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34화 (583/1,000)

00634  66. 백화제방  =========================================================================

66. 백화제방

“와아~”

왕도 고북 시에는 고산국의 다른 도시들처럼 주말마다 함성이 터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바로 왕립 축구경기장과 국립 축구경기장이었다.

고산국에서 주말은 금요일 오후부터인데, 평일과 금요일에는 학생,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성인 축구경기가 열렸다. 경기마다 보러 온 관객이 수만 명이었고, 현재는 고등학교 축구 경기가 조금 더 인기가 좋았다.

학교마다 교정 외에 잔디가 깔린 축구경기장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실내체육관은 아직 건설 중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동네마다 체육공원이 있었고, 그 중에서 축구장이 가장 컸다. 겨울에도 따스한 고산국답게 모두 천연잔디 경기장이었다.

현재 지역별로 축구 구단이 창단됐으나 퇴근 후나 주말에 공을 차던 직장인들이 모인 것에 불과했다. 아직 프로 선수는 없었지만 조만간 생길지도 몰랐다. 지금도 경기에 뛴 선수들이 일정액을 보수로 받고 있었다.

관중이 워낙 많아 한 끼 식사 값도 안 되는 적은 입장료 수입만으로 경기장 사용료를 내고도 구단을 운영하기에 충분했다. 어설프게 관중석 앞에 광고판도 몇 개 붙였다. TV 중계가 없으므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려는 광고판이었다.

“오늘은 전통의 명문 고북 거북이들과 남부의 강자 고남 지남철이 맞붙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왕배 쟁탈전 우승자 지남철 구단은 오늘도 거북이들을 몰아붙여 현재 2대 0으로 점수 차를 벌리고 있습니다. 판정에 문제가 있는지 양쪽 주장들이 모여 잠시 주심과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방송 중계석에서 떠드는 소리가 이민호와 후궁들, 그리고 아이들이 앉은 좌석에까지 다 들렸다. 국왕이 경기를 참관한 것은 오랜만이라서 방송 중계석에서 계속 관심을 보였다.

“중앙 관람석에서는 특별히 국왕전하께서 총리 혜영님 등 비빈 분들과 함께 친람하고 계십니다. 국왕전하께서는 고산국 모든 백성들의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만, 아직 젊으십니다. 비빈 분들은 한 결 같이 천하절색의 미인들이시고 왕자님, 공주님들도 정말 귀여우십니다. 처음 뵌 국왕전하는, 에, 보통으로 평범하게 생기셨습니다.”

“들려!”

“앗! 죄송합니다. 국왕전하께서 심통이 나신 모양입니다. 황무지였던 고산국에 나라를 세우시고 단기간에 기반을 닦으신 영명하신 군주이십니다. 우리 백성들은 국왕전하 덕택에 아주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아부~ 아부!”

축구 경기 규칙이나 선수들의 복장, 협회 구성 등은 이민호가 거의 다 만들었다. 특히 축구안내서는 이민호가 혼자서 저술한 두 번째 책이었다. 세 번째 책은 동화모음집이었다.

정강이받침을 양말 안에 넣어 선수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현대 축구와 같았으나, 가죽으로 만든 신발 밑 부분 스터드는 말랑말랑한 고무로 돼 있었다. 그래도 가끔 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진 선수가 병원으로 실려 가곤 했다. 공은 중학교까지는 고무공, 고등학교부터는 가죽 공을 도입해서 현대 축구와 차이가 거의 없었다.

고산국 축구경기연맹의 이름은 나라 이름이 붙지 않은 축구협회였다. 정기적인 축구 경기가 고산국 본토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북미에서는 학교 대항전으로 축구 경기가 열렸다.

가끔 필리핀 총독부나 마카오에서 외국인들이 축구 경기를 하러 오기도 했으나, 규칙이 조금 달라서 문제가 생겼다. 고산국 축구 규칙은 현대 축구 그대로였기에, 중세 유럽 국가들에서 저마다 규칙을 정해서 행하던 축구 경기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축구 경기를 도박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어요. 금지해도 암암리에 퍼져 나가고 있나 봐요. 당첨금 지급 문제로 종종 폭력배가 동원되기도 해요.”

