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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39화 (588/1,000)

00639  66. 백화제방  =========================================================================

오전에 이민호와 호위대 몇 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국왕 행렬이 항공대 기지로 향했다. 평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활주로는 2,200미터 길이로 나중에 수송기나 여객기 같은 대형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미리 길게 만들었다. 기지 상공에는 비행기 두 대가 날고 있었다.

기지 북쪽 작은 항구에는 뭉툭하게 생긴 수상비행기 한 대가 물에 떠 있었다. 수상비행기는 초계, 탐색, 구조 등 해군에 몹시 도움이 되는 항공기였다. 순양함에서 사출기를 띄워 이륙시키고 작전이 끝나면 물에 착륙해 기중기로 끌어 올리는 방식으로 활용할 예정이었다.

“구경꾼이 많군.”

항공대 기지 바깥에 수백 명이 몰려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목이 뒤로 넘어가 자빠지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구경꾼 중에 외국인 유학생들도 많아요. 비행기는 중요한 기술인데 숨기지 않나요?”

“베낄 능력이 있으면 베끼라고 해.”

기지 정문을 통과한 장갑차가 관제탑 옆에 정지했다. 이민호는 자신만만하게 민영에게 대답한 다음 장갑차에서 내렸다.

- 바아아아앙~

장갑차에서 내리자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내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동체 위아래에 날개가 붙은 복엽기가 저렇게 박력 있게 날 줄은 몰랐다. 현재 기지 상공에서 단엽기와 복엽기가 가상 공중전을 치르고 있었다.

고산국의 앞선 기술에 영향을 받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항공기를 만들려면 최소 백 년은 넘어야겠지만 군대는 만에 하나에도 대비해야 했다. 그리고 가상 공중전을 치름으로써 조종사들의 조종기술이 대폭 향상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배면비행을 마음껏 할 정도로 비행기가 안정성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항공기 제작자들은 비행기가 추락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고, 시험 조종사들도 사고 위험이 높은 조종은 자제했다.

“쉿!”

관제탑의 높은 계단을 오른 이민호는 경비병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막으려 했다. 비행기 두 대에 집중하고 있는 관제사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국왕전하 납시요!”

“제자리에서 계속해!”

그러나 국왕 행렬에 놀란 경비병이 냅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분명히 이민호가 조용히 하라고 일렀건만 이럴 때는 어명이 통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나서 꾸중을 듣는 것이, 소리를 안 지르고 나중에 징계를 받는 것보다 약할 것이라고 믿는 탓이었다. 이런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경비병은 괜히 재수 없게 억울한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관료사회나 민간 회사를 불문하고 권위주의적인 조직에서는 항상 이 모양이었다. 방문하기 전에 미리 경비병에게 주지시키더라도 원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이 또한 이민호가 국왕인 고산국의 관행이기에 뭐라 나무라지 않았다.

“기지사령관! 전탐기는 잘 작동하고 있소?”

“보십시오, 전하. 지금 전시기의 눈금 하나 차이를 100미터로 조정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정신이 없군요.”

현재 관제탑에만 전파탐지기를 설치했고 높은 산에 따로 레이더 기지가 없었다. 이 시대에 날아다니는 것은 새 아니면 UFO밖에 없었기에 괜히 공중을 감시하느라 인력과 장비를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항공대장님이 복엽기에, 제2 편대장이 단엽기에 탑승했습니다. 오늘은 3차원 공중전 기술 몇 가지를 시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높이를 속도로 치환하는 조종술입니다.”

“벌써요? 사고뭉치 녀석! 비행기가 추락하면 조종사 놈들 치료나 잘해주시오.”

“구급차가 활주로에 대기 중입니다, 전하.”

공중전 전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2대 또는 4대 편제로 움직여야 하기에 한 대 단위로 공중전 기술을 연마해봐야 별로 쓸 곳도 없었다. 게다가 오직 고산국에서만 비행기를 하늘에 띄울 수 있기에 하늘에는 적기가 아예 없었다. 차라리 지상 폭격 훈련이나 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지금은 기체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확인해보는 시험 비행 중이었다.

“참매! 관제탑이다. 기분이 어떤가?”

- 관제탑, 참매다. 아주 좋다. 좋아 죽겠다.

