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28화 (577/1,000)

00628  65. 뻐꾸기시계  =========================================================================

“주인님이 백성들이 돈을 쓸 곳을 마련해주세요.”

“돈 벌게 해줬으면 알아서 쓸 것이지, 쓸 곳도 만들어줘야 해?”

이민호에게 자식들이 생기고 나서 가장 기뻤을 때는, 후궁들이 아이들의 작은 입에 먹을 것을 떠 넣어주고 자식이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장면을 봤을 때였다. 부모 입장에서 자기 새끼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보다 흐뭇한 장면은 없었다.

백성들을 자식으로 여기는 전근대적 군주들과 이민호는 많이 달랐다. 건국 이래 백성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걱정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수입이 늘어나고 부유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통치자로서 몹시 기뻤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놀 곳도 마련해줘야 하나 싶었다.

“사람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에서 더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물건 사는 것 말고요. 유원지나 수족관 같은 것을 더 많이 만들어주세요.”

“좋아. 돈 쓰는 게 아깝지 않게 만들어주지. 먹는 문제는 혜진이 맡아서 해왔으니 앞으로도 알아서 하고, 그 다음은 건강이 최고야. 건강하려면 꾸준히 운동을 해야지.”

학교에서 가르쳐준 체육 종목 중에서 각종 구기가 인기를 얻었다. 주말마다 공원에서 축구나 배구, 농구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린이 놀이터에서도 공놀이가 가장 인기였다. 이면과 사관학교 산악회 덕분에 등산도 인기가 좋았다.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어서 평일에는 공놀이를 할 수 없잖아요. 아침이나 저녁에 한 시간쯤 운동하면 괜찮겠어요. 도시 안에 그런 장소를 만들면 어때요?”

“좋지. 공놀이도 좋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 운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을 만들자. 한 시간이라도 집중적으로 운동하면 여자들 몸매도 좋아질 거야.”

“가르칠 사람은 군대 교관이나 특전대대 출신이 좋겠어요.”

먼저 대학교에 체육학과를 만들기로 했다. 전공을 다양화하기로 해서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진을 모으는 것도 일이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체육대학 하나쯤은 필요할 것 같았다.

“동네마다 하나씩 체육관을 세우자.”

“체육 단련만 하는 곳인가요?”

“이왕이면 거기서 목욕도 하면 좋지. 집에서 하는 간단한 목욕 말고 본격적인 목욕탕.”

이민호는 혜진과 머리를 맞대고 체육관 건물을 설계했다. 지하는 수영장과 사우나, 목욕탕, 1층은 각종 운동기구를 이용해 몸을 만드는 시설, 2층은 체조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공간, 3층은 탁구장과 볼링장 등 실내 경기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찜질방과 피트니스 센터를 결합한 정도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운동의 중요성을 잘 아는 혜영도 근육을 만드는 운동시설에 대해서는 거부감부터 느꼈다. 그리고 이민호가 특별히 디자인한 운동복에 대해서도 반발이 심했다.

“돈을 내고 수영과 뜀박질을 배운단 말이에요? 그것도 이렇게 몸이 드러난 수영복을 입고요?”

“그 정도 드러나면 뭐 어때? 요즘 시내에 나가봐. 어깨를 드러낸 상의와 짧은 치마가 대세야.”

고산국 본토가 조선에 비해 더운 곳이라서 사회 전체적으로 여자들의 신체노출에 조금 더 관대했다. 국초부터 해결하지 못한 여초 문제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디자인한 운동복은 노출이 좀 과했다. 비키니는 아니더라도 등이 시원하게 드러나고 허벅지는 모조리 노출됐다. 리듬체조 선수들이 입는 과감한 복장을 맨살로 입는 것과 같았다.

“운동시설이라는 것도 그래요. 여자가 운동을 심하게 하면 몸에 근육이 배겨서 흉해 보이지 않겠어요? 차라리 덜 먹고 살을 빼는 게 나아요.”

“건강미라는 게 얼마나 남자 시선을 끄는 줄 알아? 요즘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몸매는 뼈만 남은 게 아니라 여진족 호위들처럼 튼실한 허벅지와 배에 생긴 복근이야. 근육이 생기면 살은 자동적으로 빠지게 돼 있어.”

“정말요?”

이민호가 여진족 호위들에게 정해진 회수 외에 승은을 자주 베푸는 것은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전혀 아니었다. 여진 호위 외에도 이민호가 선호하는 여자들의 부류가 분명히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서양 여자들 중에서 하필 신분이 낮은 갈라티아 궁녀들을 주인님이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후원에서 나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봤어요. 정말 건강하더군요.”