“쳇! 조만간 승부조작을 시도하겠군. 아예 정부나 축구 협회에서 축구 복권을 발행해. 그럼 좀 나을 거야. 축구 협회에 대한 감사도 게을리 하지 말고.”

혜영은 축구 경기장에 와서도 여전히 행정가였다. 다른 후궁들도 축구 경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잔뜩 모인 것만 신기한 듯 구경했다.

폭력배는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생계형일 경우 측은하게 여겨줄 텐데, 고산국에서 그럴 리는 없고 그저 남들을 두들겨 패는 것에 재미 들린 자들이었다. 폭행죄로 유죄 판결을 두 번 받으면 형이 최소 10년으로 뛰어 탄광에 보내지는데도 폭력배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도박을 합법화하겠다고요?”

“막아도 한다면 아예 멍석을 깔아주는 거야. 설마 경마는 안 하겠지?”

“경마는 없고 개들을 풀어놓고 경주시키는 경우는 있어요. 닭싸움과 소싸움도 돈을 걸고 해요. 적발되면 벌금을 크게 무는데도 사라지지 않아요.”

개 경주가 박진감이 넘쳐서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그레이하운드의 조상격인 개들이 대량 도입됐다. 서로 아는 지인들끼리 술값 내기 정도라면 상관이 없는데, 아예 기업화되기에 문제였다.

“다 정식으로 허가해줘. 대신 상금에 세금을 물리고 경기 전에 수의사가 검사해서 특정 세력이 승부 조작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

“도박 같은 것이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들에게는 승부 자체가 재미있을지 모르지.”

사실 카드놀이와 화투를 고산국에 확산시킨 사람이 이민호였다. 다른 필명으로 안내서를 내고 트럼프와 화투를 엄청나게 팔아치웠다. 그러나 카드놀이와 화투 때문에 전통놀이가 다 사라졌다는 욕을 먹고 있었다.

“와아~”

“아싸! 거북이가 모처럼 한 점 넣었다!”

함성이 터진 순간 골은 이미 들어갔고 선수들이 환호하며 중앙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민호가 뒤늦게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사람끼리는?”

“사람끼리 싸움 시키고 돈을 거는 경우는 아직 없어요.”

“모르지. 밤늦게 지하에서 그런 경기를 할지.”

패한 자가 죽어나가는 죽음의 링 같은 참혹한 일이 고산국에서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사실 고산국에서는 요즘도 외국으로부터 꾸준히 노예를 밀수입했다. 노예매매가 합법은 아니었지만 거의 공개적으로 하는 마카오에서 고산국은 너무 가까웠다.

고산국에서 인신매매나 노예매매를 했다가 걸리면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바로 몇 년 전까지 국가에서 노예를 대량 수입해 군대까지 만들었기에 노예 매매를 했다가 걸린 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조금 이르겠지만 의회를 만들어야겠어. 마을의 동장과 보안관도 선거로 뽑아야겠어. 준비를 좀 해줘.”

“어째서요? 권력을 탐하고 자기 배만 불릴 자들이 태반일 텐데 그런 자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려고요?”

잉글랜드와 프랑스, 폴란드와 스웨덴을 비롯해 현재 유럽 여러 나라에 의회가 있었다. 의원들의 신분이나 권한 등이 저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존재 이유는 왕권의 제한에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의회는 국민이 아니라 대체로 귀족계층만을 위한 협의체였다.

“정책과 행정에 대한 견제가 필요해. 관리들이 감시의 눈길을 피하면서 무슨 짓을 하는지 봤잖아. 그리고 백성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도 있어.”

“행정 관료들이 의원들에게 아부하고 뇌물 바치기 바쁠 걸요?”

