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19화 (568/1,000)

00619  64. 오대호  =========================================================================

- 타타타타탕! 쾅!

“뭐야?”

갑작스런 총소리에 이민호가 깜짝 놀라 자세를 낮췄다. 그러나 아군이 들소 떼를 향해 쏜 총소리였다.

장갑차 대열에 막혀 원주민 마을 옆으로 지나간 들소 떼는 이리 시를 향하고 있었다. 들소 떼는 이민호를 지원해주기 위해 급히 달려오던 구르카 용병들, 그리고 여진 기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구르카 중대가 급히 2열로 늘어선 다음 총을 연속 발사했다. 처음 발사한 총탄이 들소의 두꺼운 머리뼈나 지방층을 관통하지 못하자 구르카 용병들이 들소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리는 묘기를 부렸다. 그러나 아무리 명사수인 구르카 용병이라 해도 겨우 100여 명 앞에 들소 3천여 마리는 중과부적일 것 같았다.

“위험하잖아!”

“괜찮을 거여요.”

구르카 병사들 중에서 유탄 사수들이 유탄을 거의 단발총처럼 연속 장전해서 발사했다. 파편의 위력이 작아서인지 아니면 가죽이 두꺼워선지 들소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불과 연기가 들소들을 놀라게 하면서 들소 떼의 선두가 속도를 줄였고, 뒤에서 밀어붙이는 들소들에게 떠받혀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뒤에서 미는 들소들에게 밀려 선두에 선 들소들이 절벽에서 줄줄이 떨어지는 버팔로 점프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여기에 기병 주제에 구르카 용병들보다 뒤늦게 달려온 여진 기병들이 가세했다. 맹렬한 연속 사격 이후 천여 마리가 더 죽고 나자 이제는 사람과 들소의 숫자가 거의 비슷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총을 가진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들소 떼는 거의 전멸하고 겨우 몇 백 마리가 흩어지며 평원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여진 기병들이 말을 타고 쫓아가면서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렸다. 이곳은 평소에 들소가 살지 않은 지역이라 들소를 위험한 맹수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어미 잃은 송아지들이 불쌍해 보였으나 여진 기병들은 총알이 아깝다며 화살을 쏘아 죽였다.

“들판이 시커멓게 변했군.”

사방에 들소 시체였다. 북미 들소는 머리 주변 털이 검은 색이고 몸은 고동색에 가까웠다. 그러나 머리가 크고 머리털이 길어서 검은 색이 우세해 보였다.

“사냥은 겨우 몇 분밖에 안 걸렸는데 뒤처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요.”

“멀리 서쪽 평원에 있어야 할 사냥감들이 제 발로 찾아와주다니 고마운 일이지.”

이리 시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불렀다. 그리고 마침 이리 시에 새로 도착한 철광석 운반 열차까지 들소 시체가 쌓인 평원으로 이동시켰다. 포타와토미 부족 원주민들이 아주 신이 나서 들소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토막 냈다.

밀차와 삽차들을 총동원해 들소 시체를 기차에 실었다. 그러나 기차에 싣는 것은 한 번에 2백여 마리 정도가 한계였다. 두 번 왕복해서 5백 마리쯤 옮기자 이리 시에서 처리할 분량이 넘어버렸다. 아직 4천여 마리가 들판에 널려 있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썩으면 전염병이 돌 거야.”

“주변 원주민들을 불러서 나눠 먹여요.”

“좋은 생각이야.”

해가 지기 직전에 여진 기병들을 열 명 단위로 묶어 사방으로 내보냈다. 평원 곳곳에 불을 켜놓은 동안 주변 마을에서 원주민들이 몰려와 마음껏 들소 고기를 가져갔다. 다시 한 번 국왕전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에 만세는 또 뭐야? 논리적으로 안 맞잖아.”

“뭐 어때요? 백성들이 주인님을 존경한다는 뜻인데요.”

해가 지고 나서 국왕 행렬과 호위대는 이리 시청으로 돌아와 들소 고기 파티를 열었다. 양념과 시간이 부족해 불고기로는 못 먹고 들소 고기를 썰어서 스테이크로 구워 먹었다. 들소 고기는 아주 약간 질긴 편이었고 소에 비해 지방질이 적어 담백한 맛이 났다.

고기가 숙성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평소 고기를 먹을 기회가 적었던 원주민들은 아주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었다. 그러나 평소에 뒤룩뒤룩 살찐 비육우 고기를 먹던 이민호나 호위들은 그리 많이 먹지 못했다.

밤이 늦었지만 기차에 들소 250마리를 실어서 미시간 호 서쪽 노천철광 쪽으로 보냈다. 마차들이 밤새 왕복하면서 탄광에도 200마리를 보냈다. 광부들과 그 가족만으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들소를 보낸 것은 주변 원주민 마을들에 알아서 나눠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들소 한 마리 무게가 500kg이라면 살코기는 200kg 이상 나왔다. 한 마리에 100명이 실컷 나눠먹을 양이었다. 광부와 원주민들이 열흘 넘게 질리도록 먹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전하. 오늘은 특별한 상황이라지만 너무 많이 잡은 것 같습니다. 평원에서는 일 년에 딱 한 번, 한 부족이 청년 130마리를 동원해서 150명만 잡는다고 합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으니까요.”

