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01 62. 덴마크와 발트 해 =========================================================================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신께 맹세합니다.”
“진술하라.”
시의원은 오전에 단치히 민병대원 복장을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일어난 사건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들이 무역선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와서 막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시가지와 시청을 장악하고 시의원들을 시청 건물 지하에 감금했다. 이 과정에서 몇 안 되는 진짜 민병대원들이 그들을 저지하려다가 사살 당했다. 그런데 시에서 고용한 군사력의 핵심인 용병들이 짐을 싸더니 배를 타고 단치히를 떠났다고 한다.
“용병들이 적에게 매수됐나 보군.”
“용병들은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까지 싸울 의무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적으로 돌변해 계약 고용주에게 총구를 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들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봅니다.”
용병에 대해 아주 나쁜 관점을 가진 이민호였지만, 이 시대의 관행을 꾸짖지는 않았다. 고산국에서도 구르카 용병을 1개 여단이나 고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을 정벌하고 지금은 북미에서 활동하는 여진 기병대는 국가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서 사실 정규군보다는 용병에 더 가까웠다. 여진 기병의 2세대는 고산국식 교육을 받아 기성세대보다 충성심이 강한 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여진족 기병과 가족 모두가 북미를 고향으로 여길 것으로 기대했다.
“해안 요새와 강 하구, 그리고 운하 입구에 있는 요새의 방어는 어느 쪽이 맡았나?”
“요새에 대포가 많이 배치돼 있어서 대포 기술자들이 포함된 용병 부대가 방어를 책임졌습니다. 세 곳 모두 동일한 용병 부대입니다.”
“그 용병들이 적과 내통했더군.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는 척하더니 중요한 순간에 우리 함선에 먼저 공격을 가했어. 요새 세 곳 모두가! 설마 수백 명이 지키던 요새가 적에게 함락됐다고 우기진 않겠지?”
시의원의 표정이 단번에 썩어 들어갔다. 그리고 야전 헤트만도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어떻든 고산국 함대에 대한 용병들의 적대행위는 그들의 고용주인 단치히 시의 적대행위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치히가 파괴된 책임을 조금이라도 고산국 함대에게 물을 수 없었다.
“역시 용병은 믿을 수 없어. 찢어지게 가난해서 전황이 불리해도 도망치지 못하는 스위스 용병이라면 몰라도.”
“그렇습니다, 폐하. 하오나 시민들을 모아서 무장시켜 봤자 오합지졸밖에 안 됩니다. 용병은 전투의 전문가들입니다.”
“용병 대신 그 도시 출신들을 직업 군인으로 키우면 되잖은가?”
“비용 문제가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 싸게 먹힙니다.”
“시의회 의원들과 용병 부대 사이에 유착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그런 의혹을 가끔 받았습니다.”
북방의 강자 덴마크는 현재 의욕적으로 군제 개편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계몽군주라는 크리스티안 4세는 용병을 국가 군사력의 핵심에 두고 징집병을 보조부대로 편성했다. 이 시대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거기 탈린 상인! 탈린에서도 용병을 고용하나?”
“아닙니다, 폐하. 시민들 중에서 성인 남자 전원이 민병대원으로 등록해서 교대로 경계 근무를 섭니다. 시민으로서 전업 병사로 고용되는 자들도 소수 있습니다.”
탈린은 발트 해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한자 동맹 도시였다. 용병들이 가기 싫어하는 추운 곳이라서 용병 대신 시민들이 돌아가면서 5미터 높이의 성벽과 성문을 지켰다.
탈린 시청 건물 꼭대기에는 ‘늙은 토마스’라 불리는 병사 모양의 풍향계가 지금도 돌아가고 있었다. 토마스는 석궁 쏘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으나 신분이 낮아 상을 타지 못하고, 그 대신 종신 직업군인이 된 자였다. 토마스는 시청 광장에서 근무를 서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곤 했는데 어느 날 노환으로 별세했다.
