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61화 (5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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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이집트와 레반트

크레타를 거쳐 이틀 동안 항해한 끝에 함대는 이집트 북서부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도착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도 함대를 발견하고 갤리선 몇 척을 내보내 안내를 겸해 환영인사를 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이집트의 의미를 모르겠어. 이집트가 제국에게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황제가 너무 쉽게 내줬단 말이야. 사실 나는 이집트가 왜 중요한지도 모르겠어.”

이민호는 민영과 베네치아 시녀들을 대동하고 관측실에 올랐다. 덴마크 공주도 시녀 몇 명과 함께 올라와서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구경했다. 이 시대 기준으로 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한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시가지가 시야에 점점 들어왔다.

알렉산드리아는 한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 비잔틴제국의 도시였으나 7세기 아랍의 정복 이후 이슬람 문화권으로 편입된 지역이었다. 이후 다른 이집트 땅처럼 맘루크 왕조의 영토, 오스만 제국의 속주, 프랑스의 점령지, 마지막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나서 20세기 중반에 독립할 때까지 2천 년 넘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 알렉산드리아에는 등대도 없고 도서관도 없었다. 그리고 상업도 퇴조 중이라 조만간 나폴리에 이어 지중해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로 밀리게 된다.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의 적일 때는 제국의 남쪽 국경인 시리아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요. 실제로 시리아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등을 두고 이집트와 싸웠거든요. 그리고 이집트가 자국 영토일 때는 주변 지역을 제압할 수 있는 요지에요.”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 건너편 구석에 있어서 별로 요지 같지 않은데? 혹시 오지 아냐?”

“1517년에 이집트 맘루크 왕조가 무너지자마자 메카와 메디나가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어요. 심지어 예멘도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다짐했어요. 그리고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서쪽으로 북아프리카 진출이 가능해졌어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홍해를 위협하던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인도양에 진출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영토가 너무 넓어서 메카와 예멘 등에 일일이 제국 관료를 파견해 직접 지배할 수 없었다. 또한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싸우고 발칸 반도나 헝가리에서 전쟁을 지속했기에 여러 속주에 충분한 군대를 파견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들으니 중요한 곳 같다. 이를 테면 이집트는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교통의 요지쯤 되는구나. 어쩐지 예멘이 제국의 영토인 척하더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어.”

수에즈에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예멘이 항상 오스만 제국에 충성한 것은 아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중간에 제국에게 잊힌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1580년부터 1604년까지 하산 파샤가 예멘 총독으로 재임했으나, 황제나 대재상이 예멘을 잊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총독 직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해군이 홍해 북단의 수에즈와 페르시아만 북단의 바스라 사이를 오가며 포르투갈과 싸울 때는 예멘이 제국에 적극 협조했다. 종주국과 속국 관계를 떠나 포르투갈이 공동의 적이었기에 협조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산국 함대가 아덴 항에 들이닥쳤을 때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 함대가 왔다고 예멘 사람들이 기뻐하는 척하며 분쟁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다. 예멘은 무작정 대국을 섬기는 사대주의가 아니라 이렇게 대국을 적절히 이용해 나라를 지켰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이후에도 이집트는 계속해서 반독립적인 위치였어요. 맘루크 왕조가 멸망했는데도 맘루크들이 이집트 정치와 경제의 주도층으로 고스란히 남았거든요.”

“얼마 전에 맘루크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데?”

“맘루크 병사들이 군대에서 추방됐더라도 맘루크 행정 관료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거여요. 이집트의 지배는 이들 맘루크를 통해야 해요.”

“에밀리아의 말이 맞을 것 같다.”

“맘루크들을 이집트에서 몰아내시려고요?”

“그건 아니야. 잘하면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이집트 사람들까지 3자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겠어.”

갤리선들의 안내를 받아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들어섰다. 부두에 예니체리 군관구 장군과 장교들, 오스만과 맘루크 관료들, 알렉산드리아 수비군 대장, 시파히 지휘관들, 맘루크 출신 주지사, 이집트인 이슬람 교사들, 그리고 각종 민병대 대장들이 마중 나왔다. 예니체리 군관구 장군이 대표로 나서서 이민호를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그런데 알리 파샤는 같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저기 함대 기함이 부두에 접안하면 곧 내려오실 거야.”

“알리 파샤께 먼저 인사드려야 합니다.”