“뭔가 단위가 바뀐 것 같소.”

자글자글 고기를 굽는 소리 사이로 지혜로운 원주민 노인이 한탄했다. 그러나 수천 만 마리나 되는 북미 들소들을 이런 사냥으로 숫자를 줄일 가능성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북미 들소가 멸종 위기에 처했던 것은 저항하는 평원 인디언들을 굶겨 죽이려는 미군의 대규모 군사 작전 탓이었다. 기병대가 들소 떼를 보는 족족 몰살시켰고, 백인들이 취미로 들소를 사냥하고 혀만 잘라간 경우도 있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들소를 대량으로 사냥하실 계획이십니까? 고기나 가죽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작지 확보를 위해서 말입니다.”

“아니오. 식량은 충분하오. 그리고 들소는 계절에 따라 멀리 남쪽 텍사스까지 왕복하는 동물이오. 들소를 주식으로 먹고 사는 원주민들이 많을 것이오. 들소를 대량으로 잡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오.”

“역시 전하께서는 관대하고 현명하신 왕이십니다. 전하께서는 전혀 욕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 들소 사냥으로 고산국의 힘을 주변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겨우 몇 백 명만으로 5천 마리나 되는 들소를 단 몇 분 만에 몰살시켰다. 이 시기 말도 없고 총도 없는 원주민들에게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민호는 원주민들 사이에 이번 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기를 기대했다. 언젠가 고산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었던 원주민들 대신 들소들이 미리 피를 흘려 경고한 셈이었다.

“땅이 넓어 여유가 있으니까요. 먹고 살 길은 얼마든지 있으니 제발 원주민들끼리 서로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든 이번 들소 사냥과 고기를 나눠주신 것으로 인해 이 지역 대부분 부족들이 국왕전하의 지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제발 그렇게 된다면 좋겠소. 나도 내 백성이 될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오.”

시간이 갈수록 멀리서 온 원주민들이 차례로 도착해 고기를 받아갔다. 들소 한 마리씩 실은 이두마차가 밤새도록 이웃 마을들을 왕복했다.

수족 원주민들이 들소 고기를 가장 반겼다. 이들은 원래 역사대로라면 17세기 중반 이후 오지브와 족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이주한다. 그 후에는 평원 인디언이 되어 말을 타고 들소를 사냥하겠지만 지금은 아직 채집경제 위주였다. 고산국이 원주민들의 영토 분쟁을 억제하므로 수족은 어쩌면 이 지역에 계속 거주할 수도 있었다.

들소들을 잡은 곳이 마침 호수에 가까워 소문을 듣고 급히 배를 타고 온 원주민들도 많았다. 오지브와 족뿐만 아니라 오타와 족도 배를 타고 와서 고기를 대량으로 실어갔다. 들소를 운반할 때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서로 도왔다.

평소 들소 고기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던 오타와 원주민들이 공짜로 실컷 먹고 배에 고기를 가득 실은 다음 활짝 웃으며 떠나갔다. 오타와 족은 교역의 수호자라는 칭호답게 오대호 북쪽에 거주하는 크리 족과 이리 시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하느라 이리 시에 자주 오는 편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정이 빠듯해서 철광과 탄광, 유전은 살펴보지 않고 국왕 일행이 새원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일관 제철소인 이리 제철소는 잘 돌아갔고 오하이오 강 시작점에도 조만간 제철소를 세울 예정이었다. 고철이 충분히 축적되면 전기가 풍부한 지역에 전기로 제철소가 세워질 것이다.

이제 고산국에 철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북미 횡단 철도는 물론 시베리아 횡단 철도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예뻐요!”

헤드비히 공주를 비롯해 시녀들까지 객차가 예쁘다고 난리였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국왕 전용 객차가 온통 꽃으로 장식 돼 있었다. 기관사가 보고하길, 원주민 여자들과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들꽃을 꺾고 씨를 얻기 위해 재배하는 해바라기 꽃을 잘라 국왕 전용칸을 장식했다고 한다.

이리 시의 시민, 원주민, 명나라 노무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기차는 동쪽으로 출발했다. 여진 기병들이 10km쯤 기차와 함께 달리며 최상의 예우로써 이민호를 배웅했다.

이리 시를 직접 살펴본 이민호는 여러 모로 안심이 됐다. 오대호 주변의 대평원에는 유럽에서 이민이 오는 대로 농장을 만들어준 다음 정착시키면 될 것 같았다. 텍사스의 넓은 평원에도 이민자들을 받아 농장을 운영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민영이 의문을 품었다.

