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9 62. 덴마크와 발트 해 =========================================================================
“폴란드에 그런 약점이 있었구려. 그래도 인구가 열 배 차이인데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비슷하다니, 그게 가능한 이야기요?”
“스웨덴은 중앙집권화 된 정부에서 자유민 소작농에게 군역을 부과할 수 있어요. 귀족들의 권한이 강한 폴란드보다 훨씬 빨리 병력을 소집할 거여요.”
“외국군이 침공하고 있는데 귀족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다가 망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지요.”
“맞아요. 헝가리도 그렇게 망했어요.”
폴란드에서는 새로 왕이 선출될 때마다 귀족들이 들이미는 협정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하나는 국왕이 바뀔 때마다 세부 항목이 달라지고, 하나는 일반적인 왕권 제한 사항을 담은 ‘헨리크의 조항’이었다.
공화국이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폴란드 국왕의 권리를 극도로 제한하고 국정에 관련된 대부분의 권리를 세임, 즉 의회에 넘기는 협정에 사인을 해야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귀족들이 합법적인 반란을 일으킬 권리까지 보장한, 국왕 입장에서는 극도로 불평등한 협정이었다.
폴란드의 상황을 잘 몰랐거나, 혹은 국왕에 즉위하기 위해 나중에 폴란드가 어떻게 되든 말든 그 협정에 사인한 사람이 폴란드 국왕 헨리크였다. 그때 마침 헨리크의 형이며 프랑스 국왕인 샤를 9세가 죽는 바람에 즉위한지 넉 달도 안 돼서 폴란드 왕좌를 버리고 도망쳐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로 즉위했다.
분노한 폴란드 귀족과 민중들이 왕을 붙잡으려고 추격했으나 왕은 이미 국경을 넘어가 프랑스 왕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지 않고 공위기간이 길어지면서 폴란드에서 혼란이 가중되자 결국 새로 국왕을 뽑게 되었다.
“나는 스웨덴이 루스 차르국을 공격하길 바랐는데 말이오.”
“가만 내버려둬도 스웨덴은 장기적으로 반드시 루스 차르국을 공격할 거여요. 하지만 스웨덴은 그 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승부를 먼저 봐야 해요. 그리고 만약 폴란드가 단독으로 루스 차르국을 친다면 스웨덴은 반드시 루스 차르국을 도와줄 거여요.”
“웬만하면 다들 친하게 지내지 이게 뭐요. 사방에 적을 두고 적들끼리 연합하면 될 일이 없소. 적은 하나만 만들어서 집중 공격해야 하오.”
스웨덴은 덴마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그리고 루스 차르국과 최근에 전쟁을 벌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과 오스만 제국 및 러시아계의 나라들과 오래도록 싸웠으며, 조만간 루스 차르국 방향으로 영토를 넓혀 나간다.
사방에 적을 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한 방향으로 제대로 전력을 집중할 수 없듯이, 폴란드-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이들 나라 모두가 스스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 자충수를 둔 셈이었다.
“전략적으로는 폐하 말씀이 맞겠지만, 상황이 그리 되나요? 그래서 갈수록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같아요. 덴마크도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을 지키려고 네덜란드와 관계가 나쁘고, 칼마르 동맹이 무너진 다음에는 스웨덴과 계속 싸웠어요. 덴마크는 심지어 뚝 떨어진 폴란드하고도 사이가 나빠요.”
“주변국들마다 싸운다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셈이오.”
“그만큼 역사적으로 이익이 충돌한 적이 많았으니까요.”
공주와 한참 대화하고 있는데 옆에서 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호가 눈길로 묻자 함장이 보고했다.
“전하! 함포사격 실시를 마쳤습니다.”
“어? 저게 뭐야!”
단치히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단치히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가지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정도의 장면을 기대했던 이민호는 경악하고 말았다. 시뻘건 불길이 단치히 시가지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함대의 대 지상 함포사격 10분이란 게 좀 무서웠다. 지속적인 포격이라 1분에 겨우 한 발씩 쐈을 뿐인데 함대가 한 바퀴 돌아 나왔던 뮈니스카 섬과 강 남쪽 구도심이 완전 초토화됐다. 몇 십 년 전에 세워진 조선소가 통째로 불탔고 벽돌 고딕 건축 양식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는 성 마리아 성당도 일부가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다.
함대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5인치 함포탄 480발, 3인치 함포탄은 수송선에서 쏜 것까지 합해 천여 발을 쏟아 부었다. 게다가 전대별로 구역을 나눠서 함포 사격을 실시하는 바람에 단치히 시가지에서 무사한 곳이 없었다. 특히 폴란드군이 매복했던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가 됐다.