“그래. 혜영이나 혜진이는 특별하지만, 다른 여자들의 경우에는 건강해 보이는 여자가 좋아. 설계를 계속해보자.”

“알았어요. 살은 빼고 체력은 강하게 하는 운동이 좋겠어요.”

이때 문이 열리고, 후궁 세 명을 꽃단장해서 침전에 데리고 들어온 혜영이 혀를 찼다. 침전 바닥에는 잘못 그린 종이 수십 장이 흩어져 있었고, 탁자에서 이민호와 혜진이 머리를 싸매면서 체육관 설계를 하고 있었다.

“뭐하세요, 주인님?”

“응. 혜진이하고 체육관 건물을 설계하고 있어.”

혜영이 두 팔을 허리에 얹었다. 잔소리가 시작되기 직전의 자세라 이민호가 움찔했다.

“주인님! 혜진이를 언제까지 처녀로 늙게 하실 생각이세요? 일만 시키지 말고 어서 안아주세요. 혜진아! 너도 일도 좋지만 어떻게든 주인님을 유혹해봐! 너 지금 몇 살이니?”

“언니는!”

혜진이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침전에서 뛰쳐나갔다. 이민호는 괜히 설계도를 만지작거리고, 실내에 시립한 여진 호위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혜영의 눈길을 피했다.

“며칠 안에 혜진이를 침전에 들여보낼게요.”

“그 사이에 혜진이 마음의 준비가 될까?”

“혜진이는 항상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어요. 주인님이 결심하지 못하면 강제로 합방시키는 수밖에 없죠.”

“아, 알았어.”

고산국의 왕은 이민호였지만 왕궁의 주인은 혜영이었다. 그리고 이민호도 뭐라 못하는 독재자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신뢰와 애정이 있었기에 지속 가능한 관계였다.

다음 날 오전에 총함장 이순신, 육군사령관 계복과 함께 왕립조선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1만톤급 장갑순양함이 건조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폈다. 다른 건현에서는 2만톤급 유조선이 골격을 세우고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철선이 건조되고 있었다.

“철판을 배 밑이나 지붕에 덧붙이는 것만 생각했지 이렇게 배 전체를 철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대단합니다. 6천톤급 철선이 저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쇠로 만든 1만톤 배가 물에 뜨기 어렵다고 말하지 못하겠군요.”

“총함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선소 바깥 바다에서 철판을 이어 붙여서 만든 시험선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항용인 대형 디젤 엔진 4기 외에 전선에서 사용했던 초기의 터보샤프트 엔진을 개량해 4기를 추가했다.

터보샤프트 엔진은 연료 소비가 늘더라도 디젤엔진의 순항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배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전선을 주력 함선으로 사용했을 때는 항속거리가 짧아 유조선을 대동시키는 등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던 터보샤프트 엔진이, 지금은 배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저 배, 장갑차가 포장도로에서 달리는 속도보다 빠른 것 같습니다.”

“서양 뱃사람들 속도 기준으로 30노트, 시속 55킬로미터 이상입니다, 사령관님.”

조선소 책임자가 계복의 질문에 대답했다. 해안경비대에 속한 시험선의 순항속도는 22노트 정도였으나, 최고 속도로 달리면 5할 정도 더 빨라졌다. 전투 상황에서 속도 차이는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전하께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싸움배를 만드시는군요. 저는 지금 순양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함대가 태평양과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 순양함은 작다고 느껴져서 말입니다. 앞으로 충분한 숫자가 갖춰지면 현재 순양함은 방어 임무로 전환하고 큰 배만으로 주력 함대를 구성할까 합니다.”

“혹시 더 큰 배를 만드실 계획이십니까, 전하?”

“주력은 1만톤에서 2만톤 사이로 하되, 많지는 않겠지만 그 이상 되는 전함을 몇 척 만들 계획입니다.”

이민호의 계획을 들은 총함장 이순신이 질려서 고개를 저었다. 이순신은 이민호와 계약한 7년의 기간이 다 되어가면서 고산국 총함장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싶다는 것이 그의 사퇴 사유였다.

“이번 원정에 참여하신 총함장님의 소감은 어떻습니까?”

“예, 전하. 고산국이 충분히 앞서 나가고 있지만 유럽의 기술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금방 따라올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고산국이라는 훌륭한 모델이 있으니 실제 역사보다 유럽의 과학기술 발전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국력의 현격한 차이를 유럽 국가들에게 계속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고산국은 아직 인구가 너무 적었다.