자꾸 토마스를 찾는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개념을 설명해주길 꺼리던 시민들이 토마스가 생전에 근무하던 모습으로 1530년에 시청 풍향계를 만들었다. 토마스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어른들은 토마스가 아이들의 행적을 지켜보다가 착한 일을 하면 베개 밑에 사탕을 놓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사실상 협박이었다.
“시의원은 어떻게 탈출했나?”
“뭔가 터지는 소리가 연속 나면서 저희들이 감금된 시청 지하실 벽이 무너졌습니다. 마침 지키는 자들이 없어서 시의원들이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배를 노 저어서 나온 다음 뿔뿔이 흩어졌는데 제가 운이 좋아 기병대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시의원들이 전원 무사하다니 다행일세 그려. 시내에서 민간인 피해는 없던가?”
“저희들이 감금되는 사이 다들 피난을 떠나서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재건하려면 몇 십 년 걸릴 것 같습니다.”
정체불명의 병사들이 단치히를 장악한 다음 고산국 함대를 공격한 사실이 이렇게 밝혀졌다. 그리고 그 병사들은 프로이센 군인들임을 탈린 상인들을 통해 파악됐다. 그러나 좀 더 확인이 필요했다.
“폐하! 제가 저들에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야전 헤트만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라서 눈빛만으로도 노련한 상인 출신 시의원이 겁에 질렸다.
“폴란드의 야전 헤트만으로서 그단스크 시의원에게 질문하겠다.”
“하명해주십시오.”
“정체불명의 병사라는 것들의 인종이 뭔가? 아니, 어떤 언어를 사용했지?”
“저희 그단스크 상인들과 같은 독일인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는 저희들과 달리 독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단스크 출신은 아니라는 거군. 솔직한 대답에 감사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 그단스크 상인들도 폴란드 국왕의 신민입니다.”
야전 헤트만은 고산국 함대를 공격했다가 포로로 잡힌 폴란드 해군 장교에게도 질문했다.
“내 명령서를 받았다고? 위조된 것이겠지만.”
“그렇습니다. 해군 법무장교가 폴란드 야전 헤트만의 서명이 틀림없다고 확인했습니다.”
“헤트만은 해군을 지휘하지 못하게 법적으로 규정돼 있다.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희 해군은 지상군을 지원해주기 위해 독자적으로 판단해 공격에 나섰습니다.”
해군 장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헤트만에게 발언 기회를 청했다. 야전 헤트만이 허락하자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그 법무장교는 부임한지 한 달도 안 됐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 출신 독일인입니다.”
“공교롭지만 우연일 수도 있지. 법원에 조사를 의뢰해보겠네.”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패전에 대한 책임회피는 아닙니다.”
결론은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프로이센에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 단계에서 무작정 프로이센을 치러 가는 것도 무리였다. 야전 헤트만도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답답해진 이민호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후사르 기병대는 평원에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숙영지를 건설한 다음 지금은 기병 돌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기마 무리 한 떼가 저 멀리 앞에 적군 지휘부를 상정한 깃발이 세워진 곳을 향해 돌격했다.
기병이 저렇게 밀집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폴란드 기병들이 빽빽이 뭉쳐서 깃발 달린 창을 앞으로 하고 말의 발걸음도 정확히 맞춰서 달렸다. 말들 중에 한 마리라도 발걸음이 엇갈리면 수십 마리의 전마와 기병들이 한꺼번에 쓰러져 뒤엉키는 대형 사고가 날까봐 이민호가 더 조마조마했다. 구경하던 조선인 출신 기병은 물론 승마 실력이라면 한 수 높다고 자부하는 여진 기병까지 후사르의 집단 전법에 혀를 내둘렀다.
- 두두두두~
표적 위치를 표시하는 깃발 앞에서 움직이는 후사르는 사실 바람잡이였다. 뒤쪽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후사르들이 돌진하면서 대형을 갖췄다. 그리고 창날을 앞세우고 가상의 적진 앞에서 돌격하던 후사르 부대와 교차하며 동시에 깃발을 지나치는 순간, 고산국 기병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매번 하는 훈련일 뿐, 고산국 지상군이나 함대를 공격할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럴 의도도, 지금은 공격을 시도할 능력도 없었다.