단치히 시가지에 목조 가옥 외에도 벽돌로 지은 주택이 많지만 나무판자를 이어서 올린 지붕 탓에 화재가 번지기 쉬웠다. 그리고 3층에서 5층 건물들이 빈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화재 피해를 예상보다 훨씬 더 키웠다. 골목길도 너무 좁아 거센 불길이 허공을 넘어 다니며 화재를 확산시켰다.
멀어서 시민인지 폴란드군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화재를 피해 도시 밖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강이나 운하로 뛰어들기도 했다. 포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화재로부터 구하기 위해 작은 배들이 끊임없이 강이나 운하를 왕복했다.
“단치히가 없어지겠어요, 폐하. 발트 해 연안의 곡물가가 폭등하겠어요.”
“공주는 경제적 영향 분석이 참으로 빠르오. 나는 그저 경고 삼아 포격을 할 셈이었는데 단치히를 없애버린 악당으로 역사에 남게 생겼소.”
“선제공격을 당한 폐하의 함대가 단치히에 보복한 것은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에요.”
어이가 없어 단치히를 지켜보는데 공주가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다. 그러나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폐하께서 물론 도덕적 비난은 받겠지만 이로 인해 달라질 것은 없어요. 어떻게 보면 보복도 아니에요. 폐하를 공격한 폴란드군이 단치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시민들이 피난 갈 시간이라도 줄 걸 그랬소.”
침울한 표정을 짓는 이민호를 민영이 감싸 안았다.
“주인님이 일본의 해안 도시에 포격을 지시할 때는 영주의 성이나 군사시설 위주로 직접 공격하고 민가에는 불만 질렀어요. 하지만 여기 단치히 안에는 공주님 말씀대로 시가지에 적이 잔뜩 있었어요.”
“그래도.”
“함포사격은 어쩔 수 없는, 아니 당연한 군사작전이었어요. 그리고 폴란드군이 단치히에 매복하는 동안 대부분 시민들은 이미 피난 갔을 거여요.”
“정말?”
“주인님! 단치히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본 적이 있어요?”
확실히 민영이 눈썰미가 좋았다. 이민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시청 관리들과 상인, 그리고 부두 노무자들 외에 단치히 안에서 민간인을 거의 못 봤다. 양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 귀부인도 못 봤고 아이들이 강아지와 함께 뛰어 노는 흔한 장면도 단치히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민영은 민간인들이 시내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을 의심해서 이민호가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직전에 포성이 울리고 국왕좌승함이 단치히에서 탈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민호에게 미처 보고하지 못했다.
민영의 말이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민간인들은 전투 전에 이미 단치히 바깥으로 소개됐거나 각자 알아서 미리 몸을 피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여인이 불타며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에 깔려 죽는 그런 비극적인 장면은 단치히에서 연출되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이민호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맞아. 하지만 부두에 상인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았어.”
“그 사람들은 요청이든 강요든 폴란드군의 지시에 따랐을 테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무리 도시가 불바다가 됐더라도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훨씬 많을 거여요. 심지어 우릴 공격한 폴란드군도요.”
유럽 국가들이 전쟁을 하면서 성을 향해 대포를 쏠 때 민간인의 존재 여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위력이 약해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병력이 밀집한 성벽을 대포로 직접 공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의 함포는 위력이 너무 강해서 민간인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다음부터는 함부로 도시에 포격을 가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전하! 적 기병이 출현했습니다. 포격을 합니까?”
함장이 비스와 강의 옛날 하구 남쪽을 가리켰다. 강 건너 들판에 후사르 기병 수천 기가 단치히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붉고 흰 깃발 수천 개가 나부껴서 눈이 어지러웠다.
“폐하! 저기 폴란드 야전 헤트만 주키에프스키의 군기에요.”
함장과 헤드비히 공주가 다급히 말하는 중에 이민호는 망원경을 들어 윙드 후사르라 불리는 폴란드 후사르를 살폈다. 듣던 대로 경기병이 아니라 철갑으로 중무장하고 쇠투구를 썼다.
그러나 기병들의 등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폴란드 기병들이 새 날개 같은 깃털 모양 장식을 등 뒤에 붙이지 않았다.
“실망이야.”
“뭐가 말씀입니까? 적 기병은 8천으로 추산됩니다.”
군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단치히 남동쪽 들판에 등장한 기병들의 지휘관은 폴란드 야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였다. 현재 폴란드 대 헤트만은 얀 자모이스키였다. 리투아니아 대 헤트만은 크지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맡았고 리투아니아 야전 헤트만은 1589년부터 현재까지 공석이었다.
