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36화 (585/1,000)

00636  66. 백화제방  =========================================================================

“인문주의, 또는 인본주의라는 사상 계열이 마음에 들어. 그게 무슨 인간적인 문예인가? 신에 대한 인간의 반기지. 에라스무스나 몽테뉴도 훌륭한 사상가지만 그보다 앞선 시대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더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최고지. 나도, 사언 자네도 다 사람이니까.”

이민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고산국에서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을 받는다지만, 그 반대는 아니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이교도나 무신론자로 낙인찍히면 피곤할 것 같았다.

유럽 같으면 종교가 다른 군주를 몰아내거나 암살하는 일도 흔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주인공이 쓰고 나온 가면의 실제 모델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과 충돌했던 국왕 제임스 1세와 의원들을 웨스트민스터 지하에 폭약을 매설해 한꺼번에 날려버리려다 실패한 구교도였다.

“물론 남들도 사람이야. 여기서 여러 가지 개념이 발생하더군. 아직은 조금 허술하더라도 조만간 탄탄한 철학 체계를 갖출 것 같아. 유럽 사람들이 이념이나 학문 체계를 세우는 것은 참 잘하잖아?”

이민호는 안방준을 눈앞에 두고 학자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유럽에서 발행된 다양한 책을 번역해 보냈다지만 안방준은 겨우 10년 만에 유럽의 신학을 비롯한 사상 동향을 꿰차고 있었다. 반면에 이공계 출신이었던 이민호는 머리에 쥐가 나는 신학이나 따분한 사상 서적을 읽을 엄두를 못 냈다.

진정한 학자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사람이었다. 학자는 조선의 양반들이 지향하는 바이긴 하지만 누구나 학자가 될 수는 없었고, 조선 유학자들 중에서 진짜 학자라 할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양반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해서 경제적 여유가 있다지만 농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직에 진출해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해야 해서 공부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만으로 희열을 느끼는 자가 드물었다.

“입헌군주제는 알지?”

“요즘 몇몇 유럽 국가에서 도입하려는 제도 아닌가? 입헌군주제는 조선에 전해지지 않는 게 좋겠더군. 하지만 조선 국왕은 유럽의 입헌군주제 국왕보다 권한이 적을 거야. 차라리 폴란드 국왕이 낫겠어.”

“시대를 불문하고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국왕이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경우는 거의 없어.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아. 멍청한 후계자가 나올 것에 대비해서 고산국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는데, 괜히 권력지향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내줄까 걱정이야.”

본격적인 선거 전에 백성들에게 교육을 충분히 하더라도 정치인은 유권자를 속이는 전문가였다. 부동산 정책처럼 큰 이익이 걸리면 유권자들이 알고도 모른 척 속아주기도 했다.

“오호! 스스로 권력을 내놓겠다고?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그래도 우리 전하께서는 고산국의 창업자가 아니신가? 후계 왕들은 못해도 태조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지.”

“그래. 내가 세운 나라 권력구조를 내 마음대로 정한다는데 시비 걸면 그게 더 이상한 사람이지.”

“조선 양반들이 겉으로는 욕하면서 속으로만 좋아하겠군.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왕권을 신권으로 제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으니까. 그런데 혹시 조선 출신 양반 나부랭이들이 매사에 국왕이나 조정의 정책에 시비를 걸지는 않아?”

안방준이 시녀가 따른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다. 조선에서는 커피와 설탕이 너무 비싸서 고산국 왕궁에 왔을 때만 이렇게 호사를 부릴 수 있었다. 이민호는 차에 꿀을 타서 마시면서 안방준에게 국왕이 검소하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말도 마. 보탬이 되지도 않는 자들이 말만 많으니 시끄러워 죽겠어.”

“마치 스승이 말 안 듣는 제자 다그치듯 비난하겠지. 조선 국왕을 대신해서 고산국왕을 나무라는 기분을 느낄 거야. 누가 총독 권한이라도 줬나?”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고산국이 조선에서 나왔으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어.”

