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1 61. 대서양 =========================================================================
이민호가 크게 낙담했으나 항해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약한 사람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아일랜드에 식량을 대규모로 지원한 효과가 확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 대신에 아일랜드에서 북미로 가는 이주 희망자 숫자도 줄어들었다.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하면 북미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고향이 더 좋겠지.”
“실망하지 마세요.”
“아니야. 잘 된 일이야.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 가라지 뭐.”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북미를 고향보다 더 좋게 만들어주세요. 곧 그렇게 될 거여요.”
민영이 격려해줘서 이민호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조선인이든 아일랜드인이든 고산국보다 고향이 좋다면서 돌아가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어릴 때의 추억보다 강한 마약은 없을 것 같았다.
이주민들의 고향에 대한 집착이 고산국의 이주민 정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북미 도시는 어쩔 수 없지만 농촌은 아일랜드 이주민들끼리 모여 살도록 배려해주었다. 집은 아일랜드와 달리 시멘트 벽돌로 외벽을 쌓았더라도 회칠을 하고 경사가 급한 지붕 위에 굴뚝을 세워서 최소한 겉모습만큼은 아일랜드의 전통 오두막처럼 만들어주었다.
모리스코 거주지도 마찬가지로 고향인 에스파냐 남부의 시골이나 작은 도시처럼 꾸몄다. 오대호에 가까운 작은 도시 하나는 거리의 구획 하나가 가운데가 빈 3층짜리 네모 난 건물 하나로 이루어져 에스파냐 도시와 비슷한 모습을 갖췄다.
물론 아일랜드인이나 모리스코인들은 고산국과 북미 원주민까지 포함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은 적었다. 게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북미에서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주민들을 고산국 문화에 강제로 통합시키는 것보다는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편이 장기적으로 보아 바람직했다. 고산국이나 조선 출신이 아닌 자가 군대에 입대하거나, 시청에서 특정 정책을 집행할 때도 의사소통 문제는 그리 크지 않았다. 북미 개발이 몇 년 지나면서 통역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현대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 등에서는 히스패닉들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히스패닉들은 미국 국적을 가졌으면서도 자기들끼리 스페인어만 사용하고 영어는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일반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답답하고 비미국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살아가고 미국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주민들이 조선말을 안 배워도 된다고요?”
“교사나 공무원을 하려면 조금은 배워야겠지.”
민영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강제적인 언어와 문화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직업 선택이나 사업할 때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주류 민족의 언어를 배우게 돼 있었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 마을에 학교를 세울 때도 원주민 언어 교육을 우선함으로써 조선말을 배우게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다. 다른 민족에게도 마찬가지 교육정책을 시행하면서 기본적인 조선말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했다.
지금도 고산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너무 컸다. 설날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북미 원주민이나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설날 연휴에 본토 출신들처럼 설빔을 입고 다녔다. 꼬마들이 조선 도련님이나 상궁 복장을 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 귀여워 미친다는데, 안타깝게도 이민호는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왜? 민영이는 조선말을 힘겹게 배워서 억울해?”
“아니에요.”
“억울한 것 같은데.”
“정말이에요. 요즘 여진족들이 다른 여진 부족과 만나서 대화할 때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대요. 여진족은 부족에 따라 말이 너무 많이 다르거든요. 지금은 조선말 하나만 배워도 다 통하니까요.”
“그래? 누르하치가 화가 많이 났겠다.”
조선 북쪽 여진 땅이 아직도 만주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누르하치가 지배하는 건주여진에 속한 인원과 땅만 만주로 통용됐을 뿐이었다. 여진족이 사는 전체 땅이 아니라 건주를 만주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제가 어렸을 때 누르하치라는 분은 하늘처럼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마치 시골 영주처럼 됐어요.”
“그 사람도 대단한 영웅이니까 계속 지켜봐야 해.”
누르하치는 어쩌면 이민호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 누르하치의 역량이 제대로 다 발휘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대했던 대로 구룬 한께서는 엔두링게 한이 되셨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나라를 세우셨고, 백성들에게 더 없이 잘해주고 계세요. 주인님은 이미 성덕이 높은 황제 폐하세요.”
