발을 단 갤리선에서도 분명히 고산국 함대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함대에서 열 배나 많은 갤리선들을 공격하는 동안 이민호는 예니체리 장군과 함께 함교 위쪽 관측실로 이동했다. 잠시 살펴본 결과, 이스탄불 도시 전체를 통틀어서 명백히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황궁과 그 주변 일부에 국한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인구 60만의 대도시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한다면 이민호는 황제를 도울 생각을 접고 당장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어느 쪽이 아군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예니체리 장군에게 해안에 접한 황궁의 성벽 앞에 내려주기로 했다. 이미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아 성벽 일부가 무너져서 황궁으로 진입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함포로 해결하면 된다.

“장군! 황제는 살아있을 것 같소?”

============================ 작품 후기 ============================

늦게라도 올립니다.

많이 복잡한 상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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