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51 56. 지중해 원정 =========================================================================
출발 전 날 트리폴리 총독이 눈치를 살피며 어린 여자아이 대여섯 명을 데리고 항구에 나타났다. 지하수를 찾아서 마음껏 쓰게 해준 다음부터 총독은 이민호가 예언자나 되는 것처럼 몹시 어렵게 대했다. 급기야 딸인지 손녀인지를 이민호에게 잔뜩 안겨주려고 온 것이었다.
물론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마지막 예언자였으니 이민호가 알라의 예언자일 리는 없었다. 모세가 메카 근처에서 지팡이를 내리쳐 샘물이 솟아나게 한 이야기와 자꾸 연결시키는 총독에게 이민호는 몹시 짜증났다. 잘못하면 이슬람에서 이단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총독이 심호흡을 하더니 손녀인지 딸인지 모를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당당하게 국왕좌승함으로 다가왔다.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단단한 바위를 뚫고 지하 깊은 곳에서 샘물을 뽑아내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에게 딸을 바치는 것은 가문의 번영을 약속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총독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 항구에 있던 계복이 통역에게 뭐라고 말하자 총독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갔다. 눈이 큼직해서 꽤나 귀여운 여자애들이 잔뜩 겁을 먹고 뛰어가는 것이 불쌍했다.
“뭐라고 했기에 저렇게 놀래?”
“여자 호위들이 질투심이 강해서 도련님께 여자를 바치면 여자와 그 여자를 바친 자의 목을 다 따버린다고 겁을 줬습니다.”
“뭐, 잘했다.”
한둘쯤은 왕립여학교에서 키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지중해 지역에서는 베네치아 시녀들 외에 더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상업국가 베네치아에서도 언어 교육에 주력해서 아랍어나 투르크어를 구사하는 시녀들이 네 명이나 됐다.
그런데 이번 일이 소문을 잘못 탔다. 다음에 지중해에 다시 왔을 때는 들르는 곳마다 남자아이를 바쳤다.
트리폴리 북서쪽 튀니스에서는 별 일 없이 해적들이 해산했다. 저항할 만한 해적들은 이미 서쪽으로 도주한 탓이었다.
노예시장에서 기독교도 노예 3천 명을 사고 추가로 갤리선 노예 5천 명을 사서 풀어주었다. 갤리선 노잡이를 풀어주면 당분간 갤리선이 기동하지 못한다는 효과도 있었다. 이제 북아프리카에서는 노잡이 노예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노예상인들이 오랜만에 큰돈을 벌어서 좋긴 하지만, 이제 장사를 접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황에 빠졌다. 오스만 관리들이 이민호의 심기를 건들까 두려워 노예 가격을 통제해서 지난번과 가격 차이가 없었다.
“돈 후안 아니십니까?”
“하하! 알아봐주시니 영광입니다, 페하!”
“자꾸 봐서 정 들겠소.”
어떻게 알았는지 구호기사단 배들이 와서 고향에 가겠다는 기독교도 해방노예 3천 명을 태웠다. 몰타의 배들이 튀니스에 들어왔는데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몰타의 수석기사 돈 후안이 사양했으나 억지로 금화 상자 몇 개를 맡겼다. 해방노예들이 고향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할 자금이었다.
“지난번 폐하께서 해방시켜주신 기독교도들은 일단 로마로 보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지역별로 나눠 구호 중입니다. 각 지역 주교들이 보낸 사람들이 해방노예들을 인솔해가기로 했습니다.”
“잘하고 계시는군요. 저번에 말했듯이 신교도 해방노예도 똑같이 대우해주시오.”
“폐하의 특별 요청이라면 교황청에서도 당연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신교도 해방노예들도 차별 없이 그 지역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하지만, 고향에 가는 길에 어느 정도 핍박을 당할 것 같았다. 그래도 최소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슬람 지역으로 잡혀가 노예로 팔려갈 뻔하거나 갤리선에서 노를 젓던 사람들이 수만 명 단위로 무사히 귀환하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고산국과 몰타 기사단이 좋은 평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가 훨씬 강화될 것이다.
“교황 특사가 감사인사를 전하려고 폐하를 찾아올 것 같습니다.”
“정해진 근거지가 없어서 만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소.”