“굴마훈. 내 귀여운 토끼가 도와준 덕분이야.”
“헤헤!”
민영의 옛 이름을 오랜만에 부르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영이 앞니 두 개를 드러내놓고 눈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영토 확장은 안 하실 거죠?”
“영토를 늘려도 지킬 능력이 없어.”
만주, 그러니까 현재 여진족들이 사는 땅 절반은 고산국의 속국인 동해여진을 통해 간접 지배할 수 있었다. 동해여진은 자기 땅을 지킬 능력도 부족하므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흡수 통합할 힘은 없었다.
몇 년 안으로 누르하치가 해서여진 여러 부족들을 흡수하는 작업이 끝날 것 같았다. 몽골 동부 부족들도 일부 복속할 것이다.
그러나 건주여진이 망하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그 다음 목표로 설마 동해여진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현재 명나라가 자체 붕괴하는 길에 들어섰으므로 언젠가 건주여진이 명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여기서 이민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아시아의 운명이 결정된다.
“저번에 말씀하신 시베리아는요?”
“으음. 딱 거기까지만 늘릴까?”
영토를 늘리지 않겠다는 결심은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일어나겠다는 술꾼의 말과 비슷하게 신용할 수 없었다.
“웃지 마! 러시아의 동진을 막아야 하니까, 직접 지배하지 않더라도 현지 주민들에게 힘을 좀 실어줘야지.”
“저 안 웃었어요.”
그러나 민영과는 눈빛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다음 날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여객선에 타고 북미로 떠났다. 건강 검진을 해서 몸이 약한 몇몇 가족만 비베이로의 수용소에 남았다. 남은 이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여객선에 타려면 다음 여객선이 올 때까지 잘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해야 했다.
개 주인 꼬마는 이민호가 새강릉 시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떠났다. 거대한 아이리시울프하운드로 인해 경비견도 사냥개도 아닌 탐험견이라는 새 품종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검술교사 세 가족과 그 제자들도 같은 여객선을 타고 떠났다. 군인이 허구한 날 전쟁만 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시간을 평화로운 임무에 투입되는 만큼, 현재 유럽의 추세를 따라 펜싱에도 신경 쓰기로 했다. 물론 기병도를 무기로 하는 전투용 검술이 더 중요했다.
다음 날 아침 비베이로에서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송을 받으며 함대가 출항했다. 머스킷을 운반하는 에스파냐 밀수선을 예인하다가 새벽에 아일랜드 남쪽 해상에서 풀어주고, 함대는 오전에 더블린에 입항했다.
에스파냐가 아르마다와 12사도 등 대규모 함대를 보낼 때마다 잉글랜드 근해에 폭풍이 몰아쳤고, 그때마다 함대를 크게 말아먹었다. 그러나 켈트 신화의 바다신이 고산국 함대를 좋게 봤는지 갈 때마다 항상 날씨가 좋았다.
더블린 시내에는 작년에 왔을 때에 비해 불에 타거나 무너진 집이 눈에 많이 띄었다. 더블린을 포위했던 아일랜드 독립군은 잠시 물러났다고 한다. 시내 전체에 패잔병 행색의 잉글랜드 군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일랜드의 반란군의 지도자는 타이론 백작 휴 오닐과 오도넬 씨족장 겸 베네갈의 왕, 휴 로 오도넬이었다. 둘은 9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동맹으로서, 북부 얼스터에서 아주 잘 싸우고 있었다.
“쯧쯧! 완전히 거지꼴이군.”
국왕좌승함에서 지켜본 이민호가 혀를 찼다. 한 눈에 봐도 잉글랜드 군의 보급 사정은 좋지 못했다. 병사들은 누더기를 입었고, 담요도 없이 노숙을 해서 얼굴에 버짐이 잔뜩 피었다.
흑사병이라도 옮을까봐 함대에 명령을 내려 병력이 더블린에 상륙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다. 함대 소속 전 함선은 부두에 정박하지 않고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렸다. 쥐가 밧줄을 타고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설치한 쥐마개도 철저히 확인했다.
