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583화 (532/1,000)

00583  61. 대서양  =========================================================================

아일랜드 해방군 전령이 국왕좌승함에서 내려 작은 배를 타고 떠났다. 전령이 탄 배는 전체에 검은 천을 덮고 선원들도 모두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국왕좌승함에서 떨어져 노를 서너 번 젓자 감쪽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군함의 위장색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밤에는 상관없고, 낮에 항해할 때를 기준으로 잡아서 함장이 색깔을 정해보게.”

“바다처럼 청색에서 진한 녹색 사이로 현측을 칠하면 시인성이 떨어져 위장 효과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서 문제지. 단정에 칠해서 직접 시험해보면 알 거야.”

함장에게 숙제를 남겨두고 이민호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북미 이민 외에도 아일랜드 해방군과 주민들을 도와주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주인님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해주시네요.”

“아닌데?”

아일랜드와 한국의 공통점이 참 많았다. 강한 이웃나라를 둔 탓에 줄기차게 침략을 당하고 끝내 남북으로 분단됐다.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

슬픔을 승화시키고 가끔 화끈하다는 점에서 한국인과 아일랜드인은 많이 닮았다. 그러나 이민호에게 아일랜드에 사는 아일랜드인들은 그저 외국인들에 불과했다.

“북미로 이주한 내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고향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뿐이야.”

“북미 이주민들이 주인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 아일랜드를 지원해줄 시간에 차라리 민영이를 한 번 더 안는 게 낫겠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내부 분열로 인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 만큼 지금 하는 일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북미로 이주한 아일랜드 사람들을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일랜드에 지원하는 물품은 머스킷과 식량에 국한되지 않았다. 단검이나 화살촉 같은 보조무기나 농기구와 각종 생활필수품, 비누와 치약까지 아일랜드로 향하는 수송선에 실렸다. 이번에 흑맥주 양조장을 세우기로 했으므로 필요한 원료인 보리도 당분간 보내주기로 했다.

돈 주고 아일랜드 사람들을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아주 가끔 흑인노예를 싸게 대량으로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므부투가 아프리카에 나라를 세운 다음 희망자에 한해 정식으로 이민을 받기로 했으므로 꾹 참았다. 흑인들 중에 스포츠와 음악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을 정착시킬 도시와 농경지도 북미에 준비하고 있었다. 흑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중산층으로 북미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럴 시간에 불쌍한 사람들을 조금 더 도와주세요.”

“정말?”

“정말이에요. 저는 그 시간에 호순이하고 놀게요.”

아기 고양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눈 위에 줄무늬가 있고 귀 끝이 검은색이라 집고양이는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아기 고양이는 삵보다는 스라소니를 닮았다.

“이 고양이 품종이 카라칼이라고 했지? 무슨 뜻일까?”

“여진어로는 검은 귀에요. 하지만 머나먼 예루살렘에서 설마 여진어와 같은 뜻으로 쓰이지는 않았겠지요?”

카라칼은 터키어로 검은 귀라는 뜻이었다. 투르크 계통인 돌궐족이 여진족과 비슷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조선에서 검은 말을 가리키는 가라말은 몽골어에서 온 말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살던 여러 인종들의 근원을 찾아 시대를 올라가면 같은 조상을 뒀을지도 몰랐다. 언어는 혈통보다 더욱 쉽게 전파됐다.

“이놈을 키우려면 궁궐 정원에 새를 풀어놓고 키우기 어렵겠다.”

“그런 문제가 있겠네요. 아직 어린 주제에 높은 곳에 너무 잘 올라가요. 나무도 잘 탈 거여요.”

“어린놈을 버릴 수 없으니 할 수 없지.”

사람들을 북미와 호주로 이주 보내면서 허가 없는 동식물의 대륙 이동을 금지시켰다. 불교도들의 방생 의식 때 풀어주는 수생 생물은 현지에서 잡힌 물고기나 자라로 제한시켰다.

새장에서 키우더라도 새는 무조건 다른 대륙으로 못 가져가게 했다. 새를 많이 기르는 명나라 출신자들 사이에서 반발이 심했지만 생태계 교란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개와 고양이로 한정된 애완동물이었다.