만에 하나 유럽 여러 나라가 합세하면 해전에서는 전혀 안 밀리더라도 육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대서양은 너무 넓어 지키기 어려웠고, 유럽 군대가 북미 여러 곳에 상륙한 다음 도시를 공략한다면 병력이 적은 고산국은 여러 곳을 동시에 방어하기 어려웠다.

파국을 막으려면 어떻게든 바다에서 적의 침공을 막아야 했다. 베트콩이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상륙할까 무서워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미국과 비슷하다고 욕할지 몰라도, 이민호는 유럽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잉글랜드에는 숙련된 선원들이 많아 더욱 위협적이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유럽과 인구 차이가 크게 납니다. 앞으로 몇 십 년 안에 유럽과 격차를 더 벌리고 북미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야 고산국이 앞으로도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간에 전하를 돕기 위해서 왔지만, 고산국은 제 막내아들의 조국입니다. 조금 더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싫다는 이순신을 억지로 원정함대에 참가시키고 오늘 조선소에 데려온 목적이 드디어 달성됐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해전에서나 바하마 제도의 해적 토벌에서 보듯이 이순신은 함대 전력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았다.

바로 그 능력을 후배 장교들이나 사관생도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했다. 위인전기를 읽은 어린이들 모두가 위인이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았다.

“소장! 설명하시오.”

“예! 전하. 1만톤급 소형 장갑순양함은 다음 단계에서 건조할 중순양함 및 전함과 함께 대양 작전을 수행할 주력 전투함입니다.”

소형 장갑순양함의 기준 배수량은 1만톤, 만재 배수량은 1만 3천톤 정도였다. 20세기 중반 기준으로 2만톤 이하인 중순양함에 간신히 해당하는 배수량이었다.

전장 170미터 함폭은 20미터 정도로서, 22노트로 1만 해리의 항행 거리를 자랑했다. 그러나 자동화에 한계가 있어서 무장을 대폭 줄였어도 승조원이 400여 명이나 됐다.

이 시대 기준으로는 목조전선의 한계를 가뿐히 넘어섰다. 그러나 장차 구성할 주력 함대에서 정찰과 호위 등 여러 가지 임무에 다양하게 써먹으려고 만든 다목적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주력 전투함 임무는 전함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총함장님과 전하의 요구사항에 맞춰 8인치 2연장 함포 포탑 3기와 5인치 및 3인치 부포 다수를 얹되, 나중에 주포를 12인치 함포로 개장할 수 있도록 포탑 공간에 여유를 두었습니다.”

“12인치라면 과도한 무장입니다. 당분간 함포는 8인치 함포 6문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5천톤급 순양함에 탑재된 5인치 함포에도 버틸 상대가 없었다. 8인치 함포를 주포로 선정한 이유는 대양 해전에서 연장된 사거리를 활용하거나, 지상 포격을 위해서였다.

1만톤급 장갑순양함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잉글랜드나 다른 유럽 국가의 함선에 비해 분명히 과도하게 큰 배였다. 그러나 이 정도 배수량이 돼야 대서양이나 태평양에서 어느 정도 악천후에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군함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적함의 크기가 아니라 바다 그 자체 때문이었다.

총함장 이순신이 배의 규모와 무장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 같아 이민호는 기뻤다. 실제 역사와 같이 세상이 흘러갔다면 이순신은 임진왜란 마지막 날에 전사했겠지만, 전사는커녕 의학의 도움까지 받아 아주 정정했다. 이민호가 이순신을 부려먹을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이런 큰 배는 낭비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위정자는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 최선입니다.”

“맞습니다, 전하. 이런 괴물들이 대서양에 돌아다닌다면 유럽 국가들이 고산국과 절대로 전쟁을 하고 싶지 않겠군요.”

“그런 의도가 많이 반영됐습니다. 대신에 육군 규모를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군이 강하면 그 나라의 육군도 강한 것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20세기 중반에도 미국이나 영국은 평소에 해군만 강했지, 육군 병력은 총동원하기 전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을 식민지로 삼을 계획이 없는 고산국에서 대양 함대는 순전히 방어용이었다. 그래서 대서양 해안에 더 집중 배치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과도한 듯하지만 설명에 있듯이 큰 배는 항행성이 좋습니다. 대양에서 배는 일단 무조건 커야 하고 무장은 부수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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