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03화 (552/1,000)

00603  62. 덴마크와 발트 해  =========================================================================

“프로이센 공작령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는, 그저 희생양에 불과한 사절들을 들이밀었소.”

“첫 번째 사절이니까요. 분노한 폐하의 눈치를 살핀 다음 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기 위한 사전 절차일 수도 있어요. 이들이 쫓겨났으니 다음에는 실제 교섭 권한을 어느 정도 가진 사절이 오게 될 거여요.”

헤드비히 공주가 유럽에서 전쟁 중 교섭사절단이 하는 역할을 설명했다. 두 번째 사절단이 오더라도 충분한 사죄와 배상을 가급적 미루고 그저 시간을 끄는데 주력할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뒤에 오는 사절단일수록 권한이 컸고, 그래서 기다리다 보면 합의하는데 기본적으로 몇 달은 걸린다고 했다. 교섭이 진행되는 사이에 병력을 모아 반격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실질적인 교섭 권한을 가진 최후의 사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단치히가 사라진 만큼 음모를 꾸민 쾨니히스베르크도 똑같은 처지가 돼야 공평하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서 고산국 본토로 돌아가야 했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나는 쾨니히스베르크를 공격해야겠소.”

“폐하의 권리이니 뜻대로 하세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발트 해에서 교역이 가장 활발한 도시 셋 중 둘을 불태우는 거여요. 단치히에 이어 쾨니히스베르크를 불태우면 일 년에 100척 이상 입항하는 항구 도시는 리가 하나만 남아요.”

“한자 동맹 도시들이 경쟁 도시의 몰락을 기뻐할 것 같소. 단치히는 폴란드의 곡물 수출항이니까 폴란드 왕국에 의해 조만간 재건될 것이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는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다. 프로이센에 이를 갈고 있던 야전 헤트만이 독일인들의 공작령을 아예 없앨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부하들의 죽음에 항의하던 헤트만은 범인이 프로이센으로 드러나자 얼씨구나 하고 고산국에 붙어 함께 프로이센을 칠 것을 청했다.

함교로 나간 이민호가 통신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통신장교가 당황했지만 이민호는 통신기를 직접 조작하는 것이 편했다.

“총함장님. 언제든 함포 사격을 실시하십시오.”

- 알겠습니다, 전하. 총함장이다! 전 순양함은 목표 제1 구역에 화력을 집중한다. 함포 사격 개시!

쾨니히스베르크에는 크고 웅장한 석조 건물이 많아 총함장 이순신은 일부러 포격을 집중시켰다. 함포 사격 명령이 떨어지고, 곧이어 순양함 24척에서 동쪽을 향해 불길을 뿜어냈다.

쾨니히스베르크를 지키는 프로이센의 병력이 많을 것으로 판단해 민간인 피해는 무시하기로 했다. 하루에 도시 하나씩 파괴해야 하는 이민호 입장에서 속이 몹시 불편했으나, 그런 일을 당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번 쾨니히스베르크 작전에서 핵심은 지상군이 아닌 순양함들이었다. 상륙한 지상군은 그저 바람잡이 역할을 맡은 데 불과했다. 프로이센 공작령의 병력 전체를 도시 방어를 위해 도시에만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만약 프로이센군이 도시 바깥에 있다면 지상군이 전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민호는 웬만하면 전투를 회피하라고 계복에게 지시해놓았다. 이런 의미 없는 전투에서는 단 한 명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하! 도시가 불타고 있어요!”

헤드비히 공주가 몹시 흥분해서 이민호가 아예 전망이 좋은 관측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얼굴이 발갛게 물든 공주가 불타는 도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쾨니히스베르크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공작령의 종말이오.”

“고산국 함대는 너무 강해요.”

얼마 전까지 함포를 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던 공주가 이제는 포성과 진동에 익숙해졌다. 이민호는 헤드비히 공주가 불장난 좋아하는 오줌싸개가 되는 것은 아닐지 조금 걱정됐다.

“원뿔 모양의 높은 교회 첨탑이 무너졌어요. 저긴 어딘가요?”

“지도와 대조해보니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같소. 이제는 신교도의 교회로 사용되고 있었겠지요.”

함대에서 일제 사격을 할 때마다 포탄 128발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현대 포병들이 구사하는 TOT 사격만큼은 아니지만 화력이 집중되면서 거대한 건물들도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폐하! 혹시 본보기인가요?”