“내가 더 높거든?”

그러나 예니체리 장군과 온갖 지역 인사들은 이민호를 무시하고 기함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이순신이 배에서 내리자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이민호는 차별대우가 심하다고 느끼며 혀를 찼다. 하지만 예니체리나 다른 지휘관 혹은 관료들의 상관은 고산국 국왕이 아니라 이집트 총독과 해군 제독을 겸한 이순신과 오스만 제국 황제였다. 이순신이 통역장교를 대동해 예니체리 장군과 대화를 나누더니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전하. 조금 알아보니까 이집트가 온통 엉망입니다. 행정체계나 군사체계 다 고쳐야겠습니다.”

“일단 반란 진압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야겠어요.”

알렉산드리아의 건축물 중에 옛날 왕궁과 포세이돈 신전 등 오래된 것이 많았으나 365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지거나 바다에 수몰돼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로마시대 원형 극장과 이름이 잘못 붙은 폼페이의 기둥 정도가 남았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 왕들이 재위 중에 2개씩 나란히 세운 첨탑 오벨리스크는 4세기에 어느 주교가 이단숭배를 배격한다면서 모조리 무너뜨려 버렸다. 그것을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이 배로 실어가거나, 근대의 이집트 지배자들이 세계 곳곳에 선물로 보냈다.

“이집트 총독 히지르 파샤는 어떻게 됐나?”

“어, 그, 반란 중에 죽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항구거리에 맘루크 주지사의 관저가 있어서 만찬을 열었다. 이민호가 물어봐도 예니체리 장군이 우물쭈물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어떻게 죽었는데?”

“저는 잘 모릅니다.”

거짓말이 분명해서 투르크어 통역을 맡은 네리사가 예니체리 장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장군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는 것 같은데?”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이순신이 술잔을 탁자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예니체리 장군을 쏘아봤다. 이민호와 계복이 잽싸게 고개를 숙이고 고기를 뜯었다. 역시나 그 사이에 대답이 술술 나왔다.

“죄송합니다, 알리 파샤! 이집트 총독 히지르 파샤는 맘루크 반란군을 이끌고 저희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생포됐습니다. 살려두면 골치 아프고 귀찮을 것 같아서 고문 좀 하다가 병사들이 죽였습니다.”

“총독은 대재상 바로 다음 서열인데 함부로 죽여도 돼?”

“어차피 오래 못 살 것 같았습니다. 알리 파샤! 제발 그만 노려보십시오. 저 죽을 것 같습니다.”

네리사가 통역을 해주고 나서야 예니체리 장군이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이순신은 몹시 노했으나 이민호 앞에서는 말을 아꼈다.

“전투 중에 죽었다고 이스탄불에 보고했겠지? 총독은 반란수괴였으니 너희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 전부터 총독에게 불만을 가졌었구먼?”

“에, 그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집트의 경제구조에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이집트의 농경지는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이집트 토지는 황제의 땅, 맘루크의 영지 또는 봉토, 군부대 유지를 위한 둔전 비슷한 땅, 그리고 종교재단이 위치한 땅으로 구분됐다. 맘루크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셀림 1세가 이집트 맘루크에 속한 군인이나 관료들이 가진 봉토를 회수하지 않아 이집트 농경지의 다수가 여전히 맘루크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 맘루크 왕조가 멸망하기 전에 12개 주를 다스리던 맘루크 에미르들이 다시 주의 행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는 멸망 직후 이집트의 행정과 민심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나, 새로운 영토를 정복했는데도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에게 나눠줄 토지가 별로 없게 됐다.

“저희 예니체리가 시파히 기병들과 친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이곳 이집트에는 티마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서 시파히가 소수에 불과합니다. 남는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에서는 새로 정복된 땅을 봉토로 받아 시파히가 경제적 자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파히는 봉토에서 나는 소득에 따라 전쟁 때 데려나갈 병사의 수가 달라졌다. 연 수입이 2만 악체 이하인 티마르 시파히는 5명, 10만 악체까지인 지아멧 시파히는 20명, 10만 악체 이상인 하스 시피히는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땅은 이집트의 지배층이었던 맘루크가 여전히 갖고 있었으니 시파히를 이집트에 충분히 배치할 수가 없었다. 이집트에 어째서 소수 정예라는 예니체리가 시파히 기병보다 더 많은지 이해할 만했다.

