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15 64. 오대호 =========================================================================
북미부터 고산국 영역이므로 안심하고 국왕 일행과 함대가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호위전대를 제외한 함대를 새목포로 보내 며칠 동안 일부는 휴양시키고 일부는 교대로 바하마 제도와 카리브 해의 해적 소탕 작전에 참가시켰다. 해적들과 싸우고 전리품을 나눠받을 생각에 병사들의 사기가 확 올라갔다.
총함장 이순신에게 가는 길에 새강릉에서 꼭 하루 정박하고 원정군 병사들에게 반나절 외출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새강릉으로 이주한 고산국 농민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병사들이 직접 보고 본토에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인천에서 합류해서 태평양을 건너기로 약속했다.
“시장은 일이 많을 테니 동행하지 않아도 좋소.”
“전하! 그래도 제 관할 지역인데 어찌 국왕전하를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전부터 국왕 행렬에 시장이 따라붙었다. 어쩔 수 없이 영빈관에서 기차역까지 안내를 시장에게 부탁했다. 시내에서 장갑차를 타고 다닐 수 없어서 마차를 이용했다. 물론 다른 나라 같으면 경호 문제를 핑계로 장갑차를 탔을 것이다.
“폐하! 아이들의 얼굴이 참 밝아요. 역시나 에스파냐 애들이 많군요?”
“에스파냐 출신이긴 한데, 이번에 추방당한 모리스코인들이오.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라도 금방 적응해서 다행이오. 아이들이 자존감을 갖고 온전히 성장하면 좋겠소.”
“애들이 토실토실해요. 걱정이라곤 한 점 없는 표정들이니 밝게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여요.”
1년 동안 겉모습에 큰 차이가 없는 새원산에서 가장 큰 변화는 기차역이 세워지고 철도가 오대호까지 연결됐다는 것이었다. 열차 노선의 기점은 새원산의 중심인 맨해튼 섬에서 남쪽, 샛강의 동쪽 지류인 동강 가에 있었다.
북미 지명에 원주민 언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맨해튼도 알곤킨 계열 단어로서 정식 행정 명칭으로 사용한 다음부터 원주민들이 고산국 백성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표시했다. 갓 이주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과도한 친절과 호의에 감사하는 입장이었다.
“전하! 나중에 철도 기점을 여유 공간이 많은 동쪽 긴 섬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동강의 폭이 500미터나 되는데 다리를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 중간 두 군데에 교각을 세워서 이으면 철교 겸 4차선 마차 도로 건설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 긴 섬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가급적 빨리 다리를 건설하는 게 좋겠소.”
긴 섬에 건설된 공항과 맨해튼 섬을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했다. 무거운 기차가 통과할 철교라면 튼튼히 지어야 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면 확실하겠지요. 왕도에서 최고 제철 기술자들이 왔다고 하니 기대가 큽니다.”
“이제 발전할 일만 남았소. 시장이 그 동안 고생 많았소.”
헤드비히 공주, 그리고 새원산 시장과 함께 아담한 기차역에 도착했다. 이용객이 적어서 큰 대합실이 텅 비어 보였다.
지금은 화물열차가 더 많았지만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면 점차 여객 이용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새원산을 무역도시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산업도시 겸 해로와 육로 교통의 교차점이었다.
“국왕전하 전용 차량을 연결해두었습니다. 나머지는 학생들 수학여행용 차량들입니다.”
수학여행용 차량이 일반 객차와 다른 점은 객석이 적은 대신 화장실과 욕실,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많은 것이라고 시장이 설명해주었다. 플랫폼에서 이민호가 헤드비히 공주의 손을 잡고 기차에 올랐다. 어리둥절한 헤드비히 공주와 시녀들을 국왕 전용 객실의 화려한 소파와 의자에 앉혔다.
다른 객차들에는 구르카 용병 1개 중대, 기병 1개 중대만 탔다. 객차 뒤쪽 유개차 3량에는 말을 태우고 무개차 3량에는 장갑차 여섯 대를 올렸다.
“앗!”
“조심하시오. 기차가 막 출발했으니 앉으시오.”
헤드비히 공주는 적응력이 높아서 생전 처음 기차에 탔는데도 금방 익숙해졌다. 기차란 돛과 노가 없이 움직이는 고산국 순양함처럼 자체 동력을 가진 마차라는 개념을 금방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산과 숲, 강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와! 빨라도 너무 빨라요.”
“마차보다 대여섯 배는 빠를 것이오.”
“너무 빨라서 주변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뭐, 그런 면도 있소.”