“고양이 한 종류에도 그렇게 많은 품종이 있는 줄을 몰랐어요.”

“나중에는 적당히 섞이겠지. 새로운 품종이 나올 수도 있고.”

궁궐에 있다 보면 외국 상인들이 갖가지 토산품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이하게 생긴 개나 고양이를 진상하는 경우도 흔했다. 아직 자식이 없는 후궁들이 한두 마리씩 키우곤 했다. 의사와 치과의사, 마의에 이어 수의사도 궁궐에 상주하게 됐다.

“캬앙~”

“그놈 참 앙칼지네.”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아기 고양이가 발톱을 세워서 얼른 손을 뒤로 뺐다. 아기 고양이는 확실히 민영을 엄마로 인식하는 듯했다.

더블린에서 며칠 기다렸더니 여객선과 곡물 수송선들이 입항했다. 아일랜드 이주민을 태울 여객선은 곡물 수송선들과 선단을 이뤄 함께 다녔다.

고산국 배를 털려는 겁 없는 유럽 해적은 없었으나, 풍랑이나 암초에 부딪쳐 조난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안전 조치였다. 특히 아일랜드 서부 해안은 최악의 암초지대로서, 무적함대 소속 군함 수십 척이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서 난파했다.

수송선은 모두 합쳐 열두 척이었는데 절반은 곡물 판매를 위해 바다 건너 리버풀로 향했다. 곡물 절반을 잉글랜드에 팔면 아일랜드에 무료로 곡물을 지원하고 수송비용까지 떨어져 손해를 안 볼 수 있었다.

이 시대에 유럽에서 곡물을 가장 비싼 값에 사주는 나라가 잉글랜드였다. 모직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농지를 목초지로 바꿔 양을 치느라 잉글랜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여객선에 탈 이주민을 고르기 위해 이주민 수용소에서 리버 댄스 축제가 열렸다. 이민호도 수용소 시찰 겸 상륙해서 축제를 관람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 동안 다들 잘 먹어서 체력이 향상된 탓에 작년과 달리 춤출 때 비장미가 사라졌다. 그러나 훨씬 강렬하고 활달한, 본래의 춤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춤출 때 악단이 음악을 연주해서 더욱 흥겨운 축제가 되었다.

“원래 힘이 넘치는 춤이었구나. 보기 좋다.”

“다들 즐거워해서 다행이에요.”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서 생존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종의 체력 시험이었으므로 참가자 대부분이 합격했다. 구태여 우승자를 가릴 필요가 없는데도 박 주부는 굳이 1, 2, 3등을 선발해 상금을 나눠주었다. 출전 선수이자 관객인 아일랜드 사람들이 우승팀의 화려한 춤을 다시 보면서 환호를 보냈다.

“의상도 다양해졌네.”

“이 동네 처녀들은 남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치마 속을 보여주는군요.”

“좋은 풍습이야.”

고산국에서 식량과 의류 지원을 대규모로 해줬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직도 가난해서 비싼 스타킹 종류의 옷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춤을 추면서 맨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이민호 같은 남자들이 아주 즐거워했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고기를 구워서 나눠주고 어른들에게는 맥주를, 아이들에게는 솜사탕과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시험이 축제로 승화되면서 고향을 떠나 북미로 이주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서 불안감을 날려버리는 효과를 봤다.

이틀 후에 여객선이 출항했다. 떠나는 사람들과 아일랜드에 남은 사람들이 손수건을 흔들며 눈물로 헤어졌다.

아일랜드 해방군이 분명한 젊은이들도 더블린 부두에 나와서 가족과 작별을 나눴으나, 잉글랜드 병사들은 알고도 모른 척했다. 에섹스 백작 독단으로 휴전협상과 평화조약을 진행하는 동안 더블린 인근에서는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가자.”

전쟁 중에도 이민이 차질 없이 진행돼서 다행이었다. 다만 이민자 숫자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에는 이주민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함대는 콘월 지방을 돌아서 플리머스 앞바다를 지났다. 잉글랜드 군함 몇 척이 황급히 나오다가, 고산국 깃발을 확인하고 더 빠른 속도로 항구로 도주했다. 플리머스처럼 잉글랜드 해군의 군항인 포츠머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잉글랜드 군함들이 상갑판에 빨간 칠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사상자 숫자를 감추려고. 다른 색이었다가 갑판이 피바다가 되면 상대방 군함에서 더욱 치열하게 공격할 것 아냐?”

