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64화 (513/1,000)

00564   58. 이집트와 레반트  =========================================================================

고산국 지상군은 나일 강 옆 도로를 타고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3천여 기병과 장갑차, 수많은 마차들이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이집트인들은 새로운 지배자가 도착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새로운 이집트가 개막되는 순간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깨닫게 됐다.

“목화밭이다!”

카이로로 행군하는 중간에 아주 넓은 목화밭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함경도 너머 여진족이 사는 벌판 전체에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땅이 하얗게 변했다.

그런데 이집트 목화는 무릎 높이까지 오는 일년생 작은 관목이 아니라 높이 2미터에 달하는 다년생 나무였다. 하얀 꽃이 피고 진 다음 과실에서 솜이 터져 나온 것이 목화솜이었다.

“와! 하얀 목화송이가 너무 탐스러워요. 품질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나도 문익점 선생 흉내 좀 내볼까?”

고려 말에 원나라에 사절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 씨앗을 가져와 고려 땅에 심었다. 그 전에도 원나라에 입국했던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백성들이 따뜻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은 문익점이 유일했다.

그 시기에 목화를 재배하는 나라가 많아 목면이 원나라의 전략 군사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기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강남으로 귀양을 간 적도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문익점은 백성을 사랑하는 귀족으로 높은 평판을 얻게 됐다. 귀국한 다음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정몽주 편에 붙고도 살아남았고, 조선 개국 후에도 공신 대접을 받아 후손들이 관리로 진출하는 특혜를 누렸다. 목화 재배와 제사법 발견, 면포 제작법 개발 등은 문익점의 장인인 정천익과 그의 아들, 손자들이 완성했다.

그 전에도 한반도에서 재배한 목화 품종은 있었다. 백제 시대 면직물 유물이 발견됐으나 그것은 한반도에서 자라기 어려운 남방계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목화가 극소수 재배됐더라도 당연히 귀족의 사치품에 속했다.

이민호가 전체 행군을 정지시키고 병사들에게 목화밭을 살펴보게 했다. 대부분이 농민의 자식들이라서 이민호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산국이나 조선에서 기르는 목화와 약간 다른 종입니다. 솜털이 두 배나 깁니다.”

“더 더운 곳에서 자라는 품종 같습니다. 그리고 관개시설로 보아 성장기에 물을 굉장히 많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 고산국에 씨앗을 가져가도 제대로 키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목화밭이 특이하게 모래밭이나 다름없는 땅입니다. 물이 많이 필요하면서도 쉽게 빠지는 땅에서 잘 자라는 모양입니다.”

병사들 몇 명에게만 의견을 물어도 답은 벌써 나왔다. 이민호는 목화밭 주인들을 몇 명 불러서 이야기를 들었다.

“바람이나 비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다래가 터지자마자 따줘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수확하는데 노동력이 가장 많이 투입됩니다.”

“기계, 아니 수레로 지나가면서 한꺼번에 따면 안 되겠나?”

기계로 수확하려면 고엽제를 뿌려 잎이 떨어지게 하고 모든 다래가 터진 다음 가능했다. 아무래도 손으로 직접 딴 면화가 품질이 좋고 이물질이 덜 섞였다.

수확도 문제지만 솜에서 씨앗을 손으로 빼내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민호는 조면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조면기를 누구나 쉽게 만드는 바람에 조면기를 발명한 휘트니는 4년 만에 사업을 말아먹었다.

“다래가 터지는 시기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일일이 확인하면서 따줘야 합니다.”

“실이 가늘고 길며 광택이 나는군.”

이집트 목면이 왜 고급인지 알 수 있었다. 성장기에는 고온다습한 환경이 좋지만 다래가 터지는 시기에는 기후가 건조해야 한다고 했다. 조건이 꽤나 복잡해서 습윤한 플로리다에 심었다가는 망할 것 같았다.

차라리 건조한 텍사스에서 관개농업을 하거나, 시기에 따라 건조한 새강릉 주변이 면화 농사에 더 적합했다. 목화밭을 경영하는 농부들에게 물었다.

“이집트에서 언제부터 면화 농사를 지었나?”

“면화 농사 자체는 아주 오래돼서 로마 이전에도 재배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품종을 재배한 것은 제가 알기로 아직 100년도 안 지났습니다.”