“이집트에 와 보니까 군부대 운영비로 쓰라는 농경지가 무척 적었습니다. 저희 예니체리들은 월봉은 황제폐하로부터 직접 받지만 어느 군부대라도 유지비라는 것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부대에 수입이 너무 적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징수할 수가 없어서 약간의 꼼수를 부렸습니다.”

“그게 뭔데?”

“농민들에게 가짜 채무계약서를 쓰게 하고 강제로 돈을 받아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맘루크에 비해 수적 열세인 저희 예니체리들이 어떻게 장비를 유지하겠습니까?”

기본적으로 맘루크는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 예니체리는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보병이었다. 예니체리가 화승총만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쏠 때마다 엄청난 화약이 소모되는 대포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화약은 사용기간에 제한이 있어서 꾸준히 매입해야 하는 소모품이었다.

“총독이 그 짓을 막으려고 해서 예니체리들이 불만이 많았군.”

“바로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해외주둔 비용이 부대든, 병사 개인이든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물가가 말도 못하게 비싸서 월봉 받은 것을 고스란히 주둔비로 쓰고도 빚을 져야 될 정도였습니다. 저희들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농민을 착취했다고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한참 전부터 총독과 예니체리 사이에 긴장감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니체리가 총독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데, 마침 총독이 맘루크와 결탁해 한 발 앞서서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덕택에 예니체리는 반란을 진압한 전공을 세우게 됐다. 맘루크는 예니체리의 2배 이상의 병력이었고 이집트 지방군 일부도 참가했으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같은 시내에서는 화약무기를 앞세운 예니체리가 압승을 거뒀다. 물론 반란진압 과정에서 예니체리의 인명피해도 막심해서, 카이로를 지키는 예니체리 연대는 반 이상이 전사했다고 한다.

“알겠다. 군대 주둔비나 경제제도를 손 좀 보겠다. 그런데 맘루크들은 어떻게 됐나?”

“반란에 가담한 맘루크들은 모두 죽이거나 사막으로 쫓아냈습니다. 영지도 회수했습니다. 그러나 영지 회수는 맘루크 병사들에 한했고 맘루크 관료들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맘루크 출신인 주지사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맘루크 기병 대부분이 최고 지배자에 속하지만 일부는 주지사나 다른 유력자에게 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지사의 맘루크 병사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단할 수도 있었으나, 예니체리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지식인에 가까웠다.

“무정부상태가 될까봐 두려웠겠군.”

“셀림 1세 폐하도 못하신 일을 저희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술탄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맘루크는 다시 이집트의 지배층이 되기 위해 반란에 가담했다. 예니체리는 총독과 경제적인 문제로 부딪칠 경우 언제든 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중요한 세력 세 부류가 이스탄불에서 보기에는 모두 반란 예비 음모자들이었다.

병사들이 이집트에서 일으킨 가장 극적인 폭동은 1604년에 일어났다. 사료에 따르면 시파히 또는 예니체리 병사들이 농민들에게 규정 외의 세금을 부과하고 억지 채무를 지우다가 새로 부임한 총독 이브라힘 파샤가 제지시켰다.

이브라힘 파샤는 병사들을 처형하고 머리를 베어 단지에 담아 시체를 모독했다. 얼마 후 카이로에서 반란군 병사들이 이브라힘 파샤를 칼로 쳐 죽이고 그 시체를 거리에 끌고 다녔다. 그리고 평소에 죄수의 시체를 매다는 문에 총독의 시체를 걸어버렸다.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7, 8년을 끌었다.

“알았다. 일단 현상을 유지해라. 어쨌든 이집트를 통치해야겠는데, 꽤나 복잡하겠어. 장군! 어때? 예니체리들을 이스탄불로 돌려보내줄까?”

“그, 그건!”

역시나 예니체리 장군도 이집트에 남아서 권력을 잡고 싶은 생각이 분명히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이집트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장군의 야망도 날아갔다.

맘루크든 예니체리든 주둔하는 지역과 전혀 관계없는 지역의 노예 병사들이었다. 무기를 쥐어주면 처음에는 고용주에게 충성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이렇게 역심을 품었다.

그리고 이집트 현지 청년들이 출세를 위해 맘루크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맘루크는 폐쇄적인 집단이라 노예병사가 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이집트인들은 피지배자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에 가는 동안 로드무비를 찍...을 일은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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