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78화 (52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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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대서양

구호 기사단 갤리선을 몰타 섬에서 풀어주고, 다음 날 아르노 도사 추기경을 로마에 내려주었다. 로마에 들러서 교황을 만나보라고 추기경이 권했지만 이민호는 친서만 한 장 내주고 내년에 다시 보기로 했다.

진행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은 추기경이 교황에게 직접 보고할 테니 간단히 요약했고, 예루살렘에서 이민호가 보고 느낀 것 위주로 친서를 작성했다. 구호 기사단과 성묘 기사단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면서, 덴마크 공주가 성묘 기사단 기사로 서임 받은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4월 하순에 고산국 함대는 지브롤터 해협의 지브롤터에서 하루를 묵었다. 해협 바로 동쪽에 항구로 쓰기 딱 적당한 만이 있어서 함대가 정박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얼마 전에 북미로 보낸 수송선들이 새강릉과 새원산에 이민자들을 내려주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지브롤터 항에서 며칠째 정박하고 있었다. 수송선들이 사람 대신 식량과 상품을 가득 싣고 돌아온 덕택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판매할 상품이 바닥났을 때는 괜히 초조했었다.

“전하. 지브롤터의 함대 사령관과 수비대 사령관이 교역을 원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직접 오고 있군. 어떤 상품을 원하던가?”

수송선 전대를 이끈 선임 함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10척에 달하는 에스파냐 갈레온과 그보다 약간 많은 갤리선이 지브롤터 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복장을 갖춘 고급 군인들이 호위병들과 함께 국왕좌승함이 정박한 부두로 다가왔다.

“곤란하게도 향신료와 모피를 원합니다. 물론 저는 전하의 윤허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습니다.”

“잘 했네. 향신료는 물량을 조절해야 하고 모피라면 러시아를 때려잡을 전략 상품인데 여기서 많이 팔 수는 없지. 알았네. 함께 저녁 식사나 하고 가게.”

국왕좌승함 알현실에서 만찬을 열었다. 지브롤터를 지키는 제독과 장군은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고산국 함대가 가진 상품에만 관심을 쏟았다.

멕시코에서 근무하는 군인과 모험가들은 원주민들에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종교적, 사업적 열정이 넘쳤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지브롤터를 지키는 군인들은 조금 엉성했다. 저들은 에스파냐 국왕과의 친분 관계를 이용해 직책을 유지하는 이른바 정치군인들이었다.

“폐하! 지중해를 제패하신 전공을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고맙소. 제독과 장군은 배후에서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소. 에스파냐 국왕폐하께 보내는 친서를 제독께 맡기겠소이다.”

“영광입니다, 폐하. 하온데 이번에 향신료는 많이 가져 오셨습니까?”

고산국 함대가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치고 내년에 교황이 예루살렘 순례를 간다는 이야기는 한갓 잡담으로 치부됐다. 제독과 장군이 하도 집요하게 상품 교역을 원하기에 귀찮아서 적당한 물량을 떼어줬다.

“감사합니다, 폐하. 발렌시아 부왕이 고산국과 교약을 한다고 하도 자랑하기에 그 동안 부러웠습니다.”

“제독과 장군도 조만간 총독이나 부왕이 되실 텐데, 그때는 싫어도 교역을 많이 해야 될 것이오.”

“그 전에 모로코 놈들이 도발을 해줘야 전공을 세울 텐데 말입니다. 평화가 오면 우리 같은 장군들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정치군인들은 제대로 싸울 능력도 없는 주제에 이것저것 이권 챙기는 일은 잘했다. 즉위 초기라서 정권이 불안정한 국왕 펠리페 3세 입장에서는 충성도를 중시해 이런 무능한 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와 모로코가 동맹을 맺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모로코에서 대사를 잉글랜드에 보내 여왕과 직접 협상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저희들이 틀어막고 있어서 사절단이 모로코를 떠나지도 못했습니다.”

“모로코 사절단이 아예 못 떠나게 막았다고요? 오호!”