조선에서 왕과 신하, 선비들이 해온 온갖 협잡질을 알고 있는 혜영은 정치가로 나서려는 자들을 절대 믿지 않았다. 이민호도 충분히 공감했다.

“남을 짓밟으면서 권력을 남용할 자들을 숙청할 함정이 필요하거든.”

“그렇다면 찬성이에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이민호가 잠시 침묵했다. 혜영의 눈을 바라보면 거짓말하지 못했다.

“지금 체제에서는 국왕인 나 한 사람이 너무 큰 책임을 져야 해. 책임을 덜고 싶어. 혜영이도 그렇지? 그 동안 고생한 것 알아.”

이번에는 혜영이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백성들이 만든 나라가 아니에요. 주인님 혼자서 만든 나라란 말이에요.”

“알아. 혜영이가 많이 도와줬지. 하지만 나라는 결국 사람들이 모인 결집체야. 우리가 다 해줄 수는 없어. 내 나라가 아닌 우리들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

“지금도 고산국 백성들은 자부심이 넘치는 걸요?”

“앞으로 법치주의에 근거한 통치가 되려면 모든 백성들이 그 법에 동의해야 해. 당장은 아니지만 그 법을 의회에서 제정해야 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하면서 가족과 함께 행복을 느끼는 백성들은 충분히 믿어요. 하지만 행복에 겨운 사람이 정치에 나서는 법은 없어요. 의회라는 곳은 폴란드처럼 악인과 매국노들로 구성된 악마의 소굴이 될 거여요.”

그리고 의원들은 외국 의회의 사례들 중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베끼려 할 것이 뻔했다. 폴란드나 영국 의회처럼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 협정을 강제로 조인시키려고 할 수도 있었다. 의원들이 국민을 위한다면 몰라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가를 팔아먹을 가능성도 있었다.

국민의 의사와 거리가 먼 국민의 대의기관 의회라는 것은 의회민주제의 영원한 고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의회민주제로 가는 이유가 있었다.

“맞아. 항상 정치가가 되려고 나서는 자들이 문제야.”

“욕심쟁이들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고 말 거여요. 젊음을 시기하는 노인들이 청년들을 의미 없는 전쟁에 내보내 죽일 거여요. 이 나라 백성들을 다른 나라들과 원수지게 해서 영원히 싸우게 만들 거여요.”

“혜영이처럼 백성들을 사랑하는 정치가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다양하고 우리 후손 중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이 왕이 될 수 있어.”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훌륭하게 자라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어렵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국왕과 백성들을 거짓말로 속이는 자가 정권을 찬탈하거나 장악할 수도 있어. 권력이 왕 개인에게 집중된 절대왕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그래서 나도 항상 법에 기반한 통치를 했잖아? 물론 그 법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그래도 왕은 실정에 대한 책임이라도 졌다. 모든 욕은 왕이 먹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어느 주정뱅이는 놀면서 기본소득을 받는 주제에, 편모가정의 딸이나 고아들이 기본소득을 받는 바람에 창녀로 나서지 않아 못 따먹는다고 왕을 욕하기도 했다. 강간 미수로 재판을 받던 주정뱅이의 입에서 핑계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런데 왕정제에서는 환관이나 외척처럼 권력의 정당성이 아예 없는 자들이 책임 없는 권력을 휘두르기 쉽다는 문제가 있었다. 망하는 나라들을 살펴보면 왕의 개인적인 실정이 주요 원인이 된 경우도 흔했다. 이민호는 국왕 개인이 아닌 국민의 대표성을 가진 집단에게, 그리고 전체 국민에게 책임과 권리를 나눠주고 싶었다.

“백성들은 주인님만 믿고 있어요. 그들을 저버리지 마세요.”

“그게 문제라는 거야. 백성들이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정치 교육을 지금부터 시작하자.”

“일반 백성들은 자기들의 대표를 뽑지 못해요.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무시하고 못 믿거든요. 그래서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하는 부자나 교육을 더 받은 자들만 뽑게 될 거여요. 그들은 결코 일반 백성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이에요.”