이민호가 대답하자 국왕좌승함 함장이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갑판을 붉게 칠하는 것은 고산국 해군은 물론 조선 수군에서도 상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군함을 쉽게 침몰시키지 못해 승조원 하나하나를 일일이 죽여야 하는 해전이라서 그렇군요.”

“우리나 조선이나 적선을 격침시키고 분멸하면 끝나는데 저들은 그게 아니거든. 그건 그렇고 위장도색은 어떻게 됐나?”

“예상과 달리 바다 색깔로 칠하면 눈에 더 잘 띕니다.”

청색이나 녹색으로 군함을 칠할 경우 마침 바다 색깔과 같다면 문제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확연히 눈에 띄는 문제가 있었다. 해역에 따라, 또는 태양의 고도나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바다에서 군함이 눈에 띄지 않게 할 색상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적절한 위장색을 결정하는데 몇 십 년이나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함장이 며칠 동안 단정의 색깔을 바꿔가면서 시험한 다음 옅은 청회색을 골랐다. 현대 군함과 비슷한 색상이었으나 조금 달랐다. 오히려 현대 군용 항공기의 위장도색과 흡사한 색깔이었다.

이민호가 청회색으로 칠한 고속단정을 수평선으로 보냈다. 해군 함정끼리 서로를 발견해 전투준비에 들어가는 곳이 바로 수평선이었다. 그러나 청회색으로 칠해도 매의 눈길과 같은 견시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

“회색으로 칠하게.”

단정에 칠을 해야 하는 수병들 입장에서는 똥개 훈련한 셈이 됐지만 고산국 해군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실험이었다. 고속단정을 국왕좌승함에 끌어 올린 다음 수병들이 웃통을 벗고 다시 빠르게 칠을 했다.

단정을 다시 수평선으로 보냈다. 바다는 파란색으로 보이지만 햇빛에 반사되면서 수평선은 회색이 되고, 회색으로 칠한 단정은 발견하기 어렵게 됐다.

대기의 색깔 자체는 회색이었고, 긴 파장이 반사돼 하늘과 바다가 푸르게 보일 뿐이었다. 산수화에서 묘사하듯이 관측자와 사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채도가 떨어져 회색에 가까워지는 것도 이유였다. 회색은 거리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다.

“순양함의 깃대와 망루가 처음부터 회색으로 칠해진 이유였습니까?”

“맞아. 며칠간 시험 끝에 회색을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끝까지 청색을 섞어 넣은 게 함장의 패착이었어.”

“반성하겠습니다.”

함장 외에 함교에서 근무하는 장교와 부사관들은 그때서야 깃대와 망루의 색깔을 확인했다. 이민호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순양함을 회색으로 칠할 필요는 없었다. 현재 순양함을 비롯한 고산국 군함들은 검은색이었는데, 목선이라 판재 틈을 방수처리하기 위해 타르를 칠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철선이 주력선이 된다면 함 전체를 회색으로 도색할 예정이었다.

함대는 작년처럼 암스테르담 서쪽 작은 항구, 에이모이덴에서 하룻밤 정박할 계획으로 입항했다. 프랑스 북부 해안과 북해 연안의 항구도시들은 죄다 강 하구에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는 바로 그 백사장이나 항구로 개발할 수 없는 해안절벽이 노르망디에서 덴마크까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작년처럼 이번에도 육지로 둘러싸인 암스테르담에 직접 입항하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전쟁 중인 네덜란드로부터 언제든 공격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했기 때문이다.

“동쪽에서 거대한 흙먼지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항구에서 에이모이덴의 상인들과 거래를 시작하려는 순간 견시가 경고를 발했다. 입항한 직후부터 암스테르담 쪽에서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나 점차 에이모이덴으로 다가왔다.

마치 북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해 도시 전체를 뒤덮는 모래폭풍 같았다. 그러나 흙먼지 바람의 정체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견시의 경고에 이어 함장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비상! 대규모 기병의 공격입니다!”

“전투 준비!”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