엘리자베스 1세가 재위 기간 내내 에스파냐에 맞선 것은 왕권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나 에스파냐, 교황은 잉글랜드 여왕의 적들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우군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국가는 네덜란드와 러시아, 프랑스와 모로코였다. 네덜란드에는 원정군을 파견해 에스파냐 군과 싸웠고, 러시아 즉 루스 차르 국에는 교역을 우선했다.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는 원정군을 여러 차례 보내 도왔으나 죄다 재앙적인 결과만 가져왔다.

모로코와 잉글랜드는 우호적인 교역을 진행하고 있었고, 1585년 바르바리 회사가 특허권을 가지고 모로코 무역을 독점했다. 잉글랜드는 교황이 금지했음에도 무시하고 갑옷과 화약, 목재와 금속을 팔고 모로코로부터 설탕을 사들였다.

현재 모로코의 지배자 물라이 아흐마드 알 만수르는 보좌관 압둘 콰헤드를 런던에 대사로 파견할 계획이었다. 잉글랜드와 모로코의 동맹을 결성해 에스파냐로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콰헤드는 1600년 8월에 도버 해협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 군이 참패하는 바람에 모로코와 잉글랜드의 동맹 가능성은 당분간 없을 것입니다.”

“오! 아일랜드 반란은 어떻게 됐소?”

잉글랜드 군이 아일랜드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한다고 했다. 조선이나 다른 동양 국가들처럼 들판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소개시켜 적의 식량과 마초 공급을 차단하는 것은 비슷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군은 아일랜드의 남자와 여자, 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것을 청야전술에 추가했다. 전쟁 와중에 굶어죽는 자들이 더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아일랜드 전쟁은 1594년부터 1603년까지 이어져 9년 전쟁이라 불리게 됐다. 잉글랜드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도울 때는 원정군이 12,000명을 넘은 적이 없었으나 아일랜드에는 18,000명을 파병했다.

“작년 9월 14일에 얼스터의 블랙워터 강 요새로 향하던 잉글랜드 군을 아일랜드 군이 매복 공격을 가해 대승을 거뒀다고 합니다. 이 옐로 포드 전투에서 잉글랜드 병사 2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대규모 전투였나 보군요.”

“4천 명 중에서 규율을 유지한 병력 2천이 간신히 아르마로 도망쳤다가 통째로 아일랜드 군에게 포위됐다고 합니다. 정확한 피해는 900명 전사, 900명 탈영이었습니다. 북부 아일랜드 군의 규모는 8천 명 수준이었습니다.”

대승리로 고무된 얼스터 주민들이 반란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반란군 지도자 타이론 백작 휴 오닐이 사비를 들여 스코틀랜드의 게일인 용병들을 모집해 군세를 확충하고 있다고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이번에는 제대로 싸우는군요.”

“얼마 전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무례하고 야만적인 종족이라고 했습니다. 야만인들에게 호되게 당한 셈입니다.”

제독과 장군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반란군 지도자들이 에스파냐 국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어쩌면 에스파냐 지상군이 직접 아일랜드로 원정을 갈 수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601년 에스파냐 병사 3,500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아일랜드 남단 킨스에일에 상륙해 아일랜드 독립군을 지원한다.

“그런데, 제독! 어째서 해협에 전함을 고정 배치하지 않습니까? 우리 함대가 지브롤터 항에 들어오는 동안 출동 중인 에스파냐 전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폐하! 지브롤터는 해류가 거세게 흐르는 곳입니다. 어떤 배도 중간에 가만히 서서 버티기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에스파냐 해군이 다들 항구에 틀어박혀 낮잠이나 자는 것 같았다. 이러니 1607년에 네덜란드 해군에게 기습을 당해 지브롤터 함대가 쫄딱 망했다.

“그럼 어떻게 해협을 방비합니까?”

“바위 위에 몇 백 년 전에 무어인들이 지은 성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관측하다가 의심 가는 배가 해협을 지나갈 경우 우리 전함이 출동해서 임검을 하고 있습니다.”

“지중해에 잉글랜드나 네덜란드 배가 의외로 많아서 말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건조한 배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대한 시계 피아노를 마차에 싣고 이탈리아에 와서 새로 건조한 배에 실을 수는 없었다. 지브롤터를 통과한 것이 틀림없는 에스파냐의 적성국 배들 중에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배들, 그리고 북유럽까지 가서 해적활동을 하는 북아프리카 사략선들을 이민호가 직접 확인했다.