혜영이 민주정치의 폐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현재 고산국에는 그리스의 황금기는 물론 로마 공화정 말기의 혼란상을 다룬 책도 여러 종류가 출간돼 있으니 그런 책을 읽었다고 봐야 했다.

“다행히 농민과 직장인들의 수입이 조선 양반 출신들보다 높아. 유학을 제외한 교육도 더 많이 받았어.”

“백성들이 거짓말쟁이에게 속아 그런 자들만 골라서 의원으로 뽑으면요? 나라가 망할 거여요.”

“그 책임을 정치가는 물론 백성들이 져야지.”

“주인님이 어느 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실 것 같아요. 혹시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해 혼란과 비탄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것은 아닌가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울먹거리는 혜영을 껴안았다. 이민호가 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중계석에서 뭐라 떠들고 주변 관객석에서 환호하는 것 같았으나 이민호는 모르는 척했다.

“절대 아냐. 지금 당장 국왕에서 물러나겠다는 뜻도 아니야. 나는 백성들에게 그리 무책임한 왕은 아니거든. 그리고 공화정이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할 거야. 선거가 중요해.”

“입헌군주제를 한다 해도 체제를 바꾸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여요. 권력 대부분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거여요. 백성들이 공짜로 얻은 권리라고 무시하거나 두려워서 권리 행사를 피하면 어쩌죠?”

“정치 격변기에 백성들이 피를 쏟는 게 두려워? 피를 안 보고 평화적으로 체제가 전환될 수도 있어. 백성들을 믿어보자.”

그러나 이민호가 알기로는 군주가 권력을 아무런 대가 없이 국민들에게 주더라도, 대부분은 결국 피를 보게 됐다. 권력에 환장하는 인간들이 항상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승리할 경우 당연히 다음 순서로 나머지 국민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

“주인님이 자식들에게 실망하셨죠?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 어린 아이들이에요. 시간만 주면 얼마든지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어요. 다음 국왕을 맡겨도 안심할 만한 애들이 있을 거여요.”

“왕자와 공주들은 이미 특별한 신분이야. 보통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해. 그게 왕정제의 가장 큰 문제거든.”

“세종대왕은 처음부터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이 되셨어요.”

조선 세종은 1397년에 태어났고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 해는 1400년이었다. 혜영의 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억도 못할 어린 시절을 뺀다면 세종은 왕자로 태어났다고 봐야 했다.

“우리 자손들 중에서 그런 인물이 태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하지만 무능력한 왕이 태어날 가능성도 있어. 오히려 더 높아. 조선을 봐.”

울먹이는 혜영의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당장 왕정을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입헌군주제라도 국왕이 할 일이 있어.”

“저는 주인님을 믿어요. 하지만 불안해요.”

국왕이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욕심 많은 정치가들의 선동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국왕인 이민호가 백성들에게 너무 잘해줘서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무시당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산국 백성들은 이민호를 무척 아꼈다. 지금까지 고위 장교에 의한 군사반란 시도가 세 번이나 있었으나 세 번 다 부하 장교들이 고발해 체포된 다음 총살당했다. 고위 장교들과 달리 사관학교 출신 젊은 장교들은 군인이 정치에 욕심을 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조선 출신 양반들이 이민호를 비난하다가 일반 백성들에게 욕먹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이민호는 국왕으로서 백성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전하! 오늘 날 잡아서 왕자를 생산하소서!”

“왕가의 번성을 위해 쑴풍쑴풍 많이 낳으소서!”

혜영을 품에 안고 있는 동안 관객들로부터 별 소리가 다 터져 나왔다. 어느덧 경기가 중단되고 선수들까지 이민호와 혜영에게 박수를 보냈다.

============================ 작품 후기 ============================

금방 입헌군주제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준비하는데 못해도 30년은 걸릴겁니다.

그리고 절대왕정의 군주로 활동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요.

그러나 입헌주의 정치체제를 지향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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