이집트 목화는 중남미, 카리브 해 지역이 원산지였고 16세기부터 이집트에서 재배된 해도면이었다. 아프리카 수단이 원산지이며 서남아시아에서 재배되는 황면과, 인도에서 재배되는 인도면은 고산국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재배 중이었다. 생산성이 좋은 육지면은 중남미 원산인데 아직 북미에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고산국 국왕이다. 북미에서 면화를 대량 재배할 생각이야. 자네들 북미로 가고 싶지 않나?”

“저희들이 북미에 가도 되겠습니까?”

농부들이 덜덜 떨었다. 농부들이 가족들을 잠시 살펴보더니, 이민호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고산국 기병과 구르카 용병들 눈치를 살폈다.

“물론이지. 가서 평생 면화농사나 지어.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 거야.”

“감사합니다, 폐하. 하오나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밭과 집을 팔고 가재도구를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숨을 좀 제대로 쉬게나.”

농민들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이 자꾸 신경 쓰였다. 흥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호흡곤란 증세를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군의관을 불러 진단을 해도 병명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호흡곤란 증세가 계속되고 있다고 판단할 뿐이었다.

이민호는 잘 몰랐지만 직물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면화 생산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병이 진폐증의 일종인 면폐증이었다. 솜털에서 나온 미세 먼지는 산업시대 이전에도 이렇게 사람들에게 병을 일으키고 있었다.

면화농사를 관두거나 마스크를 쓰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미국 남부 면화 농장에서 노예들이 면폐증으로 고생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목화 농장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병이 만연했다.

“이 편지를 줄 테니까 사흘 안에 알렉산드리아로 가게. 가재도구는 웬만하면 버리고, 대신 목화 씨앗 여러 가지를 대량으로 가져가게나.”

“북미에 기도할 곳은 있습니까?”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큰 모스크가 적어도 열 곳에 있네. 그리고 오스만 제국 황제폐하로부터 모스크를 건설할 장인 수백 명을 빌려서 더 많이 지을 걸세. 자네들이 북미로 이주한다면 전 가족이 메카 순례를 하도록 해주겠어.”

“메카에 갈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민영이! 농가마다 오스만 제국 금화 50개씩 나눠주도록 해.”

펠라힌이 유럽 소작농과 구별되는 점이 여기에 있었다. 이들은 가난해서 그렇지 밭이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데 제한이 없었다. 이집트인 면화농가 네 가구가 북미로 가서 적당한 땅을 찾아 목화를 재배하기로 했다.

물론 이집트 목화가 북미에서 잘 자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원래 북미에서는 남미 원산인 육지면을 재배했다. 육지면이 동양면보다 섬유 수가 다섯 배 이상이기 때문에 나중에 아시아에서도 동양면보다 육지면을 더 많이 재배하게 됐다. 여차 하면 육지면을 구해 재배하기로 했다.

목화의 종자는 면실유 기름을 짜고 마가린을 만들 수 있었다. 짜고 남은 깻묵은 좋은 단백질 사료나 비료가 된다. 염해가 심한 바닷가 땅에도 목화는 잘 자랐다. 19세기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된 식물이기도 했다.

이틀에 걸쳐 행군한 끝에 카이로에 도착했다. 일부러 기자로 우회해서 병사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와 대 스핑크스를 구경시켰다. 본격적인 사막 지역에 처음 들어와서 장갑차가 걱정됐으나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스핑크스처럼 사자 몸에 사람 얼굴이 달린 상상 속의 동물 부조상은 이집트 외에도 아시리아와 그리스, 버마와 인도에도 있었으나 이렇게 큰 것은 드물었다. 다른 병사들처럼 이민호도 이렇게 큰 석상은 처음 봐서 넋 놓고 구경했다. 73.5미터 길이와 20.22미터 높이라는 규모 자체만으로도 큰 감명을 주었다.

“왕들이 어째서 거대 토목공사에 의욕을 가지는지 이해가 가. 이런 것 하나 세워놓으니까 멋지잖아?”

“조선에서는 백성들 고생시킨다고 대규모 토목공사는 안 하잖아요?”

