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0 57. 지중해 순회 =========================================================================
“이집트나 팔레스타인, 에스파냐 남부 지방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지 않소? 인도에서 설탕을 사도 될 테고. 고산국에서 에스파냐로 수출한 물량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소.”
“폐하! 사탕수수가 더운 지역에서 잘 자라는데 물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막에서 물은 매우 비쌉니다. 관개시설을 만들더라도 사탕수수밭으로 가는 물의 대부분이 중간에 증발해버립니다.”
“듣고 보니 건조지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어렵겠소. 자금이 많이 들겠구려.”
“그리고 요즘 에스파냐에서 설탕을 다른 나라에 수출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에스파냐 귀족들 사이에서 다 소비됐을 것입니다.”
“조리장!”
이민호가 소리를 지르자 국왕좌승함에서 임시로 조리장을 맡은 궁중요리사가 급히 달려왔다. 이민호는 당장 함대 내의 설탕 재고량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순양함이나 수송선에 승조원과 이민자에게 보급할 양은 충분히 있었지만 일단 제쳐두었다. 순양함보다 국왕좌승함에 특별히 설탕 재고가 많았으나 이것까지 팔 필요는 없었다. 식량 수송선에 설탕이 100가마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군량 수송선에 가서 설탕 50가마를 반출해서 시장에 팔게. 아! 가마로 가져가지 말고 작은 자루에 옮겨 담아서 팔게나.”
어용상인이 나갔다가 한 시간 만에 돌아왔다. 수송선에서 넘겨준 설탕을 수레 세 대에 싣고 나가서 금화를 5킬로그램 넘게 가져왔다.
이것이 지중해에서 설탕의 현 시세였다. 설탕 20킬로그램 한 자루에 현대 한국 돈으로 5백만 원 정도였으니 현대 시세의 100배 이상이었다.
“설탕 1파운드 무게 가격이 잉글랜드 기준으로 겨우 1, 2실링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보면 금이나 은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었다. 그러나 실링을 현대 기준으로 가치를 파악한 것이 이민호의 잘못이었다.
2실링이라면 잉글랜드 화폐 1파운드의 10분의 1이며, 은 1파운드의 30분의 1이었다. 설탕 30파운드가 은 1파운드, 12냥이었고 유럽의 일반적인 금과 은 교환비율로 금 한 냥이었다. 15킬로그램이 안 되는 설탕 한 포대가 백미 24섬이라는 계산이었다.
“전하! 시칠리아 상인들이 이렇게 곱고 흰 설탕을 처음 봤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격은 누런 설탕과 똑같이 쳐줬습니다. 귀족들이 흰 설탕을 선호하면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아싸! 유럽 교역 상품 목록에 설탕을 추가하게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헌데 수에즈 운하가 개통됐으니 조만간 가격이 폭락하지 않겠습니까?”
“가격이야 내리겠지. 하지만 수요가 그 이상으로 빠르게 늘면 가격하락 폭이 크지는 않을 거야.”
현재 유럽을 통틀어도 귀족들의 수가 적어 설탕 수요에는 한계가 있었다. 설탕은 지나치게 비싼 사치품으로서 가격이 너무 높아 시민들이 쉽게 살 수 없었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시녀를 시키지 않고 귀족 부인이 직접 차에 설탕을 타주는 것은, 설탕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었다.
중산층 시민들이 살 수 있어야 수요가 대폭 늘어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시녀들을 동원해서 운송비를 감안해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설탕 가격을 계산하게 했다.
“설탕 가격이 충분히 낮다면 홍차에 타거나 설탕과자 등으로 일인당 일 년에 35킬로그램 이상을 소비할 수 있어요. 5인 가족을 잡고 한 가정에서 일 년에 20킬로그램 아홉 포대가 필요할 거여요. 현재 파운드 당 설탕 가격은 잉글랜드 기준으로 1 실링이에요.”
“그렇다면 적절한 가격과 수요량은?”