“안타깝지만 조종 시험이 종료됐다.”

- 알았다. 착륙하겠다.

기지사령관이 복엽기에 통신을 보냈다. 강력한 바람으로 인해 소리가 흩어졌지만 비행 중인 항공기와 관제탑의 통신은 원활하게 잘 이뤄졌다.

“전하! 모든 조종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역시 항공대장님이 조종하는 비행기의 궤적은 아름답습니다.”

“아주 멋졌소. 이만 내려가겠소.”

이민호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활주로 옆에 높이 선 관제탑에는 승강기도 없었다.

- 푸르륵~

활주로에 복엽기가 사뿐히 내려앉고 시동이 꺼졌다. 이어서 단엽기도 안전하게 착륙했다.

비행모를 벗고 복엽기 조종석에서 내리는 멋진 사내는 총함장 이순신의 아들 이면이었다. 벌써부터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면이 오랜만이야.”

“전하!”

경례하려는 이면에게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우리 사이에 전하가 뭔가? 편하게 불러.”

“그럼 아저씨!”

“그냥 전하라고 불러줘. 그런데 저건 뭔가? 단엽기는 실패했다고 보고하지 않았나?”

복엽기나 단엽기나 일차대전 초기에 활약한 전투기들에 비해 덩치가 꽤 컸다. 단엽기의 주익은 동체 하단이 아니라 상단에 붙어서 세스나기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그런데 단엽기의 동체 앞쪽에 자그마한 카나드가 달려 있었다. 이면이 새로 만든 단엽기에 대해 설명했다.

“단엽기의 조종성이 워낙 떨어져서 임시 조치로 앞에 작은 날개를 덧붙였습니다. 최 대위가 비거로 오랫동안 훈련을 쌓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추락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상하게 풍동 실험하고 많이 달라서 걱정입니다.”

이면은 항공대장 겸 시험기 조종사로서 항공기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기억을 짜내서 어설프게나마 이론을 제시하면 이면이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비행기 제작에 적용했다.

“혹시 말이야. 풍동 실험에서는 공기의 점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수조에서 하는 배 안정성 실험에서도 물의 표면장력을 감안해야 할 때가 있거든. 실제 배에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자그마한 욕조에서는 다르지.”

“공기 알갱이 크기가 일정한 반면 모형 비행기와 실제 비행기의 크기 차이가 커서 공기의 영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까? 흐음.”

“정 어렵거든 실제 비행기로 풍동 실험을 해.”

“비용에 시간에 자재에. 으윽!”

실제 항공기를 천장에 걸어놓고 바람을 불어넣는 풍동 실험실이 있었으나 얼마 전 사고로 전소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 여파로 지금은 다시 작은 모형기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항공기 실험이라고 추락사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다 보니 도처에 예기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면은 항공대장 겸 시험조종사로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항공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급할 건 없어. 안전이 최고야.”

“잠시만 제 하소연을 들어주십시오. 제 계급이 소령입니다, 전하.”

“왜? 항공대장이니까 더 승진시켜 줄까?”

항공대장 이면은 소령, 기지사령관은 대령이었다. 그러나 이면이 기지 소속이 아니라 기지가 항공대 소속이었다. 동양에서 다 그렇듯 직급보다 직책이 우선했으니 이면이 상급자였다.

아직 인원이 너무 적어 국왕 직속인 항공대를 공군으로 독립시키려면 아직 멀었다. 그리고 항공대를 아예 해군에 소속시켜 해군항공대가 될 수도 있었다. 조직 문제는 항상 이민호를 골 아프게 만들었다.

항공대의 인원 충원에는 문제가 없었다. 비행기가 왕도 주변 상공을 날아다니면 젊고 담력 있는 젊은이들이 조종사가 되겠다고 몰려왔기 때문이다. 항공대 사관학교는 아직 없고 육군과 해군 사관학교 졸업생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조종사 학교에 입교시켜 추가로 교육을 실시했다.

“그게 아닙니다! 승진할수록 비행기를 조종할 시간이 계속 줄어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째서 항공대에서는 대령부터 실전 상황에 참가를 못합니까?”

