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0 61. 대서양 =========================================================================
“제 거여요! 미누야! 이리 와.”
“웡~”
개가 꼬마에게 달려가서 기다란 몸체로 꼬마를 보호하듯이 감쌌다. 빠른 속도와 개치고는 좋은 시력, 그리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 등 아이리시울프하운드는 훌륭한 사냥개 품종이었다.
고산국 군대에는 경비견이라면 몰라도 마스티프 같은 대형 전투견이나 맹수사냥개가 필요 없었다. 북미에서 농장 주변을 기웃거리며 가끔 닭을 물어가는 여우나 코요테가 문제될 뿐이었으나, 똥개로도 충분히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북미 대륙에서 활동하는 탐험대에게는 대형 사냥개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탐험대가 북미 원주민과 싸울 일은 별로 없어도 곰과 늑대, 퓨마 등 맹수와 부닥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탐험대는 보급 문제 때문에 사냥개 여러 마리를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경계용으로 딱 한 마리만 데려갈 수 있다 해도 상황에 따라 북미의 회색늑대나 삼림늑대와 맞서 싸울만한 개는 지금까지 구할 수 없었다. 늑대와도 싸울 수 있는 아이리시울프하운드는 탐험대에 꼭 필요한 견종 같았다.
“강아지 이름이 왜 미누야?”
“미누 대왕은 대서양 건너 신대륙의 왕 이름이래요. 지금도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는 고마운 분이라서 그분 이름을 빌렸어요. 어른들이 그러는데 동네 암캐들을 죄다 건드리고 다니는 것도 미누 대왕을 닮았대요.”
옆에서 민영이 숨도 못 쉬면서 웃음을 참았다. 고산국 국왕에게 후궁이 많다는 소문은 이미 유럽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상대가 열 살도 안 된 꼬마라서 이민호가 꿀밤을 먹이지도 못했다.
갓 지은 수용소에는 아이리시울프하운드가 다섯 마리 정도 눈에 띄었다. 빨간 아이리시 세터도 대형 사냥견이지만 애완용이나 농장 경비용으로 적당할 것 같아 내버려두었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여자와 아이들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많아 그들을 지켜줄 적당히 큰 개가 필요하기도 했다.
“너는 북미에 이민 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니?”
“군에 입대해서 군견을 훈련시키는 일을 맡고 싶어요. 이 개들은 주인이 아니라도 동료로 인식한 사람 말을 잘 듣거든요. 군견으로 적합할 거여요.”
아이리시울프하운드는 지나치게 큰 체구와 사나운 성격 때문에 가정용으로 기르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적당한 보상을 하고 사들여서 탐험용 견종으로 특화하기로 결정했다. 브리더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좋다. 군견은 아니더라도 탐험대 동반견으로 결정했다. 네 나이가 아직 어려서 군에서 병사로 안 받아줄 테니 일단 군무원으로 임용하마. 북미에 가거든 미누를 비롯해 개들을 키워라.”
고산국 군부대에서 조리사나 세탁부, 청소부는 민간인 군속이 맡았다. 병력이 적다 보니 병사들을 최대한 전투병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아저씨는 높은 사람인가요? 일자리를 주시겠다니 고마워요.”
“무슨 아저씨? 형이라 불러. 가족은 있니?”
“아버지는 잉글랜드 지주 놈에게 맞아죽었고 큰형은 독립군으로 나가 싸우다가 전사했어요. 작은 형은 독립군에 입대해서 아일랜드에 남아있고 여기에는 엄마와 누나, 여동생 둘이 있어요.”
이 시대 평균적인 아일랜드 가정의 모습이었다. 고생을 해서 나이에 비해 팍 늙어버린 중년 여인 뒤로 꼬마들이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이민호가 개 주인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네가 가족을 돌보고 지켜야겠구나. 너는 오늘부터 고산국의 군무원이다. 하급 관리와 같은 직책이니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라.”
북미에서는 홀어머니가 가장이 되어도 경제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러 이런 말을 해서 꼬마의 기를 살려주었다.
“좋아요, 형. 그런데 제가 크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싶어요. 그렇게 해도 되죠?”
“개인 자격으로는 가능하지만 고산국 군인이나 관리 신분에서 벗어나야 한다. 네가 어른이 되고 나서 스스로 결정해라.”
