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38화 (587/1,000)

00638  66. 백화제방  =========================================================================

“반응은 어때, 미카?”

얼마 전에 고산국의 장래 국가 체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백성들에게 의견을 묻는 교지를 반포했다. 왕궁 앞 게시판은 물론 모든 관공서 게시판마다 교지가 나붙고 신문과 무선방송에도 공고됐다.

이렇게 왕정제 국가에서도 왕이 신하나 학자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가 흔했다. 조선에서는 문과 시험의 책문 과목에서 방책을 물었고, 특히 세종대왕은 세법 개정을 앞두고 전국의 양인 이상 성인 남자들 17만여 명에게 5개월에 걸쳐 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고산국에는 제대로 된 유학자가 없어서 그쪽 의견은 생략하고 설명 드릴게요.”

“안 들어도 뻔하지. 무시해.”

예상대로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자칭 선비라는 노인들이 현인을 재상이나 ‘어린 국왕’의 스승으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 현인은 당연히 자기들 같은 유학자를 가리켰다.

현자를 국사(國師)나 왕사로 삼는다는 희망사항이 소문으로 부풀려지고, 어느덧 기정사실화되자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헐뜯는 상소를 올렸다. 능력도 없는 자들이 욕심만 많으니 남을 음해하는 것은 자연스런 순서였다.

재상은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스승이란 말에 이민호가 열 받았다.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누리겠다는 뜻 같았기 때문이다. 환관이나 외척과 다를 것이 없었다. 유독 선비들만이 이민호를 어린 국왕이라며 무시하는 것도 여전했다. 무시에는 무시로 답하기로 했다.

“의외로 신문 쪽에서는 별로 언급이 없어요. 사설 한 번쯤 낸 게 고작이에요.”

“나도 신문 사설 몇 줄 보기는 했는데 이것들 정말 성의가 없어.”

신문사들이 사설로 답하길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운운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뿐이었다. 역시나 선비나 신문사 사설에서는 왕정제를 당연히 기본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신문사 기자나 사주들도 대부분 조선 출신이었지만 뜻밖에 조선 왕정을 반면교사로 삼아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신문 사설은 세계 정복부터 명나라에 귀부해서 합병되자는 개소리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명나라에 귀부하자는 사설을 낸 신문사는 고정 독자가 뚝뚝 떨어져 나가 얼마 후에 폐간했다.

그래도 고산국의 언론 수준은 나쁘지 않았다. 역시나 기본 소득의 힘 덕분인지 먹고 살자고 기자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상대적인 박봉에도 열심히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서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주의 영향력보다 편집장 또는 편집회의가 기사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고정 수입인 정부 광고를 믿고 신문사를 차리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신문사들이 공동으로 진행한 공공장소에서 담배 안 피우기 운동은 이민호에게 더욱 큰 배반감을 안겨줬다. 혜영이 법적 근거도 없이 추진한 운동을 신문들이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확대해 광고주인 혜영을 기쁘게 했다. 기자는 시인과 함께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우는 직종이었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민호가 보기에 이것은 정치 개입이었다. 기자들은 자기들이 정치가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소녀의 인터뷰라든가, 담뱃불 때문에 산불이 난 이야기, 담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 이야기 등등은 죄다 사실이 아닌 창작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기레기라 불릴 짓을 하고 다녔다.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신문사들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니까 일단 통신사를 하나 만들자.”

“통신사라면 전화나 전보 회사인가요?”

“기본적인 기사를 취재해서 계약한 신문사들에 넘겨주는 언론사야. 신문사나 방송국의 취재 부담을 줄여주려고. 이렇게까지 키워주는데 제대로 언론 역할을 못하면 죄다 폐간시켜버려야겠어.”

언론도 정당처럼 정부나 국왕과 견해가 달라도, 같아도 쓸모가 없었다. 합리적인 논거에 의해 반대하고 감시하는 진짜 언론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산국에 이민 온 노인 선비들 중에서 안방준 같은 진짜 유학자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게 통신사였군요. 그럼 기자들을 신규 채용해서 교육하는 것보다는 국영 신문에서 기자 일부를 충원하면 어떨까요?”

“그게 좋겠다. 승진시키고 월봉도 올려줘. 따로 의견 달지 말고 객관적인 사실 취재만 꼬박꼬박 하라 그래. 나머지 심층 취재는 다른 신문들이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겠지.”

“통제는 어떻게 할까요? 국영신문처럼 예조에서 검열하게 해요?”