잉글랜드 군에는 화약도 부족했지만 잉글랜드 본토에서 새로 보급이 온다는 소식도 없었다. 그나마 잉글랜드 병사들이 굶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잉글랜드 본토에서 식량을 실어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주민 수용소에서 남는 식량을 징발한 덕택이었다.
“더블린 바깥은 식량 사정이 나은 편이기 때문에 수용소에 보관 중인 식량을 내줬습니다. 대신 고산국 배들이 좀 더 자유롭게 더블린에 입항할 수 있도록 에섹스 백작에게 양해를 얻었습니다.”
수용소 책임자이며 의사인 박 주부가 이민호에게 보고하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화가 난 이민호가 잉글랜드 군 주둔지를 포격하려는 것을 박 주부가 간신히 말렸다.
“전하! 이주민 수용소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양쪽의 인질입니다.”
“알았네.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나 불쌍한 자들을 철저히 이용해 먹는군.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인데 말이야.”
“전쟁 중에는 모든 것이 절실합니다. 식량을 내주지 않았다면 잉글랜드 군이 수용소에 거주하는 아일랜드인들을 학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난민의 식량을 빼앗아먹는 건 너무했어!”
이민호가 화를 가라앉힐 때까지 한참 기다린 다음 박 주부가 입을 열었다. 이민호는 더블린이 아닌 아일랜드 남서부에 이민자 수용소를 건설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전하! 더블린에서 벗어나 아일랜드 독립군이 점령한 지역에 새로운 수용소를 세우실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잉글랜드 군 눈치 안 보면 훨씬 편할 것 같은데.”
“아일랜드 군이 현재는 병력이 우세하나 잉글랜드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클란(clann)이라 부르는 씨족 공동체 중심으로 아일랜드의 모든 것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아일랜드에서는 8세기부터 시행된 브레혼 법에 의해 가부장제가 확립되고 씨족장이 클란 구성원들과 그 재산, 특히 토지를 보호할 책무를 졌다. 이 클란 제도가 17세기까지 아일랜드 사회의 기초를 형성했다.
그러나 1603년 9년 전쟁이 아일랜드의 패배로 끝나면서 몇몇 씨족장들이 런던탑에 끌려가서 죽는다. 그리고 나머지 씨족장들이 유럽 가톨릭 국가들로 망명하는 ‘백작들의 도주’ 사건이 발생하면서 클란 제도는 일단 무너진다.
클란이 명목상 같은 조상을 둔 씨족이라고 하나, 순수하게 혈연만으로 연결된 집단은 아니었다. 입양과 양자 제도를 통해 현대 회사들처럼 클란들끼리 전략적으로 얼마든지 합병과 분열이 가능했다.
“잉글랜드가 몇몇 씨족장만 잘 구워삶아서 아일랜드 독립군을 분열시킬 수만 있다면 반란은 금방 진압될 것입니다. 실제로 잉글랜드 장교들이 그런 건의를 에섹스 백작에게 하고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 되겠나?”
“잉글랜드를 상대로 가장 큰 군사적 성공을 거둔 북부 지방에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부 얼스터는 남부 문스터보다 훨씬 복잡한 정치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1541년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에 아일랜드 왕국을 세우면서 지방의 씨족장들에게 잉글랜드식 귀족 작위를 나눠줬다. 북부의 타이론 백작이나 나중에 토몬드 백작이 되는 인치퀸 남작 같은 작위들이었다.
9년 전쟁 중 아일랜드 씨족의 분열과 대립은 백작들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 전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씨족장과 다른 사람을 백작에 임명함으로써 내부 분열을 노리기도 했고, 일부는 성공했다.
“혐오감이 드십니까?”
“혐오감이 안 들면 이상하지 않나? 적과 내통하는 민족반역자들인데.”
권력과 토지가 탐이 나더라도 외국과 싸우는 동안에는 내부 분열로 보일만한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몇몇 씨족장이나 백작들은 욕심을 억제하지 못했고, 결국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