“하지만 여러 모로 봐서 빠른 게 좋겠죠?”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기차를 처음 타보고 나서, 여행 중의 여유를 없애고 오직 목적지만 남겨두었다는 뜻에서 열차가 공간을 살해했다고 일갈했다. 맞는 말이었고 현대 사회에서 여유가 사라짐을 예견했으나 비슷한 풍경을 며칠씩 지켜보는 것도 지겨운 일이었다.
“와아! 잘 탄다!”
“꼬마야! 힘 내!”
앞뒤에 붙은 객차에서 병사들이 외치기에 이민호도 창가 쪽으로 옮겨서 구경했다. 북미 원주민 소년이 말을 타고 기차와 나란히 달리며 경주를 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기병과 구르카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원주민 소년을 응원했다. 기관사가 기적을 울려서 분위기를 띄웠다.
초기 서부시대 영화에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면 신사 차림의 승객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인디언 소년을 장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소년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다른 승객들이 일제히 환호하고, 흑백 무성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친 듯이 다 함께 환호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이 북미를 차지한 다음에는 이렇게 달라졌다. 북미 원주민과 병사들은 같은 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구르카 용병들도 2년 근무만 마치면 고산국에 이민 올 자격을 얻었기에 외국인이라기보다는 고산국 백성들과의 동질감이 더 컸다.
“품종이 아주 좋은 말을 원주민이 탔네요?”
“그렇소, 공주. 북미 땅이 워낙 넓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말과 마차를 갖고 있소. 농민보다 평원에서 사는 원주민들이 말을 더 절실하게 원하는 것 같소.”
“제 말씀은, 가난한 원주민 소년이 저런 비싼 말을 살 경제력이 되냐는 질문이에요. 혹시 훔친 것은 아닐까요?”
“옷은 전통적인 원주민 복장이고, 원주민이라 해서 가난하지는 않소. 그리고 원주민들이 야생마를 길들여 타고 다닐 수도 있소.”
그러나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은 서부 쪽 이야기였고, 동부에서는 새원산 시장에서 산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말이란 다 똑같아 보였지만 에스파냐 군용 말에서 비롯된 야생마와 고산국 말은 품종이 약간 달랐다.
“폐하께서는 정복한 땅에 살던 원주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민으로 받아들이시는군요.”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그런 차이가 있겠소. 그러나 저 원주민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겠소? 저들을 착취하거나 황무지로 몰아낼 계획 따위는 없소. 그리고 어느 인종을 차별할 만큼 인구가 여유롭지도 않소.”
고산국 본토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유럽인보다 북미 원주민들이 혈통상 더 가까웠다. 평등하게 대해주면 반란을 일으킬 염려도 없었다. 지금도 북미 원주민들은 이민호의 지배를 열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과장된 소문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평원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혼란스럽지만 생각해볼게요. 물론 저는 폐하를 따르겠어요.”
“고맙소, 비키.”
칼마르 동맹이 깨진 것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1520년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으로 스웨덴 귀족 82명을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덴마크가 스웨덴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같은 나라 국민이 아닌 피지배자로 대하며 독립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했다.
당연히 스웨덴 사람들이 반발하며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구스타브 바사는 피바다 사건에서 부친을 잃고 나서 북부 지역으로 도망 다니면서 독립군을 모았다. 그리고 처절한 항전 끝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기차는 북쪽으로 직진하다가 애팔래치아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모호크 강변을 평행으로 따라가는 식으로 철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모든 길이 평탄해서 기차 속도도 제법 빨랐다.
가끔 여진족 기병 소대 30~40기가 철도 주변을 떼 지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기병이 달리는 말에서 다른 기병이 탄 말안장으로 오가며 장난질 치는 것은 예전과 똑같았다. 여진족이 말은 정말 잘 탔다.
“말 더럽게 못 탄다! 어느 부족 출신이야? 무조건 하체에 중심을 둔다고 되는 게 아니야!”
그러나 누구나 똑같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차에 탄 기병중대에도 여진족 출신이 몇 명 있어서 창밖으로 조롱하는 말을 쏟아 부었다.
작년에 새원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로쿼이 연맹 부족들은 여진 기병 때문인지 여전히 조용했다. 이로쿼이 5개 부족과 거래하는 모피 상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예전보다 살림살이가 훨씬 나아져 비교적 만족한 듯하다고 했다. 전사 숫자가 대폭 줄어든 이로쿼이 연맹 부족들은 당분간 고산국으로부터 확실한 보호를 받는 편이 나았다.
“북미 대륙이 넓다 해도 철도를 깔아놓으면 어디든 며칠 만에 가겠어요. 정말 대단해요.”