현재 남은 기록으로는 1264년에 1파운드 무게 설탕의 가격은 잉글랜드 화폐 기준으로 1, 2실링이었다. 1685년에 파운드당 8페니로 낮아졌으나 이후 수요가 꾸준히 늘면서 가격도 유지된다. 현대 영국의 파운드화와 달리 근세에는 1파운드가 20실링이며, 240페니였다.
“20킬로그램 한 포대에 현재 가격의 절반 이하, 거의 4분의 1인 1파운드로 가격을 책정할 경우를 계산해봤어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제외한 전 유럽에서 귀족, 관료, 상공인과 일부 부농들까지 포함해 천만 포대 이상을 소비할 수 있어요.”
“백만 가구가 매년 은 3파운드, 36냥을 지불해서 설탕을 살 수 있다니, 놀랍다.”
“에스파냐 탓에 유럽에서 금과 은의 가치가 너무 낮아서 가능해요.”
참고로 20킬로그램 한 포대에 1파운드로 가격을 낮출 경우 에스파냐나 이집트, 팔레스타인의 사탕수수 농장은 거의 망할 거라고 예상했다. 유럽 설탕 시장에서 고산국의 독점상태가 된다. 4분의 1로 내린 가격이라지만 설탕 한 포대에 은으로 4냥이었다.
1493년에 콜럼버스의 2차 항해 때 벌써 사탕수수 모종을 산토도밍고로 가져갔다. 그러나 지금은 신대륙에서 은을 캐느라 바쁜 에스파냐가 카리브 해 연안 섬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지 않을 때였다.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카리브 해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17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농장 경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흑인노예에게 일을 시키면서 아프리카의 황열병이 이 지역에 따라 들어오게 된다.
황열병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백인 농장주들이 죽어나가게 만들고 19세기 초 아이티 독립혁명 당시 프랑스군을 떼죽음 당하게 만든 무서운 병이었다. 그 외에 중노동과 학대로 인해 흑인노예들이 숱하게 죽어갔다. 서 아프리카의 노예 수백 만 명을 갈아 넣어 유럽인이 사용할 설탕을 생산한 셈이었다.
설탕은 처음에 유럽과 서남아시아에서 약재로 처방됐고 중세에는 향신료처럼 식품 보관용 또는 감미료로 사용됐다. 가격이 충분히 내린 근대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보조 식량 역할을 맡았다. 현대 유럽에서 일인당 설탕 소비량은 35킬로그램 정도로서, 밀 소비량의 절반 정도였다.
“일 년에 잉글랜드 화폐 기준으로 천만 파운드라. 은 330만 파운드니까 금 27.5만 파운드, 330만 냥이네.”
이민호가 주판을 튕기며 즐거워했다.
“주인님! 입에서 침 흘려요. 한 포대에 은 4냥, 천만 포대면 은 4천만 냥이니까 12배 교환 비율로 금 333만 냥이 맞아요.”
“좋아! 유럽 귀족과 시민들에게 천국을 보여주지. 가격을 적당히 조정해서 유럽에서 매년 금 333만 냥을 착취하자.”
20킬로그램 천만 포대면 20만 톤이나 되는 양이었다. 고산국 본토에서 생산되는 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적재량 2천 톤짜리 상선 100척이 매년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사탕수수를 대량 재배하려면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많으면서도 물이 풍부한 플로리다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사탕수수를 압착하고 설탕으로 정제할 기계와 보관시설도 대량으로 필요했다. 설탕은 연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컸다.
“플로리다를 사탕수수 농장으로 바꾸려면 몇 년 걸리겠어요.”
“맞아! 당장 일할 사람도 부족하지. 그럼 일단 루손 섬에 맡기자.”
루손 섬 북부에서 생산할 설탕으로 급한 수요를 채우고, 부족한 양은 앞으로 플로리다 늪지대를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해서 생산하기로 했다. 필리핀 북부 바기오에서 할 일이 생겼다.