현대에는 정치가들이 임기 중에 업적으로 내세우고 사업을 진행하면서 업체로부터 챙기는 뒷돈 때문에 토목공사에 집착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이렇게 수천 년 동안 이어지고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다른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욕심을 낼만한 것 같았다.

“그거야 부역일 때 이야기지. 이집트에서는 백성들에게 일부러 돈을 주려고 일을 시키는 거니까 다르지.”

“고산국에도 이렇게 거대한 석상을 만들고 싶으세요?”

“여력이 생기면 그때 만들어봐야겠어. 종교적인 상징물은 빼고, 왕실에 아부하는 그런 것도 빼고.”

이민호가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는데도 지난해에 왕도 인근의 농민들이 돈을 모아 ‘대고산국 태조대왕 석상’을 만든다기에 기겁했었다. 그런 의미 없는 것보다는 자유의 여신상이나 에펠탑 같은 도시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훨씬 나았다.

도시의 상징물은 그 도시의 발전과 문화, 국력의 척도가 됐다. 새강릉에 12층 건물을 세운 것만으로도 주변 북미 원주민들이 고산국을 배반할 꿈도 못 꿨다.

그리고 그 건물을 구경하려고 멀리서 왔다가 고산국에 속하기로 결정한 원주민 부족들이 꽤 많았다. 건물 하나 세운 것만으로 가만히 앉아서 북미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전망대 겸 시청 건물로 쓰려고 만든 건물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효과를 봤다. 새강릉에 입항했던 상인들에 의해 12층 건물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고산국의 국력과 과학기술 수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됐다.

나일 강을 오가던 배를 수십 척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나일 강을 건넜다. 기병은 배다리를 건널 수 있었지만 장갑차는 일일이 배로 실어 날라야 했다.

카이로는 이 시대 기준으로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수십 곳의 모스크와 하늘을 향해 삐쭉 솟아난 첨탑들 외에도 수많은 집들이 도로변에 늘어서 있었다. 고산국 군대가 시내에 진입하면서 놀란 시민들이 숨어서 그렇지, 상주인구도 많은 도시였다.

카이로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살라딘이 세웠다는 카이로 성채, 카이로 시타델이라고 하는 석조 건물이 있었다. 아랍어로는 칼라라고 부르는 이곳은 여러 왕조의 왕궁이었다가 지금은 오스만 제국 이집트 총독의 관저로 사용됐다.

“들어갑시다, 형님. 이집트 총독이 이 성의 주인이잖아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입장하십시오.”

“나란히 말머리를 맞춰서 들어갑시다.”

이민호는 이순신과 함께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성에 입장했다. 성문을 통과하자 알렉산드리아처럼 예니체리 장군, 맘루크 행정관, 수백 명의 울라마들이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확실히 수도는 비슷한 규모의 지방 대도시와 달랐다. 일단 높은 사람들 숫자가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많았다.

“나는 고산국 국왕이고, 이 분은 오스만 제국 해군 제독이시며 이집트 총독이신 이순신, 알리 파샤이시다.”

“두 분께 인사 올립니다.”

이민호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무릎 꿇고 우러러보는 수백 명의 이집트 지배층들을 향해 선포했다.

“앞으로 이집트는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집트인 위주로 정책이 집행될 것이다. 맘루크 출신 행정 관료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겠지만 옛날처럼 지배층이 아니다. 스스로 이집트인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고산국 본국에서 총독 대리와 관료들을 보낼 것이다. 그 전에는 하던 일을 계속 하되 총독 대리의 명을 따르도록.”

이민호는 여전히 말을 타고 예니체리 장군의 안내를 받았다. 장군이 이끈 곳은 성채 높은 곳에 위치한 알현실이었다. 수백 명의 울라마를 포함해 관료, 고위 장교 등이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저는 카이로 행정관입니다, 폐하. 폐하께서 알렉산드리아에 이집트군 창설을 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카이로에도 이집트군을 창설합니까?”

다른 오스만 제국 속주들처럼 이집트에서도 역참제도가 실시 중이었다. 고산국 지상군의 이동 속도는 이 시대 기준으로 무척 빠른 편이었지만 구르카 여단이 마차에 탔기 때문에 일정 거리마다 위치한 역의 도움을 받은 전령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민호가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는 소식이 카이로에도 이미 전해졌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또 올려야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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