생각 같아서는 아일랜드를 도와 잉글랜드를 당장 멸망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고산국의 침략 성향을 두려워할까봐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잉글랜드가 뭔가 사고를 쳐주면 편할 것 같았으나, 잉글랜드는 고산국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어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었다. 현대 같으면 아일랜드에서 자행되는 인종청소를 이유로 들어 다른 나라들과 연합해 잉글랜드를 공격할 수 있겠지만 이 시대에는 납득해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침략이나 내정간섭이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형?”
“뭐가?”
“제 머리를 쓰다듬고 계시잖아요. 저 빨간 머린데요.”
“어때서? 귀여운데.”
빨간 머리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잔뜩 난 개 주인 꼬마가 씩 웃었다. 잉글랜드 사람들과 달리 이민호에게 빨간 머리는 혐오감이나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파티마 외에도 갈라티아 시녀들 중에 빨간 머리가 몇 있었고, 다른 시녀들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승은을 입었다.
“북미에 가면 바로 일하게 되나요?”
“일을 하긴 하는데, 개에 대해서는 네가 어른들을 가르쳐야 할 거야. 그리고 안 됐지만 너는 낮에 학교에 다녀야 해.”
꼬마가 단박에 이민호에게서 서너 걸음 물러났다.
“힉! 학교요?”
“그렇지. 게일어 읽기와 쓰기, 말하기를 배우고 거기에 더해 고산국어 읽기와 쓰기, 말하기를 배워야 해. 그것뿐이야? 산수와 지리, 기술을 배우고 매년 학년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해.”
“안 돼요!”
“돼!”
“학교 안 가고 개들이랑 뛰어놀고 싶어요.”
“학교를 빠지면 뚱뚱한 아줌마 선생님이 널 교무실에 붙잡아두고 두 시간 동안 잔소리를 퍼부을 거야.”
“히익!”
그러나 꼬마에게는 학교에 대한 선망 비슷한 것이 있었다. 꼬마의 누나와 여동생들뿐만 아니라 수용소에 임시 거주하는 모든 아일랜드 아이들이 학교 이야기로 들떴다.
아이들끼리 지나치게 경쟁만 시키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학교는 좋은 놀이터였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로 구성된 또래집단은 가장 강력한 교육 기구였다.
“형! 아일랜드인을 노예로 부리는 건 아니죠?”
“노예로 부리려면 똑같은 면적의 농지를 분배해주겠니?”
“그건 그래요. 북미로 이민 갔다가 선원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해줬어요. 거긴 천국이라고요.”
“아일랜드에 비하면 천국이지.”
일은 더 많이 해야겠지만, 이라는 말을 생략했다. 아일랜드인들이 불쌍해서 이민호가 자꾸 꼬마의 머리를 강아지처럼 쓰다듬었다.
커다란 아이리시울프하운드도 머리를 들이밀어 쓰다듬어달라고 이민호에게 요구했다. 생긴 건 애완용 강아지처럼 털이 북실하고 귀여운데 체구가 말도 못하게 커서 어색했다.
말을 타고 부두로 돌아가는 길에 검술학교 옆을 지나치게 되었다. 울타리 너머 마당에서 약간 가느다란 장검을 쥔 자와 바늘처럼 가는 칼을 쥔 자가 대련을 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학생들인지 다른 젊은이들이 앉아서 그 대련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왼손에는 작은 원형방패 또는 단검을,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싸워서 현대 펜싱과 전혀 달랐다. 장검을 쥔 자가 상대의 칼을 부러뜨리기 위해 크게 휘두르는 순간 바늘 같은 칼을 쥔 자가 잽싸게 칼을 거둔 즉시 칼끝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러나 장검을 쥔 자도 하수는 아닌 듯, 작은 원형 방패에 이어 장검으로 상대의 빠른 연계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두 사람은 다른 검으로 다른 검법을 사용하는데 각자 특색이 있었다. 5분이 넘어 대련이 무승부로 끝나자 이민호가 박수를 쳤다.
“구경 잘했네.”
“고산국 국왕폐하!”
이민호가 검술학교로 들어가자 교사와 학생들이 인사를 올렸다.
“아주 훌륭해. 자네들이 누군지 소개해주겠나?”
“저는 마르크스브뤼더 길드 소속 검술 교사 장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검술을 배웠고, 프랑스 혈통입니다.”
“저는 에스파냐 검술인 데스트레자를 기반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유행하는 펜싱을 배운 검술 교사 후안입니다.”
“둘 다 같은 이름이군. 실력도 아주 좋아.”
교사 두 사람 중 하나는 갈리시아 출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유학파였다. 이민호는 민영과 잠시 눈을 맞췄다.