에스파냐는 함대를 배치하고도 지브롤터 해협이라는 전략적인 이점을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했다. 이민호 눈앞에서 와구와구 고기를 뜯는 제독이 무능한 탓이었다.

함대는 다음 날 지브롤터 해협 남쪽 북아프리카의 에스파냐 도시 세우타와 탠지어를 살펴보고 대서양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잉글랜드 해군에게 점령됐었던 카디스에서 하룻밤 정박했다.

다음 날에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하루 정박했다. 마카오나 향료제도에서 시끌벅적했던 포르투갈 상인들과 달리 리스본은 의외로 조용했다.

에스파냐 귀족들이 부왕을 맡으면서 포르투갈은 전보다 활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상선이 리스본에 입항할 수 없게 돼서, 북부 유럽과의 교역이 끊기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에스파냐로부터 여러 가지 통제를 받다 보니 무역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리스본에서 폐하를 뵙다니,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동 두아르테는 세계 어딜 가나 계시는구려.”

“폐하께서도 세계 모든 항구를 돌아다니시는군요.”

마카오와 말래카를 오가던 포르투갈 상인 두아르테는 오랜만에 포르투갈에 돌아왔다고 한다. 리스본에 향신료를 판매하지 않으려던 이민호는 두아르테 덕택에 향신료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양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당연히 동남아시아에서 유지되는 가격보다 몇 십 배나 뛰었다.

“향신료 가격이 작년 말에 폭락했다가 이번 봄에 다시 올랐습니다. 고산국 함대에서 발렌시아와 지중해 국가들에 많은 양을 판매했다고 들었는데 가격은 의외로 안정적입니다.”

“유럽에서 향신료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무래도 그것도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품의 가격이 뛰다 보니 은값만 상대적으로 폭락한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금과 은이 너무 많이 풀려서, 고산국에서 아무리 판매량을 늘려도 상품 가격의 상승 폭이 더 빠르다는 뜻이었다. 매년 폭등하는 유럽의 물가를 잡으려면 고산국이 열심히 무역흑자를 통해 금과 은을 흡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 됐소. 동 두아르테가 거래를 중개해주시오. 중개수수료는 충분히 챙겨드리겠소.”

이민호는 두아르테를 내세워 설탕과 식량을 비롯해 갖가지 상품을 신나게 팔아치웠다. 두아르테는 리스본에서도 신용도가 높은 상인이라, 리스본 상인들이 이익을 조금 적게 보고도 그와 거래하려고 했다.

협동조합이나 국영 상단 비슷한 마카오 회사의 직원으로서 일하던 두아르테는, 이곳 리스본에서는 개인 사업가로 나서서 거래를 중개했다. 거래 금액이 워낙 큰 덕택에 두아르테는 지난 10년 넘게 무역을 통해 거둔 수입보다 몇 배나 많은 이익을 얻게 됐다.

“하루 이익이 10만 두카트가 넘습니다. 아무리 구전이라지만 너무 많습니다. 중개수수료 절반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동 두아르테가 그 동안 고산국에서 정직하게 상행을 한 데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하시오.”

“항상 폐하께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나도 동 두아르테에게 신세를 지고 있소.”

영지를 사서 정식 귀족이 될까 고민하는 두아르테와 헤어지고 함대는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에스파냐 북서쪽, 갈리시아의 비베이로에 도착했다.

“비베이로가 겨우 몇 달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

“도시가 발전하는 것을 보기가 좋아요.”

갈리시아 지방은 작년 하반기부터 아일랜드 독립을 도와주는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크게 번성했다. 머스킷과 화약 외에도 전쟁에는 여러 가지 물자가 필요했고, 아일랜드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만큼 모두 갈리시아에서 구해서 보급했다.

“폐하! 드디어 오셨습니까?”

“선장! 일은 잘하고 있소?”

“물론입니다, 폐하!”

머스킷과 화약을 생산해 아일랜드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선장이 활짝 웃으며 국왕좌승함에 올랐다. 매달 고정 수입 6천 두카트의 힘은 커서, 지난번에 봤을 때는 허술하던 선장의 무역선이 이번에 볼 때는 신형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 시기 아일랜드 반란의 규모가 크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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