“사실 취재만 할 거니까 일일이 검열할 필요는 없어. 일단 국영 통신사로 출발하지만 국영 신문과 달리 취재와 편집에 완전히 자유를 줘. 나중에 외국에도 기자를 파견해야 할 거야.”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통신사가 탄생했다. 현재 쿠릴 열도와 필리핀에 중계국을 세우고 있어서 조만간 호주와 북미까지 날씨만 좋다면 기사 전달과 전보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잡음이 심해서 대륙간 라디오 방송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왕립대학교에 재직 중인 에스파냐인 교수가 신문에 좋은 의견을 많이 기고했어요. 국왕 자문기관을 협의체로 운영하는 안을 제안했어요. 행정부서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 역할을 맡겨도 좋대요.”

“국왕 자문기관이라! 좋지. 조선 같으면 중추부에 삼사 역할을 합한 것이겠구나.”

유럽 국가들에 설립된 국왕 자문기관으로서의 초기 의회와 역할이 비슷했다. 그 교수는 현재 에스파냐 국왕의 섭정이나 다름없는 총신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 대신 자문에 그치고 실제적인 권한을 주면 안 된대요.”

“왜?”

“자문기관이 또 다른 권력기관이 돼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할 거래요. 총신도 마찬가지로 왕권 약화를 우려하는 거여요.”

이민호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의회를 세울까 고민하고 있는데 에스파냐 사람답게 정반대였다. 그래도 어쨌든 좋은 의견이었다.

관료들 중에서도 좋은 의견을 낸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관료들은 신분을 감안해 권력 구조를 비롯한 국가체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주로 행정개혁을 논했다. 쓸 만한 의견을 취합해 국정에 반영하고 제안자에게 포상하거나 승진시키기로 했다.

“상소나 신문의 독자 의견 기고란에서도 괜찮은 의견이 많았어요.”

“뭐가 있는데?”

“국초에 왕권 확립을 위해 어서 정식 왕비를 두시래요. 혜영님이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아요.”

미카와 이민호가 동시에 혜영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혜영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혜영이 좋다면 나도 좋지.”

“저는 생각 없어요!”

그 문제로 몇 번 떠봤지만 혜영은 항상 반대였다. 이민호의 생각이 혜영에게 암암리에 전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아! 정치는 아니고 경제 문제인데요. 유럽과 교역하는 북미 동해안만 따로 유럽보다 약간 낮게 물가와 임금수준을 맞추라는 의견이 있어요. 운송비를 감안해서 유럽에 수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 생각도 해봤는데, 고산국의 모든 물자가 북미 동해안으로 몰리면 어떻게 해? 물가는 시간이 흐르면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야.”

“파나마 운하에서 통제하면 된대요.”

“흐음! 물류 통제라. 수출할 때 이익을 본토와 수출항에서 나눠먹어도 되고. 좋네. 대신 국영상단의 역할이 커지겠지. 하지만 내년 하반기면 북미 횡단 철도가 완성될 텐데.”

민영 상단을 활성화시키려는 정부 시책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현재의 일방적인 무역 구조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기에 어서 보완해야 했는데 마침 좋은 의견이 나왔다.

독자 의견을 낸 사람은 왕립 대학교 학생이었다. 언제 한 번 왕궁으로 초청해서 의견을 자세히 묻기로 했다. 잘하면 경제 정책을 맡길 인재 하나를 얻는 셈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왜?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야?”

“두려워서 의견 표출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변하든 별로 상관없다는 거여요. 다만 주인님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넘어서 의지하는 것 같아요.”

미카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정보국이라는 조직의 활동 일부는 공개돼 있었다. 그러나 몰래 남의 뒤를 캐고 다니는 비밀경찰로서 백성들에게 백안시당하는 조직이 아니라 경찰과 비슷한 정부 조직의 하나로 여겼다.

수사권이 없어서 밤에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보국 요원들도 그냥 보통 공무원이었다. 상인들의 탈세 문제에 자주 개입해서 경찰이나 호조에 정보를 넘겨주는 탓에 정보국이 호조 소속인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군. 내가 없을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나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틀림없이 아주 오래 사실 거여요.”

“그래, 그래. 미카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겠다.”

미카가 이민호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등을 토닥여주는데 갑자기 옆에서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했다.

“주인님은 오래 사셔야 해요. 이렇게 판을 벌려놨으니 주인님 아니면 누가 감당하겠어요?”

“알았어. 이번에 인재를 얻으면 혜영이 일을 덜어줄게.”

오래 못 살면 혜영이 지옥까지 쫓아와서 멱살을 틀어잡고 흔들 것 같아 겁이 났다. 이민호는 천국 갈 생각은 이미 버렸다.

“그런데 여자들은 의견을 잘 안 내네. 수줍어서 그런 거야?”

“여자들이 정치적 의견을 내면 욕먹으니까요.”

“총리도 혜영이고 정부 곳곳에 여자들이 포진했는데 왜? 일을 잘 하잖아?”