후사르 기병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야전 헤트만이라는 고위 지휘관이 사라진 것에 있었다. 아직도 우르르 몰려다니거나 그저 뭉쳐서 싸워야 하는 주변 국가들의 군대와 달리 예하 부대들이 각기 세분된 임무를 수행하는 폴란드군에서 지휘관의 중요성이 특히 높았다.
“그런데 헤트만은 웬 일로 북부에 계시오? 스웨덴의 침공을 대비해 미리 북부에 주둔한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보통은 남쪽이나 동쪽 국경에 주둔합니다만, 헤트만은 군대가 주둔할 지역을 결정할 권한이 있습니다. 보통은 마음에 안 드는 영주가 있는 지역에 주둔합니다. 보급품을 영주가 제공해야 하니까요.”
반드시 특정 지역에 주둔하지 않고도 어느 도시 또는 영주에게 보급품 공출을 부담시킬지 결정할 권한이 헤트만에게 있었다. 만약 헤트만이 싫어하는 영주나 도시가 있다면 심각한 경제적 부담을 질 각오를 해야 했다.
“단치히가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오?”
“여기서 바로 남쪽도 프로이센 공작령의 영지입니다. 바르샤바에서 그단스크로 가는 길 중간 길게 튀어나온 프로이센 영지에 일부러 주둔지를 정했습니다.”
헤트만이 꾸준히 프로이센을 견제해왔다는 뜻이었다. 다른 영지라면 경제적 부담에 그치겠지만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헤트만에게 감시당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부담까지 져야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공작령 경계에서 서쪽을 가로막고 단치히에서 남동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온 영지가 국왕령 프로이센(Royal Prussia)이었다. 18세기 초부터 시작된 프로이센 왕국과 다른 폴란드 국왕의 직할 영지였다.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는 프로이센을 폴란드 국가 단위에서도 꾸준히 경계해왔다는 의미였다.
“폐하! 프로이센의 공작이든 섭정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프로이센이 폴란드와 고산국을 이간질시키면서 뭔가를 원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고산국과 폴란드가 힘을 합해 즉시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게 어떨는지요?”
야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단호하게 프로이센을 공동 정벌할 것을 이민호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리 헤트만의 권한이 강하다 해도 국왕과 세임의 동의나 명령 없이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월권이 아닌지 의심됐다.
“국왕이나 세임의 결정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오?”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폴란드 국왕폐하와 세임에 무한히 충성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음모를 꾸민 자들이 또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 다른 마수를 드러내기 전에 신속히 진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민호가 헤드비히 공주를 불렀다. 야전 헤트만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자 나온 대답이 꽤나 호의적이었다.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기사도의 전형이라 할 만큼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폴란드가 귀족 공화정이라지만 그는 항상 국왕의 편에 섰다.
“그리고 헤트만에게는 군사 문제에 한정된 외교 교섭권이 있습니다. 폴란드 영토가 너무 넓어서 허락 받기에는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기도 하면서 꽤나 위험한 권한이구려.”
“그래서 아무나 헤트만으로 임명되지 않습니다.”
헤트만들이 비록 선거로 선출된 국왕에게는 가끔 반역을 일으키더라도 폴란드 국가 자체에는 충성을 바치는 편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거리가 100km, 대략 20레구아 정도요.”
“보급품을 제대로 운반한다는 조건에서 후사르들이 이틀 동안 달려야 할 거리입니다, 폐하.”
조건이 달라진다면 후사르 기병대의 하루 주파 거리는 훨씬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경기병으로 활약하는 유럽 다른 지역 후사르와 달리 폴란드 후사르는 기본적으로 중기병에 가까웠다. 지상으로 이동한다면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가는 시간을 하루로 줄일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합시다. 쾨니히스베르크를 함께 칩시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폐하!”
폴란드 야전 헤트만이 아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국왕좌승함에서 나갔다. 이제는 동맹군이지 포로가 아니었다.
이민호는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대로라면 프로이센 공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프로이센 왕국의 군국주의 교육과 사민주의 경제제도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라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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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회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