“비행기가 곧 완성되면 세계 어디든 하루에 갈 수 있을 것이오.”
“비행기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계인가요? 정말 꿈만 같아요.”
국왕 전용 객차에 놓인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다른 객차라면 진동과 소음이 심할 텐데 전용칸은 완벽한 소음 대책이 세워져서 승차감이 훨씬 부드러웠다. 다만 와인 잔이 가늘게 진동하면서 와인 표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폐하! 철도 끝에는 무엇이 있나요? 그리고 제게 무엇을 보여주실 건가요?”
“공주에게 별로 흥미롭지는 않겠지만, 제철소의 용광로요. 한참 더 가면 호숫가에 북미 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제철소가 있소.”
“석탄과 철광석을 함께 태워서 철을 연속 뽑아낸다는 용광로 말이에요? 역시 대단해요.”
열차는 밤새도록 달려 다음 날 오전에 이리 시에 도착했다. 전북 익산시가 아니라 원주민이 부르는 이름인 이리 호에서 딴 이름이었고, 현대 미국의 클리블랜드 위치였다. 이리 호 주변은 지평선 너머까지 온통 밭이었다.
제철소는 철광석과 석탄, 석회석을 가까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에 위치했다. 세 가지는 제철산업의 주요 원료였다.
그리고 동쪽 100여 km에서 석유가 났다. 원주민들이 검은 기름 강이라고 부르는 곳을 조사하던 탐사단이 땅과 강으로 원유가 줄줄 새는 유전을 발견했다.
현대 지명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오일 강변의 타이터스 빌이었다. 오일 시티에서 북쪽으로 20여 km에 위치한 곳이었다.
“세상에! 로마가톨릭 성당과 개신교회, 이슬람 모스크가 같이 있어요. 마치 예루살렘에 다시 온 것 같아요.”
“저기 불교와 도교 사원도 있소.”
이리 시에는 철도 부설을 위해 고용된 명나라 철도 노동자, 모리스코인들, 여진족에 더해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저마다 달라도 조선말을 통해 쉽게 의사전달이 가능했다.
미시간 호 서쪽 노천 철광에서 품질 좋은 철광석을 캐서 배에 싣고 미시간 호와 휴런 호, 이리 호를 통해 이리 시로 운반했다. 미시간 호 서쪽 철광까지 철도가 연결돼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배로 대규모로 운반하고 철도는 노동자들이 왕복할 때 주로 이용했다.
현재 이리 호에서 나이아가라 강을 통과해 온타리오 호수를 지나 세인트로렌스 강을 이용해 대서양으로 운송을 할 계획을 세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옆으로 우회하는 작은 강을 조금 더 넓게 파서 온타리오 호수를 연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수송비용 절감 차원의 문제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서 건설을 미뤄두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이리 제철소에 도착했다. 용광로가 들어선 건물보다는 원료와 연료를 보관하는 공간이 훨씬 더 컸다. 방염복을 착용하고 용광로 건물에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용광로가 세 개나 있다니, 놀랐소. 원료 공급에 문제가 없소?”
고산국 본토에서 자주 봤던 제철 기술자들이 이곳에 있었다. 젊은 기술자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지만 중년 이상은 모두 이민호의 눈에 익었다.
“예, 전하. 세 가지 원료 모두 남아돕니다. 용광로를 대여섯 개쯤 더 추가해도 충분한 여력이 남습니다.”
“오오!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가장 기쁜 소식이오. 소장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용광로는 얼마든지 증설하시오. 자재와 인원을 추가해주겠소.”
이민호는 몹시 기뻤다. 그러나 제철소장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는 발언을 했다. 외국 지리를 잘 모르다 보니 더 놀랐다.
“이곳 제철소에 용광로를 추가하지 않고 차라리 남동쪽 150km쯤에 강 둘이 합류되는 지점에 제철소를 새로 세우는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탐사를 마치면 전하께 보고할 예정이었습니다.”
“굳이 이곳 말고 다른 곳에 제철소를 세울 이유가 있소?”
이리 시는 제철소가 들어설 가장 이상적인 입지였다. 이민호는 이곳보다 더 좋은 제철소 위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탐사단의 보고로는 이곳 평원을 흐르는 오하이오 강이 저 남쪽의 미시시피 강에 합쳐지는 것 같다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미시시피 강이오? 말도 안 돼. 그럼 오대호에서 미시시피 강을 거쳐 멕시코 만까지 수로로 연결될 수 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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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강이 좀 깁니다.
오전 중에 올리면 좋겠는데 자꾸 늦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