해방 노예들을 태운 구호기사단 배들이 동쪽 몰타 섬이 아니라 바로 북쪽 로마를 향했다. 구호기사단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함대가 수시로 로마까지 왕복할 뻔했다.
북미로 가겠다는 노예 5천 명은 씻고 입히고 먹이고 치료로 이어지는 정형화된 구호 방식을 거쳐 수송선에 태웠다. 이제 함대 수송선에는 상품과 물자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북미 이주민이 3만 6천 명. 그 중에 성인 남자가 2만이 넘어. 세곡을 밀로 천 석씩만 받아도 자그마치!”
“주인님! 입 찢어져요.”
이민호가 하루 종일 싱글거리자 에밀리아와 네리사도 방긋 웃었다. 북미에 경작지는 얼마든지 있었고 다만 모자라는 것은 일손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이민호였다.
함대에서 남는 식량을 약간 풀었다. 튀니스 주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밀가루로 만든 고급 빵과 와인을 실컷 먹을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말린 물고기를 함대에 바쳤다.
튀니스에서 하루 쉬고 알제르에 갔더니 알제르 총독 무스타파 2세 파샤가 배를 타고 멀리까지 마중 나왔다. 거리도 있어 처음에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갤리선에서 노를 저어 국왕좌승함에 힘겹게 따라붙기에 함대 속도를 늦추고 인사를 나눴다.
“지난번 그 제독처럼 총독도 친절하시군요. 고맙소.”
“하하! 호의를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폴란드 노예들의 몸은 잘 즐기셨는지요?”
“우크라이나 궁녀요? 일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알제르 총독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것은 알제르의 경제구조와 연관돼 있었다. 알제르는 오스만 제국이 에스파냐 본토를 직접 공략할 때 거점이 된 것 외에는 오직 노예무역만이 돈줄이었다.
알제르는 하이레딘 바르바로사가 병사 2천 명이 지키는 요새를 건설하면서 시작된 군사도시였다. 최전방 요새도시라는 인상이 강해 외국과 평화로운 무역을 하기도 어려웠다. 서쪽은 에스파냐가 지키는 오랑, 바다 건너 북서쪽은 에스파냐 본토였다. 마요르카 섬이든 발렌시아든 줄기차게 노예를 납치해서 파는 것밖에 육성할 산업이 없었다.
해적들에게 붙잡혀 알제르에서 노예로 팔리는 자들은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각지에서 붙잡혀왔다. 에스파냐 함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가로막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2만 명이 강제로 끌려와 알제르에서 노예로 팔려 나갔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독립 직후 30년 동안 700명이 잡혀갔다. 북아프리카 노예무역은 1830년대에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면서 끝났다.
알제르 총독 무스타파 2세 파샤가 이민호에게 아부하는 이유가 있었다. 작년에 노예 매입 대금으로 고산국 함대가 지불한 향신료를 알제르 주변 도시에 팔아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총독은 그 동안 고산국 함대가 다시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이스탄불에 갖다 온 사이에 제독이 교역을 잘해주었지만, 총독이 있었다면 황금을 쏟아 부어 더 많은 향신료를 구입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북아프리카 해적들을 모두 해산한다는 황제의 조칙을 담은 공문은 이미 접수했다. 그러나 처음에 총독은 이 지역의 특수성을 모르는 비현실적인 명령이라고 여겼다.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거의 독립적이라서 총독이나, 심지어 이스탄불 황제의 명령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에 유럽인들이 몰려와 함대를 결성하고, 유럽에 가서 기독교도를 잡아다가 알제르 등에서 노예로 파는 경제구조는 누가 뭐라 해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 거대한 노예무역 시장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고, 북아프리카 총독들도 그 시장에서 전리품을 얻어먹을 뿐이었다. 명목상 총독이 해적들을 보호해준다고 하지만, 실은 에스파냐 등의 침공으로부터 해적의 보호를 받은 셈이었다.