고산국이 필리핀 북부를 에스파냐로부터 할양받은 이후 어차피 필리핀에서 식량은 남아돌고 있으므로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편이 나았다. 루손 섬 북부 같으면 필요한 식량을 자체 생산하고도 사탕수수를 재배할 여력이 충분히 남았다.
시칠리아 부왕에게 말 백여 마리와 승마교관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알바니아인들을 북미로 데려가겠다니까 부왕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 전에 진주목걸이와 옥 도자기, 비단 등 선물이 부왕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었다.
“알바니아인들은 좋은 백성입니다.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기존 주민들과도 융화하려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폐하의 백성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알바니아인들은 게으르다고 소문난 남유럽의 라틴, 그리스계가 아니었다. 옛날 발칸반도 동남부에 거주하던 트라키아인의 후손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온화한 기후에 살다 보면 사람들이 조금 늘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민호도 조선에 있을 때보다 고산국을 건국한 이후 조금 게을러진 것을 느꼈다.
“저도 교황 성하의 순례 행렬을 호위하기로 했습니다. 시칠리아에서 크레타 섬에 이르는 바다에 사라센 해적선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물론 펠리페 3세 폐하의 윤허가 계셔야 하겠지만, 아마도 윤허하실 줄로 믿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해적이 사라졌으니 당분간은 지중해에 평화가 올 것 같군요. 에스파냐 국왕폐하께는 제가 따로 친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모두가 폐하 덕택입니다. 지중해에 오실 때 자주 들러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 특별히 설탕을 교역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올 때는 여러 가지 상품을 갖고 오겠소.”
시칠리아나 나폴리 왕국은 에스파냐의 속국이었다. 고산국과 딱히 적대적일 필요는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교역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리상 위치가 좋다고 편하게 앉아서 장사하는 꼴은 두고 보기 어려웠다.
이민호는 고산국이나 유구국이 그러는 것처럼 직접 배를 움직여서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나라를 좋게 봤다. 네덜란드를 경계하면서도 좋게 평가하는 이유였다. 포르투갈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말래카라는 항구에 들어앉아 동남아 상인들에게 세금을 뜯을 생각만 하는 포르투갈인들은 한심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후에는 프랑스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 북부와 남부에서 차례로 추방된 유대인들이 알현을 신청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추방된 자들, 또는 고국에서 탈출한 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몰타 섬에 끌려온 무슬림 노예들을 시칠리아에서 매입한 것도 노동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이민호는 인구가 부족한 시칠리아에서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리는 부왕은 외국 자유민들의 이주를 막을 권리가 없었다.
“저희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수천 년 동안 방랑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딜 가든 수가 적어서 주류 인종에게 포그룸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의 불행은 유감이오. 그러나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하는 짓이 미워서 그런 면도 있을 것이오. 누가 고리대금업자를 좋아하겠소?”
포그룸은 현대 이전의 인종 대상 증오 범죄를 가리켰다. 특히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하는 것을 말한다.
교리에 따라 금융업이나 고리대금업을 영위할 수 없는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을 대신해 유럽과 아랍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금융업을 맡아왔다. 당연히 주류 민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작게는 냉대부터 크게는 학살까지 당했다.
“이 모두가 나라가 없는 탓에 겪는 설움입니다. 저희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이 지금도 가자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연락하고 있겠지만 그곳은 이미 무슬림들의 땅이오. 무슬림이 유대인들을 학대하지 않으니 언제든 돌아가도 될 것 같소.”
이민호가 차갑게 대답하자 유대인 대표들의 낯빛이 변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한 짓을 알고 있는 이민호는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교황 성하께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군사적으로 점령할 계획은 없습니까?”
“없소. 이번 순례는 십자군 전쟁이나 성전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이뤄질 것이오. 만약 유럽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다 해도 그곳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럽인들의 영토가 될 것이오. 지난번 십자군 전쟁 때도 그랬지 않소?”