폴란드 대 헤트만 얀 자모이스키는 국왕 스테판 바토리를 총리로서 돕고 군 지휘관으로서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1581년부터 대 헤트만에 올랐다. 시기스문드 3세의 즉위에도 공을 세웠으나 국왕은 합스부르크가와 협력하길 원했고 극렬한 가톨릭으로서 신교도들을 핍박했다.
반면에 얀 자모이스키는 반 합스부르크 성향이 강하며 종교에 관대한 편이라 사사건건 국왕과 충돌했다. 시기스문드가 1592년 폴란드 국왕 자리를 합스부르크가에 넘기고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는 폐위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뒤에 절반은 빈 말이야.”
“아! 설마 몽골처럼 말을 교대시켜가면서 계속 공격하는 방식입니까?”
“그렇지. 함포 사격 개시.”
단치히 방향으로 급히 달려가던 폴란드 기병 대열에 포탄이 대량으로 떨어졌다. 함대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설마 이 거리에서 포탄이 날아올 줄 몰랐던 기병들은 밀집대형 상태에서 불벼락을 맞았다.
포탄은 이 시대에 흔히 사용된 둥그런 쇳덩이나 포도탄이 아니라 파편을 비산시키는 작열탄이었다. 포탄이 한 발 터질 때마다 기병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말에서 떨어져 말과 함께 나뒹굴었다.
- 빰빠밤빠빰빠 빰빠빰빠바~
뷰글 소리가 멀리 퍼지며 폴란드 기병들이 바다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나 함포 사거리가 길어서 기병들을 계속 쫓아다니면서 포탄이 작렬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기병들이 언덕 뒤에 숨고서야 포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기병 천여 기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전하! 백기입니다!”
“뭐야?”
단치히에서 공격받은 이후 폴란드는 이미 고산국의 적국으로 간주됐다. 후사르를 잡기 위해 병력을 상륙시키려고 준비하는데 폴란드 기병들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던 백기가 올랐다. 그러나 폴란드군이 반드시 항복한다는 보장은 없었고, 단순히 대화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역시나 백기를 달고 온 기병 세 명이 말을 탄 채로 강을 건너더니 함대에서 약간 떨어진 곳, 머스킷의 사거리 바깥에서 멈췄다. 누굴 보내 교섭을 시키나 고민하는데 계복이 국왕좌승함으로 직접 찾아왔다.
“도련님. 제가 가보겠습니다.”
“계복아! 그냥 참모를 보내. 위험하게 사령관이 가는 게 아냐.”
“아군 보병총 사거리 이내라서 위험할 일은 없습니다.”
“골치 아픈 상륙작전을 지휘하기 싫어서 그러지?”
“헤헤! 가겠습니다.”
폴란드군에서는 야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의 오보즈니, 즉 숙영지 관리관 및 보급참모가 대표로 나섰다. 그리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교 두 명이 말을 타고 오보즈니의 옆에 섰다. 계복은 통신기를 등에 짊어진 통역관과 호위장교를 데리고 말을 타고 갔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주면 고맙지. 기병연대와 장갑차대대, 구르카여단까지 죄다 상륙시켜!”
단치히와 옛 비스와 강 하구 사이 해안에 지상군 전체 병력을 상륙시켰다. 파도가 치는 백사장에 닿은 상륙함의 앞문이 열리고 장갑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송선 여러 척에서 기병들이 말을 타고 얕은 물에 연속 뛰어들었다. 아직 상륙 주정을 만들지 않아 구르카 용병들도 허리까지 잠기는 바닷물을 헤치며 해안에 상륙했다.
겨우 3천기 남은 후사르를 잡기 위해 지상군 전체를 상륙시키는 것은 과도한 감이 들었다. 그러나 300기로 오스만 제국 기병 15,000명에게 돌격해서 승리하고 주변 여러 나라들과 싸울 때마다 몇 배나 많은 기병 또는 보병을 향해 돌격해 승리를 거둔 자들이 후사르였다. 괜히 적당히 내보냈다가 설마 지지야 않겠지만 큰 인명피해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동쪽 끝의 강폭이 가장 좁은데, 너무 좁군.”
고산국 지상군이 상륙한 곳은 강과 운하로 내륙에서 분리된 섬이었다. 그래서 앞문과 뒷문이 열리고 배 앞뒤로 길이 연결된 교량 대용 수송선을 비스와 강의 옛 하구에 밀어 넣었다.
옛날 비스와 강 하구와 단치히로 이어지는 물길이 합류하는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진 작은 요새가 반쯤 무너져 있었다. 해병들이 상륙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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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르가 등장하긴 했습니다만...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