“그거야 대령 정도 되면 작전 지휘에 전념해야 하니까. 축구나 농구에서도 그렇잖아? 감독은 감독이 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항공대장 직 반납하고 계급도 강등되면 안 됩니까? 다른 친구들도 좋은 조종사들이라서 항공대장 직책을 훌륭히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이차대전 이전 미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계급을 강등하고 현장 전투 지휘관으로 전출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면만한 인재도 드물었다. 실험과 제작은 물론 시험비행까지 거의 이면이 맡아왔고, 큰 사고 없이 항공기 개발을 이끌었다.

“기술자나 관제사들이 그러는데 자네가 가장 낫다던데?”

“아아! 저는 너무 잘 나서 불행한 거군요.”

“여제독의 딸은 잘 지내나?”

아체 술탄국의 여제독 말라하야티의 딸이 생각나서 물었다.

“하와요? 첫 날에는 얌전한 척하더니 며칠 만에 금방 본색을 드러내서 지금은 아주 말괄량이입니다.”

“잘 크고 있어?”

“왜 음흉하게 웃으십니까? 저는 그런 말괄량이 꼬마한테 장가 들 마음은 절대 없습니다.”

“그 꼬마 말고도 어서 결혼해야지.”

총함장 이순신의 막내아들이며 인물도 훤칠해서 중신애비들이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러나 이면은 바쁘다는 이유로 혼담을 모두 거절했다.

“주군이신 전하께서도 아직 정식 성혼을 하지 않으셨는데 신하인 제가 어찌 감히 먼저 성혼을 하겠습니까?”

“핑계도 좋다. 내 아내가 160명이야. 고산국 항공대장, 장래의 공군 사령관께서도 얼른 장가 가셔.”

혜영에게 정확한 숫자를 보고 받았는데 잊어 먹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항공대가 해군에 소속될 수도 있다던데 정말입니까?”

“그렇지. 왜? 싫어?”

“아닙니다. 그럼 전하께서 옛날에 말씀하신 것처럼 항공모함에서 비행기가 출격할 수 있다는 뜻이 맞습니까?”

이면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서 마치 신기한 것을 처음 본 10대 중반 소년 같았다.

“항공모함 만들려면 아직 멀었어. 먼저 대형 수송기와 여객기부터 만들어.”

“제가 1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습니다.”

“그럼 그만큼 항공기 개발이 늦춰질 뿐이야.”

이민호는 등산과 모험을 좋아하는 이면을 보고 비행기를 만들 생각을 떠올렸다. 이면은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었다. 이민호는 아이디어만 제공해줬을 뿐 이면과 기술자들이 제작부터 비행과 전술까지 다 해냈다.

라이트 형제가 1903년에 처음 비행기를 띄우고 나서 1914년부터 시작된 일차대전 때 수행된 항공전 기간 동안 전투기 개발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고산국은 당분간 항공전이 없겠지만 강력한 기관들이 이미 개발돼 있었고 무제한에 가까운 왕실의 지원 덕택에 항공대는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다.

“수송기든 여객기든 폭격기든 얼른 만들겠습니다.”

“가벼운 알루미늄 합금을 만들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나무나 천을 비행기 소재로 안 써도 될 거야. 그런데 항공모함을 10년 안에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차대전 이전에 활용된 수상기 탑재 순양함이나 호위항모 수준이라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의 꿈이 너무 높았고, 현실이 따라주지 못했다.

“문제는 상대할 만한 적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걱정입니다.”

“어? 적이 없어도 상관없어. 평화로울 때에도 비행기와 항공대는 쓸모가 많으니까.”

비행기를 한 번이라도 타본 백성들의 애국심이 대폭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기지 바깥에서 구경하는 소년들의 이글거리는 눈에서 비행기를 향한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저 꼬마들의 눈빛이 비행기 날개를 뚫겠습니다. 꼬마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을 활주로에 초대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도 좋지. 미래의 조종사인 꼬마들 앞에서 비행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게. 진정한 조종사라면 비행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런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모아 항공대를 발전시켜나가게.”

“물론입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전하.”

이면은 이민호를 국왕이나 아버지 친구에서 더 나아가 중요한 동료로 인정해줬다. 이면이 있어서 항공시대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와이나 북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날이 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중간에 비행기 개발 중인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다음 회는 국왕자문기관인 추밀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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