“그런데 그 노인들이 진짜 양반 맞아? 판서나 참판 같은 몇몇 고관들 빼고는 향시에도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지? 무식한 인간들이 신분제가 없는 고산국에서 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리다니, 너무 웃겨. 몇 명 안 된다는데 거슬리면 탄광에 보내버리지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안방준은 학자이면서도 매사에 급진적인 면이 있었다. 어째서 안방준이 서인에 계속 남아있나 했더니 같은 서인들과 취향이 맞기 때문인 것 같았다. 현재 북인 이이첨과 그 배후에 정인홍이 있어서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방준은 정계에 진출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그러나 나중에 인조의 서인 정권에서도 관리로 재임한 기간은 짧았다. 오히려 같은 서인인 김육과 대동법 문제로 충돌해 심하게 비난하고, 조정 내의 당파 싸움은 항상 말리는 쪽이었다.

“그래도 지식인이 많이 부족한 고산국인데, 다른 양반들이 이민 오지 않을까봐 내버려두고 있네.”

“고산국이 이 정도 단계로 성장했다면 조선 양반은 더 이상 필요 없을 텐데? 괜히 건국 초기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수구 세력만 키워주는 꼴이야.”

“맞는 말이야. 수가 적어서 신경 안 써도 되겠지만 짜증 나.”

“내가 여기 국왕이라면 아예 양반들을 고산국에 이민 못 오게 하겠네. 고산국은 조선과 전혀 달라.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국정운영 방침이 적용되는 것이 당연해.”

안방준이 시원시원하게 말을 쏟아냈다. 이민호도 적극 공감하지만, 이민 문제에서 아쉬운 쪽은 언제나 고산국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지식인인 양반 출신이 많이 필요해.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책임 질 자리에 앉게 되려면 아직 멀었거든. 최소한 30대는 돼야 젊은 혈기로 인한 실수가 줄어들 거야.”

“국왕도 총리도 20대인데 판서나 참판이 20대이면 좀 어떤가? 조선에서도 20대 판서는 자주 있었어. 국왕 자네도 나도 다 20대야.”

“자넨 유학자답지 않게 참으로 과격하군.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지.”

어차피 고산국은 건국 초기, 노련함보다 과감한 추진력이 더 필요할 시기였다. 안방준의 충고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안방준이 기득권에 사로잡힌 자라면 절대 못할 충고였다. 제대로 배워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가 이래서 더욱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겨우 20대에 고명한 유학자로 통하는 안방준이 고산국에 올 리는 없었다.

“무선 방송을 조선에서 듣는 방법이 없을까? 고산국에서 채록한 여러 나라 음악을 듣고 싶은데 조선에는 전기가 없어서 곤란해.”

“단말기는 산 모양이지?”

“그래. 은 열 냥이나 주고 샀어. 축음기도. 항구에 들어온 연락선에 가끔 찾아가서 듣고 있어.”

안방준은 조선 곳곳에서 책을 구해 고산국에 보내고, 고산국 관련 책을 조선에서 출간하는 일을 해왔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은 열 냥이면 조선 농민들도 잘하면 구할 수 있었다.

방송 전파를 조선에 쏘아 보내 문화적 영향력을 미치려면 먼저 건전지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파 월경 문제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시대라서 잘하면 조선을 고산국의 강력한 문화권으로 묶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문제는 조만간 해결할 거야. 그런데 자네 요즘 임진왜란을 정리하는 책을 쓰고 있다면서?”

“각 도 순영에서 자료를 구해서 조선 무장 열전을 쓰는 중이야. 통지 자네 이름도 넣어줄까?”

“농담 마. 나중에 외국 국왕이 됐으니 조선 무장이라고 하면 외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그럼 열전 표제로 나오지 않고, 총함장 덕풍부원군 밑에서 부하 장수로서 열심히 싸운 것으로 해주겠네. 고산국의 국왕이 이때는 삼도수군통제사의 부하였다. 크크!”

“쳇! 사실이긴 하지만 강조할 필요는 없어.”

대화를 하다가 안방준을 통해 조선 내부 권력층 사이에서 틈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광해군이 세자였을 때 공을 세운 이이첨과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인홍이 조정에서 너무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광해군 재위 말기에나 일어날 일이 조금 앞당겨서 진행됐다.

“참! 통지 자네는 남인 계열이지? 내가 서인으로서 북인을 비난한 것으로 생각하게.”

“내가 왜 남인이야?”

“총함장이야 무관이니 당색이 없다 쳐도, 통지 자네는 서애 대감이나 오리 대감을 높게 평가하잖아?”

서애는 류성룡, 오리는 이원익이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낙향해 지금은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민호가 고산국 의원들을 파견해 류성룡의 치질 증상을 완화시켜주었다.