총기가 주 무장인 고산국 군대도 여전히 전통적인 무예를 수련했다. 전투가 총기 사격만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전통 무기를 써야 할 때도 있을 것으로 상정해서 훈련을 시켰다. 특히 기병연대의 경우 기사와 기창 외에 편곤도 다뤘다. 환도는 조선에서도 그렇듯이 보조 무장에 그쳤다.
그러나 기마민족의 마상검술은 검술보다 승마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서, 말을 타지 않았을 때는 위력이 별로 없었다. 이민호는 마상검술도 마술 외에 검술을 가미해 위력을 증대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은 활을, 명나라는 창을 주 무기로 삼아서 이 시대에는 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시대의 검술은 일본이 가장 나았고, 발전도 빨랐으나 고산국에 의해 망하다시피 했다. 일본의 모든 것이 퇴보하는 중에 검술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자네들 혹시 고산국 군대에서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 없나? 군인들의 무예 스승인 만큼 대우는 충분히 해주겠네. 처음에는 중령, 2년 후에는 대령 계급을 주지.”
교사들이 대우에 만족했으나 가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폐하! 황송하오나 저희들이 배운 검술은 뭉툭한 기병도로 펼치기 어렵습니다. 특히 고산국 기병도는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습니까? 찌르는 검술과 베는 검술은 근원이 아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희들이 수련하는 것은 군용 검술이 아니라 호신용 검술에 불과합니다. 제가 독일에서 군용 검술도 배우긴 했으나 기초에 불과해 가르쳐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민호는 솔직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선호했다. 그래서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세와 근세 초기에는 독일에서 각종 무술이 발달했으나 16세기 말 개인 호신 검술인 펜싱은 에스파냐와 이탈리아가 주도했다. 잉글랜드에도 16세기 전반에 검술학교가 세워졌다가 나중에 들어온 펜싱 류에 의해 사라졌다.
17세기 이후에는 프랑스 궁정에서 펜싱이 발달했고, 검의 형태와 기술이 현대까지 이어졌다. 이민호가 본 것은 프랑스로 주도권이 넘어가기 전의 과도기 펜싱이었다.
“그럼 기병도로 펼치는 검술을 만들어서 가르치게. 안 되면 호신용 검술도 괜찮네.”
“예?”
이들이 가진 칼은 삼총사에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레이피어에 가까운 종류였다. 그러나 아직은 찌르기뿐만 아니라 베기도 가능하게 검면이 살아 있었다.
“억지 아니야. 자네들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쳐도 돼. 기병도는 잊어버리게. 기병도 검술은 다른 검술 스승을 모셔오면 되니까.”
“그렇다면 기병도 검술을 잘하는 사람을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 고마워. 그렇다고 자네들이 빠지면 안 돼. 괜히 에스파냐 국왕의 칙령으로 끌려오지 말고 자네들 발로 스스로 고산국으로 오게. 제자들을 데려와도 좋네.”
검술 교사들의 가족 전체가 고산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기병도 검술 스승도 곧 연락이 닿아서 고산국 왕도로 이주하기로 했다. 계약금 명목으로 금화를 듬뿍 안겨 주었다.
수송선 두 척을 뽑아 비베이로에 수용된 아일랜드인들을 북미로 보내려는데, 마침 더블린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비베이로에 도착했다. 여객선 선장을 이민호가 불렀다.
“아일랜드에서 전쟁이 격심하게 진행된다면서?”
“그렇습니다, 폐하. 에섹스 백작이 크게 패해서 더블린으로 후퇴했습니다. 더블린이 아일랜드 독립군에 포위된 채로 휴전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용소에 아일랜드인이 적었습니다. 여객선이 처음으로 절반도 차지 않았습니다.”
“피난민들이 더블린에 들어가기 어렵겠지. 아일랜드 독립군이 장악한 지역에도 수용소를 만들어야겠어. 이주민들 상태는 괜찮나?”
수용소라고 흔히 말하지만 난민 임시 숙소를 뜻했다. 식수와 식량 공급, 화장실 등 공중위생 외에도 의사들이 상주하며 질병을 치료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서쪽 어디서 흑사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동부는 아직 괜찮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대서양을 건너는 중에 죽는 사람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죽는 사람이 생기는 모양이군. 이곳 아일랜드 사람들도 태우고 가게.”
============================ 작품 후기 ============================
군용보다는 호신용 검술입니다. 병사들 휴가 내보낼 때 총은 놔두고 레이피어를 차고 나가게 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