“전혀 아니요. 나는 평화롭게 교역을 하고 싶었을 뿐이오. 프로이센은 그저 폴란드의 공작령이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쾨니히스베르크에 사는 독일인 시민들에게는 안 됐지만 덴마크 서인도회사의 번성에 이번 일이 큰 역할을 해줄 거여요.”

프로이센 사람에게는 불행이겠지만 서인도회사가 든든한 뒷배를 얻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게 됐다. 동남아시아 바다에서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상선이 해적들로부터 안전하듯이, 대서양과 북해, 그리고 발트 해에서 덴마크 서인도회사의 상선을 건드릴 세력이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잘할 거라고 믿겠소.”

“맡겨주세요!”

요즘 헤드비히 공주는 이민호와 눈만 마주치면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라 공주가 떠올랐지만 발육 정도가 달라서 그런지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폐하의 시선이 머무른 곳을 만져도 좋아요.”

“만져주세요, 라고 하시오.”

“호호! 그런 말은 못해요.”

괜히 자존심 싸움할 필요 없었다. 헤드비히 공주는 정실 공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민호의 후궁이 되지 않고 아이슬란드 여왕이 된 당찬 여자였다. 침실에서는 철저히 길들이더라도 밖에서는 자존심을 살려주는 편이 좋았다.

공주와 입을 맞춘 다음 꼭 껴안았다. 이민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공주가 꽤나 귀여워 보였다.

- 쿠쿠쿵!

다시 일제 사격으로 인해 포성이 연속 울리고 배가 크게 뒤흔들렸다. 순양함에 탑재된 모든 함포를 동시에 발포하느라 측면 사격을 실시했기에 진동이 더 컸다.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의 면적은 단치히보다 좁았으나 함포사격은 더 오래 걸렸다. 벽돌로 만든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고 좁은 골목길과 지붕 탓에 쉽게 화재가 번지는 단치히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쾨니히스베르크에 세워진 건물은 큼직한 돌로 벽을 쌓고 시가지 구획 사이의 도로가 널찍널찍했기 때문에 집중된 강한 화력이 필요했다.

- 전하! 탐사선에서 보고입니다. 새로운 사절단이 탄 배가 통과했다고 합니다.

“빨리도 오네. 내려가겠다.”

이민호는 방송을 듣고 바로 함교로 내려갔다. 사절단이 탄 배에서 선원들이 죽어라 노를 저어 국왕좌승함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첫 사절단이 실패할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한 2차 사절단이었다.

이민호는 다시 알현실에 들어가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절단을 기다렸다. 잠시 후 얼굴이 허옇게 질린 노인을 필두로 세 명이 알현실에 들어왔다.

“고산국 국왕폐하! 당장 포격을 멈추지 않으면......”

“당장 나가! 어디서 협박이야?”

사절단으로 온 노인이 얼어붙었다. 그가 큰소리를 칠 때가 절대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고산국 함대의 포격은 이 시대 기준으로 상식에서 벗어났다. 시간을 끌수록 쾨니히스베르크가 파괴돼 갔다.

성곽도시를 포위 공격하는 공성전에서 보통은 방어자가 유리한 입장에 선다. 이 시대에 무거운 대포를 끌고 다니면서 야전이나 공성전에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609년에 시작된 스몰렌스크 공방전에서 공격자인 폴란드는 병력 22,000명에 대포 30문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 수비대는 병력이 5천 명에 불과했으나 대포는 200문이나 보유했다. 결국 폴란드군이 스몰렌스크를 함락하는데 2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포를 쏘아 강 안쪽 내륙에 위치한 쾨니히스베르크를 차근차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쾨니히스베르크뿐만 아니라 단치히도 똑같은 공격에 저항도 못하고 당했다.

“제가 잠시 실언을 했습니다. 당장 포격을 멈춰주시면 50만 라이히스탈러를 배상금으로 바치겠습니다.”

“꺼져! 그냥 쾨니히스베르크를 초토화시키는 것이 낫겠다.”

교역에 필요해 주조한 금화 또는 은화는 시간이 갈수록 금과 은의 품위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향신료와 도자기, 차 등의 상품을 수입하면서 항상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북부 유럽에서는 급기야 은이 바닥날 정도였다.