같은 남인으로서 류성룡과 같은 시기에 파직됐던 이원익은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다시 좌의정으로 복직했다. 서인이며 농담정승인 이항복과 정치철새 이덕형은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 분들은 백성을 위해 좋은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하니까. 당파를 떠나 백사의 해학이나 한음의 용기도 존경해. 사언 자넨 왜 대동법을 반대하지?”

“공납 문제가 심각해서 손을 봐야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해. 하지만 사대동(私大同)을 대동법으로 정식 시행하려면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해. 공안의 작성이라던가, 대동법 시행으로 발생할 부작용을 미리 차단해야 한다는 거지.”

“이민 온 조선 농민들이 공납 문제를 가장 고통스러워하더군. 어떻게든 조선에서 알아서 빨리 해결하게.”

세금이나 군역 제도가 완전히 다른 고산국에서는 별로 관심을 가질 게 아니었다. 조선에서 개혁이 늦춰질수록 백성들이 고통 받고, 고산국으로 더 많이 이민 올 것이라는 욕심도 작용했다.

“고산국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반말을 할 수가 없다며?”

“무슨 소리야? 아이들은 어른에게 무조건 존댓말을 하고 어른은 처음 보는 아이에게도 반말을 할 수 있어. 이건 관습이나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아예 법에 규정돼 있어.”

“그런데 그게 공짜가 아니라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어른이 아이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들을 보호해주거나, 먹을 것을 주거나, 가르쳐주기 때문 아냐? 셋 중에 하나는 해야 어른 대접을 받지.”

그런 게 없으면 최소한 밥 한 끼 먹을 은전 한 푼이라도 반말한 어른이 아이에게 줘야 했다. 그래서 어른이 처음 보는 아이에게 말을 함부로 걸지 못했다. 이는 어른 대 어른 사이에도 적용돼서, 노인이 모르는 청년에게 반말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처럼 나이가 벼슬인 줄 알고 기고만장하던 자들은 호되게 당했다. 그런데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 제대로 정신이 박힌 자들이라면 처음 보는 젊은 사람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반말을 툭툭 내뱉는 것은 언어적 폭력이었다. 다만 아이에 관련된 법규는 고산국에만 있을 독특한 제도였다. 애를 낳는 것은 부모의 선택이지만, 애를 키우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는 개념이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이래서 조선 양반들이 고산국에 이민을 안 오는 거야. 어른 노릇 못하는 영감탱이들은 뒤에서 욕먹는 것으로 족해.”

“무슨 소리! 자기가 대우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우해야 해.”

친구가 적은 이민호에게 안방준은 즐거운 대화 상대였다. 두 사람은 괜히 열을 올리며 열변을 토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혜진이 대례복을 입고 꽃단장을 해서 혜영의 손에 이끌려 침전에 들어왔다.

각오하고 있던 이민호는 혜진과 맞절을 한 다음 합환주를 마시며 약식으로 혼인을 치렀다. 비록 후궁 신분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함께 성장하고 정치적으로는 긴밀한 동료였다. 이민호는 그 동안 안지 않았더라도 혜진을 소중한 아내로 여겼다.

그런데 침전 안에 호위들과 시녀들이 잔뜩 들어왔다. 바깥에는 어의 아줌마와 간호사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혜영이! 이런 식이면 분위기가 전혀 안 나잖아? 사람들 좀 내보내.”

“혜진이나 주인님의 안전이 먼저에요. 이때까지 사람들 많은 데에서 여자들을 안아놓고 무슨 말씀이세요?”

혜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침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혜진에게 물었다.

“혜진이 너는 안 부끄러워? 다른 사람들이 나가줬으면 좋겠지?”

“무서워요. 언니가 계속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휴우~ 알았다.”

혜진이 입은 복잡한 대례복을 벗기는데 혜영의 도움까지 받아 30분이나 걸렸다. 옷을 다 벗기자 혜진의 알몸이 드러났다. 이민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몸이었으나 한 동안 못 봐서 새로웠다.

“아랫사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얇은 금침이라도 덮으세요.”

“어휴!”

혜영이 자꾸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았다. 혜영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첫날밤이라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아직 승은을 못 입은 호위, 궁녀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구경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요즘 분위기가 그러니까 19금 장면은 얼렁뚱땅 넘어가겠습니다. 죄책감 들어서 그런 묘사를 할 맘도 안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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