“주인님. 유럽인 이주민들에게 좋은 농지를 다 나눠주시면 나중에 고산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농장을 나눠주지 못하게 될 것 같아요. 새강릉 주변 옥토나 오대호 주변까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다 나눠주고 계시잖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있어.”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민영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민호는 북미 원주민과 유럽 이주민들에게 농업을, 고산국 본토 사람들에게는 상공업을 맡기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고산국 백성이라 해도 동등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앞으로 성장할 인구와 지역별 인종 분포, 인종별 종사 직업 등등 북미에서 고산국 사람들이 주도권을 유지할 배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이민호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에도 외국인이나 이주민들이 많아 절대로 드러내놓고 자랑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농장을 경영하면 충분한 수입을 얻어. 물가 수준 차이가 크다 해도 북미 농민들은 유럽의 웬만한 하급 귀족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할 거야. 그러나 그것뿐이야. 안주하다 보면 발전을 못해.”

“그래도 기본적인 재산이 있어야 발전하기 쉽잖아요? 배가 불러야 공부할 여유도 생겨요. 왕립대학교 학비가 무료라도 집이 잘 살아야 성적도 좋대요.”

헤드비히 공주가 누워서 자는 중에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공주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아기처럼 잘 자고 있었다.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는 거야. 대부분은 그 수입에 만족해서 안주하게 되기 쉬워. 직업도 대물림 되고.”

“농부 아들이 강요하지 않아도 농부가 되기 쉽다는 뜻이죠?”

“보통은 그래. 그러나 앞으로는 상공업과 지식 노동의 시대가 올 거야. 나는 그 시대에 대비하고 있어. 산업시대의 주역은 고산국 본토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어.”

헤드비히 공주가 들을까봐 이민호가 목소리를 더욱 줄였다. 이렇게 판단한 것은 미국 이민사의 산물인 레드 넥 때문이었다. 레드 넥은 농사를 짓느라 목이 벌겋게 탄 남부 백인 촌놈이라는 뜻이지만, 미시간 호 주변 평원에 사는 백인 농부들도 레드 넥에 포함됐다.

앵글로색슨계 후손이 대부분인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KKK단과 사설 민병대, 티 파티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였다. 남북전쟁 때 남부를 지지했고, 당시 집권당이었던 링컨의 공화당을 싫어하고 전쟁 이후 통폐합된 민주당을 지지했다.

영국계 백인들도 민주당을 지지했으므로 남부에 유색인종이 많아서 진보적인 색채의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공화당의 신보수주의 이후 공화당 주지사를 배출했다.

영국계 백인들은 복지제도를 강조하는 민주당을 미워하고 총기 소지의 자유를 주장하는 공화당에 표를 주면서도, 정작 공화당 대통령 집권 시기에는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고 연방 건물에 테러를 자행했다. 이렇게 된 데는 미국의 이민 역사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탓이 컸다.

영국에서 북미로 건너간 초기 이주민들은 버지니아 등 남부의 풍요로운 곡창지대는 물론 영토가 확장되면서 오대호 주변의 광활한 평원을 독차지했다. 텍사스가 독립했다가 미국에 합병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영국계 백인들이 토지를 죄다 차지했다. 심지어 서부 개척시대에 인디언들과 싸우면서 마차를 타고 가서 빈 땅을 차지한 사람들도 대부분 영국계 백인들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미국으로 이민 간 북유럽이나 동유럽, 남유럽 사람들은 더 이상 농지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은 도시 빈민으로서 저임금 노동자로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고 20세기에 가까워지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부유한 영국계 백인 농민들은 토지 소유자로서 여전히 부유했으나 계속 농민으로 머물렀다. 반면에 미국의 주류가 아니었던 아일랜드와 독일, 이탈리아 이주민들은 고학을 하든 장학금을 받든 대학 교육을 받고 좋은 직업을 얻어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도시와 농촌의 성장 속도는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미국 건국과 독립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은 19세기까지 풍요를 누렸으나 20세기 들어 무식한 촌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남북전쟁은 비 영국계 백인들에 대한 앵글로색슨의 패배였고, 상공업에 대한 농업의 패배였다. 영국계 백인들에게 남은 것은 꾸준히 노동을 할 수 있는 자기 소유의 농장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직계 후손이라는 자부심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국계 백인 농민들은 극도로 보수화되면서 사명감을 갖고 유색 인종을 차별한다. 그리고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나 의료보험 개혁을 목숨 걸고 반대하게 된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미국 사회에서 낙오된 소외감을 영국계 백인들은 이렇게라도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랑할 거라곤 미국 건국의 주역이었다는 핏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총기소지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패배한 남부에 정서적 일체감을 가진 앵글로색슨에게 연방정부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연방정부가 언제든 군대를 동원해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학살할 수 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총기는 연방정부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앵글로색슨이 의존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 수단이었다.

이민호는 고산국 출신들이 북미에서 레드 넥이 되거나, 총기소지 자유를 부르짖는 앵글로색슨처럼 농촌에 안주했다가 주도권을 다른 이민자들에게 넘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북미에서는 농업이 압도적으로 수익률이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땅이 넓고 비옥하며 시대에 맞지 않게 농업기계화를 일찍 도입한 탓이었다.

============================ 작품 후기 ============================

미국 역사에 대해 기존 상식과 약간 다른 시각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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