이때 유럽의 무역을 구해준 것은 현대의 체코에 위치한 요아힘 계곡이었다. 탈(thal)은 계곡이란 뜻인데 은을 캐는 계곡에서 나왔다 해서 은화를 탈러라 불렀다. 탈러는 근대 유럽 여러 나라의 달러, 또는 현대 미국 달러의 어원이었다.

이 시기 북부 독일에서 주로 사용된 라이히스탈러는 대략 은 20그램이 함유된 은화였다. 얼마 전까지는 은 1파운드가 넘게 들어간 무거운 은화도 유통됐었다.

“200만! 아니 500만 라이히스탈러를 내겠습니다!”

“꺼, 아니. 이야기 좀 해보자.”

“먼저 포격을 멈춰주십시오. 지금도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에이, 몰라. 귀찮아. 나가!”

거액을 제시했는데도 이민호가 손을 훠이훠이 휘젓자 사절단이 애가 탔다. 500만 라이히스탈러, 대략 은 300만 냥이라면 고산국의 부를 감안해 별로 많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래도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의 절반 정도가 무너진 이쯤에서 조건만 맞는다면 용서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함포사격을 당하는 주제에 끝까지 협상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교섭사절단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해병들에게 알현실에서 내쫓기는 중에 사절단장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천오백 만 라이히스탈러! 쾨니히스베르크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공작령에서 보유한 전 재산입니다!”

“좋다. 이리 와라.”

“폐하! 제발......”

“그래. 너희들은 부탁하는 입장이다. 잊지 말도록. 호위! 함장에게 말해서 총함장님께   함포사격을 멈춰달라고 요청해.”

잠시 후 포격이 멈췄다.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정신이 나갔던 사절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포격이 끝난 지역은 쾨니히스베르크 지도에서 딱 절반이었다. 함포 사격을 받은 곳에는 남아난 건물이 없었다.

“그런데 1,500만 라이히스탈러를 현금으로 갖고 있는 거야?”

“현금은 50만 라이히스탈러밖에 안 됩니다. 공작령의 재산을 다 팔아서 빠르면 한 달 후에......”

“이거 안 되겠군. 호위!”

호위 지수가 명령을 받을 자세를 갖추자 사절단장이 바닥에 몸을 던지며 호소했다.

“유대인에게 빌려서라도 사흘 내에 바치겠습니다!”

“이틀! 이틀 후 정오에 약속한 금액에서 한 푼이라도 부족하면 나머지 시가지 절반도 날아가는 거야.”

“흑흑! 유대인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폐하께서는 아십니까?”

“당연히 고리대겠지. 그리고 따로 폴란드 국왕에게 사죄하고 단치히 복구에도 자금을 내야 할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저 가까운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섭정을 잘못 구한 저희들 책임입니다. 설마 이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프로이센의 내부 문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도 브란덴부르크와 육로로 연결되는 것이 프로이센의 염원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결국 두 영지가 육로로 이어지고, 이는 독일 통일과 폴란드 분할로 직결된다.

사절단이 배를 타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갔다. 이틀 사이에 거액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크게 손해를 볼 것 같았다.

상륙해서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했던 지상군은 프로이센군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다시 함대에 수용했다. 기병들은 오랜만에 말과 함께 달려봤다면서 기뻐했다.

그 사이 100명, 200명 단위로 남서쪽 또는 남쪽 길을 통해 병사들이 급히 쾨니히스베르코로 달려가고 있었다. 병력을 보충해서 다시 저항하려 하나 걱정했지만, 포격만으로 쾨니히스베르크를 끝장낼 자신이 있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배에서 먹는 만찬이 이렇게 훌륭할 줄 몰랐습니다.”

“폴란드 요리도 훌륭하다고 들었소. 헤트만의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소.”

저녁에 한시적인 동맹군인 폴란드군 지휘부를 초청해 국왕좌승함 알현실에서 만찬을 열었다. 폴란드군 장교들은 처음 보는 음식인데도 군인들답게 용감하게 도전했고, 뭐든 꾸역꾸역 잘 먹었다.

“폴란드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맵게 먹는 편입니다. 와인도 아주 훌륭하군요. 헝가리산 와인과 다른 독특한 풍미가 있습니다. 남프랑스에서도 혹시 툴롱에서 제조된 것입니까?”

“맞소. 훌륭한 미각이시오.”

============================ 작품 후기 ============================

발트 해 끝나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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