이민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든지, 지금 사는 곳에 완전히 정착하든지 유대인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민호에게 알현을 신청한 이유가 있었고, 이민호가 미리 예상했던 제안이 나왔다.
“관대하신 고산국 국왕폐하! 혹시 저희들에게 북미의 땅을 조금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북미에서는 종교와 인종을 불문하고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소. 개인적으로 이주를 하겠다면 받아주겠소.”
“감사합니다만, 북미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땅을 나눠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쭙고자 합니다.”
“나라를 분리시킬 의향 따위는 결코 없소.”
“듣기로 유구국에게 땅을 떼어주셨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폐하께 황금을 바칠 테니 땅을 나눠주시길 빕니다.”
웬 상자를 이렇게 많이 들고 왔나 했더니 상자 20개 안에 든 것이 죄다 금괴였다. 유대인 대표는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울 땅이 정해지면 그때 금괴 100상자를 더 바치겠다고 했다.
“유구국은 고산국 개국 초부터 깊은 관계가 있어서 같은 나라나 다름없소. 그래서 일부 영토를 떼어줬으나 세금을 받고 있으니 독립된 영토가 아니라고 볼 수 있소. 그것도 다른 민족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황금 따위야 고산국 왕궁에 얼마든지 있으니 다시 가져가시오.”
“저희들도 유구국 이상으로 폐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더라도 적당한 인원으로 분산 배치시켜서 분리 독립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막고 있소. 북미에는 유대인 국가에 내어줄 땅이 단 한 뼘도 없소.”
“너무하십니다, 폐하.”
“원래 알리야라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오? 아무데서나 유대인 거주지를 돈 주고 살 거라면 반드시 북미로 갈 필요가 없지 않소?”
아직 시오니즘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은 시기였다. 알리야는 기원후 70년대부터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유대인의 소망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민호는 유대인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했으나, 그 위험성도 경계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건국하는 것이 유대인의 소망일지 몰라도 생존을 빌미로 주변 국가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또 다른 인종범죄 행위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세운다면 자칫 유대인의 멸절을 부를 수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영토가 워낙 넓어서 완벽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지 못했다. 지금도 시리아와 레바논 등지는 토후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도 조만간 예니체리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계속해서 이스탄불에서 파견한 총독이 다스려서 평온한 것 같지만 그 지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토후끼리, 혹은 다른 세력들이 서로 싸우는 전란의 시기가 계속됐다.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황제나 고위 관료들을 구워삶더라도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을 건국한다면 제국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를 받기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이상적인 알리야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재건국하고 고산국의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폐하.”
“고산국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주변 민족들을 압박해서 쫓아내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소.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고산국이 도매금으로 넘어가 무슬림을 학대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오. 나는 그런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범죄 행위에 도움을 줄 수도 없소.”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타 민족에 대한 침략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 힘도 없습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다면 이스라엘을 재건국할 꿈도 꾸지 마시오. 다른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기는 싫고,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싶지도 않다면 나라를 만들 자격이 없소. 그리고 나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주변국 사람들을 학대할 나라가 건국되는 것을 돕고 싶지도 않소.”
“폐하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단정하십니까? 마치 미래에서 살다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나신 분 같습니다.”
이민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북미로 이주한다면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유대인들은 낙담해서 돌아갔다.
결국 이스라엘 건국은 물론, 시칠리아 유대인의 북미 이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좋은 말로 금융업, 실제로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고산국에 가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리대금업은 자금 사정이 급한 자에게 불리한 조건의 대출을 해줬다가 모든 재산과 자유까지 빼앗는 약탈적인 대부업이었다. 그래서 농민과 직공들이 충분한 대가를 받고 일하며 상인들도 자금 여유가 넘쳐흐르는 고산국 북미는 고리대금업의 무덤과 같은 곳이었다. 금융업에 안주한 유대인들은 북미로 가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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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담배, 면화는 근세 국제무역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품입니다만, 이 정도로 간단히 넘어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