결국 가해자인 해적도 유럽인, 피해자인 노예도 유럽인들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물론 유럽 국가들도 대규모 집단이 된 북아프리카 해적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산국 함대는 힘으로써 황제의 비현실적인 명령을 현실화해나갔다. 트리폴리에 해적선이 500척 넘게 있었고, 이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참가한 신성동맹과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을 합한 규모보다 컸다. 대포와 머스킷은 30년 전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해적들은 고산국 함대가 무서워 해전을 포기하고 지상전을 택했다. 그것도 단 몇 분 만에 박살났다. 전투를 직접 보고 알제르로 달려온 자들은 고산국의 왕이 마법을 부린 게 틀림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고산국 국왕은 모스크 바로 옆에 지휘부를 차려놓고 이맘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전투는 부하에게 맡겼다고 한다. 충실한 신의 노예인 이맘들이 용감하게 고산국 국왕에게 접근해 조사했으나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선물을 바친 지 벌써 여섯 달이나 지났습니다. 여섯 달에 열두 명이라면 지금 딱 질리실 때가 되셨지요? 그래서 선물을 또 준비해드렸습니다. 하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알제르에 올 때마다 여자 선물만 줄기차게 받는 것 같았다. 왕이나 귀족, 유력자의 딸이라면 고민하겠지만 일반적인 노예라면 받고 나서 해방시켜주면 될 테니 일단 받기로 했다.
“주시면 고맙게 받겠소이다. 그런데 해적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항구에 도착해서 총독과 관리들로부터 정식으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기대했던 사라센 해적선이 한 척도 없었다.
갤리선 몇 십 척이 항구에 메여있긴 했다. 그러나 사람이 없었고, 범선도 항구에 거의 없었다.
“국왕폐하의 위엄에 놀라 당연히 도망쳤지요. 사략선들이 갤리선 노잡이까지 다 팔고 범선을 구입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이스탄불로 도망간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트리폴리나 튀니스에 함대가 정박하더라도 순양함 몇 척은 항상 지중해에 떠 있었다. 해협 몇 군데를 순양함으로 틀어막고 있으면 해적선들이 동쪽으로 도주할 수가 없었다.
“갤리선을 범선으로 바꿔 타고 지브롤터를 지나 대서양을 건너 새원산으로 간답니다. 해적으로 이름이 등록되지 않고 일반 유럽인 이민자로 위장하면 농민이 되기 유리하다나요? 하하하!”
“이런!”
튀니스에서 도주한 해적선들을 포함해 수백 척이 알제르에 몰려있을 줄 알고 두근두근했는데 김이 팍 새는 소리를 들었다. 급히 대서양으로 배를 보내 해적들을 붙잡아 탄광이나 철광 노무자로 보내버릴까 하다가 관뒀다. 그 정도 머리를 쓴다면 고산국의 대농장 경영도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적이 사라지면 당장 알제르의 방어가 어렵게 되지 않겠소?”
“에스파냐에서도 북아프리카를 공격하지 못한다면 큰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알제르는 경제적으로 몰락할 일만 남았지요.”
아무리 임기제 총독이라지만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사실 지금 총독은 이민호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부하고 선물을 바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여기 덴마크 처녀들 어떻습니까? 피부가 눈처럼 하얗습니다. 추운 지방의 짐승 털색이 하얗듯이 사람 피부도 하얗다고 합니다.”
“뭐. 하얗군요.”
비교해보면 아이슬란드 여자들이 확실히 가장 흰 피부였다. 그런데 이민호에게 선물로 바쳐진 여자들 20여 명 중에서 하나가 여러 가지 언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날 건들지 마! 죽여 버릴 거야!”
스무 살 정도 되는 젊은 여자가 날카로운 돌을 들고 난동을 부렸다. 여차하면 자살하겠다고 돌을 자기 목 밑에 들이대기도 했다.
“폐하! 이런 앙칼진 애들은 채찍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바늘이 달린 채찍을 휘둘러 하얀 피부에서 빨간 피가 맺혀 흐르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불끈, 앗! 실례했습니다. 애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선물이라면 고맙게 받겠소. 네리사! 독일어 통역을 불러서 이 여자들을 덴마크에 가는 길에 내려다준다고 해. 데려가서 뭐 좀 먹여.”
새로 독일어 통역으로 원정에 참가한 프랑스인이 덴마크 여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여자들이 일어나서 네리사를 따라가는 것을 보면 말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말을 듣지는 않았다.
“저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프레데리크 2세의 딸이에요! 왕실의 가족에 대한 예우를 해주세요!”
“네네. 얼른 일행을 따라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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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