“저나 후궁들이야 주인님의 여자이니까 다르죠.”

“이해가 안 돼. 조선에서도 선왕이 일찍 붕어하면 대비가 어린 왕의 섭정을 맡잖아? 물론 결과가 좋은 적은 없었지만.”

인종이 죽자마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 독살설을 믿게 만든 문정왕후는 대왕대비로서 명종의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명종이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10년 동안 수렴첨정을 하다못해 다 큰 국왕을 회초리로 때릴 정도였다. 동생 윤원형 등 외척들이 발호하게 만들고 승려 보우에게 병조판서를 맡기기도 했다.

“생활이나 육아 관련해서는 좋은 의견이 많이 나왔어요.”

“오! 괜찮은 의견 있으면 정리해서 보여줘.”

혜영이 두툼한 책 한 권을 건넸다. 잠시 살펴보니 이민호가 보기에는 정말 사소한, 그러나 그대로 놔두기에는 조금 불편한 건의사항이 엄청나게 많았다. 골치가 아파진 이민호는 혜영에게 맡겨서 다 들어주라고 했다.

“여자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 되는데 말이야.”

“왕립 대학교 학생은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조금 많아요. 조선과 달리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서 다행이에요.”

“학비가 공짜니까. 그런데 남자들은 군대 갔나?”

“사관학교와 비슷한 나이의 부사관들까지 포함하면 비슷할 거여요.”

인구 비례로 따지니 대충 그 정도였다. 어느 나라나 건국 초기의 군대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재가 몰리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소수겠지만 군에 있으면서 기회를 봐서 권력에 접근하려는 의도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여기 나온 대로 정책에 다 반영해요? 저녁에 축구나 배구 같은 운동을 못하게 하자는 건의도 있어요. 대신 학생들이 학교 수업 외에 예술 교육을 받을 기회를 많이 달래요.”

“무슨 소리야?”

이민호가 몹시 두려워하던 건의사항이 두꺼운 책 안에 숨어 있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학부모 등쌀에 애를 잡는 경우를 많이 봤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놀이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불만이 많아요. 그래서 날이 지면 모든 운동을 못하게 하자고 해요.”

“아줌마들 연속극 못 듣게 하면 좋겠어? 그건 빼! 애들은 그저 실컷 놀게 해줘야지.”

고산국에서는 학교성적을 중요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성적은 진학할 때 조건이 되지 못하며, 심지어 중학교 때까지는 아예 성적을 매기지 않아 시험도 없었다. 관리 채용 시험도 면접이 훨씬 중요했고, 보통은 미달이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성적 외에도 갖가지 이유로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금하려 했다.

한국의 부모들은 공개적으로 만화를 불태우고 애니메이션을 죽이고 게임도 시간 통제를 넘어 아예 못하게 하려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국산 만화에 대한 사전 검열이 심한 반면에 일본 만화의 불법 번역본 유통은 거의 막지 못했다. 그래서 성인은 모자이크된 만화를 보고 초등학생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원판을 봤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걱정해요.”

“돌대가리들한테 공부 가르쳐서 뭐해? 사언, 안방준 봤지?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들만 학자로 성장하면 충분해. 직장에서 필요하면 그 직장에서 자세히 가르치겠지.”

“맞아요. 그럴 때는 눈에 불을 키고 배우더라고요.”

이렇게 해도 고등학생들에게 평가시험을 보게 하면 성적이 예상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딱 정해진 수업시간에만 공부해도 학생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모르면 모르고 넘어가도 상관없었다. 자세히 설명한 참고서도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므로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보면 됐다.

“수학여행을 매년 보내는 건 조금 심하지 않아요?”

“왜? 그때야말로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하는 시간인데. 교과서에 그림으로 자세히 그려줘 봤자 제대로 이해하겠어? 산업현장에서 보고 익히는 게 확실하지.”

수학여행 중인 학생들의 화사한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을 수 없었다. 특히 희망직업 중의 하나인 산업을 시찰할 때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부모 마음에는 항상 곁에 두고 싶어지거든요.”

“그건 그렇겠다. 그럼 원하는 부모는 수학여행에 따라가게 해줘. 대신 학부모는 수학여행 비용을 내라고 해. 원래 수학여행이란 것이 부모가 못해주는 것을 학교가 대신 해주는 거잖아?”

당장 그해 가을부터 수학여행단의 규모가 두세 배로 늘어났다. 교사 외에도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자기가 아는 분야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학생들의 자유가 조금 제한됐으나 부모와 함께 여행 가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 사계절 내내 가족단위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물론 기차와 배 등 수학여행용 수송수단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했다. 아이들에 대한 범죄와 사고는 형량이 두 배였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다양한 의견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