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44 67. 1600년 =========================================================================
“유구국 상선 51척이 파나마와 동해국 사이를 꾸준히 왕복하고 있어요. 철도 공사 현장에 선로나 식량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여요.”
“아라 공주가 아주 잘해주고 있소. 사고는 없었소?”
집무실에서 보고하는 아라 공주는 어릴 때처럼 이민호의 품에 쏙 안긴 채로 보고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제는 다 큰 아라 공주를 안고 있자니 혜영이나 민영에게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아직 승은을 입지 못했더라도 아라 공주는 국초부터 왕궁에 자리 잡은 후궁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혜영이나 민영은 아라 공주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쓰럽게 여겼다.
그래서 이민호는 더 부담이 갔다. 기품 넘치는 미녀로 자라난 아라 공주의 얼굴에 아직도 옛날의 어린 모습이 남아 있어서 욕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상선들은 탐사가 끝난 안전한 항로만 이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하늘에 구름만 끼어도 항구에 피신해서 위험 자체가 없어요. 이렇게 해도 원래 30척이면 충분한 일인데 전하의 어명에 따라 50여 척이나 투입하고 있어서 철도 공사장의 자재 수급에도 문제가 없어요.”
“아주 잘했소. 나하에 건설한 철도는 잘 운영되고 있소?”
“물론이에요, 전하. 유구 사람들은 전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발을 벗고 기차를 탄답니다.”
“어허! 객차 바닥을 항상 깨끗이 청소해야겠구려.”
왕성인 슈리 성 앞에서 항구까지 5km도 안 되는 짧은 거리에 철도를 놓았다. 중간에 역이 두 개나 있었으나 유구국 사람들은 시장과 인구가 밀집한 거리 등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북쪽 우루마 혹은 나고까지 철도를 연장시킬 계획이었다.
이렇게 해서 유구국 선원들은 자기들이 운반하는 쇠기둥 같은 선로가 무엇에 쓰이는지 확실히 알게 됐고, 위대한 건설을 위한 해상운송에 참여한다는 자부심도 높아졌다. 작은 섬나라에 철도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으나 유구국 사람들에게 시대가 확실히 변했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깨우쳐주었다.
“전하! 조선이나 구주에도 짧은 철도 노선을 건설하는 게 어떨까요?”
“흐음. 실제적인 수송효과보다 교육효과가 훨씬 큰 것 같소. 생각해보겠소. 하지만 한성 부근에 철도를 놓으려면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 같소.”
만약 조선에 경인선을 건설한다면 문화적인 충격이 어마어마하게 클 것으로 예상했다.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로 시작되는 민요 ‘신고산 타령’이 철원에서 압록강까지 퍼지면서, 한성뿐만 아니라 변방인 강원도와 함경도에 사는 대한제국 백성들까지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케 됐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이라면 몰라도 양반들은 철도 도입을 목숨 걸고 반대할 것 같았다. 기차가 달리는 현실과 유교는 전혀 들어맞지 않았고, 기존 사상체계가 무너진다면 양반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시멘트 공장이 제천과 영월에 있잖아요? 태백산맥을 넘기 힘들어 아산까지 마차도로가 완성돼 있어요. 그 도로 옆에 철도를 놓는 거여요. 처음에는 화물차만 연결하겠지만 객차를 하나씩 늘려 가면 조선 백성들도 많이 깨우치게 될 거여요.”
“남북 축이 아닌 동서 축이라면 조선 조정에서 국방상의 이유를 들어 반대할 가능성도 적겠구려.”
현재 강원도에서 시멘트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천 명, 시멘트를 충청도 아산까지 마차로 수송하는 사람들이 또한 수백 명 단위였다. 가족까지 합하면 시멘트 생산으로 인해 먹고 사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도로가 지나는 여러 고을은 물론 조선 왕실에서도 이익을 얻고 있었다.
“알았소, 공주.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공사가 끝나면 추진해봅시다.”
“주인님! 조선과 척을 질 이유는 없어요. 조선 조정에서는 우리가 조선 인구를 유입하기 위해 수작부리는 것으로 판단할 거여요.”
예상대로 혜영이 반대하고 나섰다. 혜영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조선의 멸망을 바랄 수도 있겠지만 고산국 총리로서 당연한 판단을 했다.
“알고 있어. 그러나 조선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
“설마 전쟁을 원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이제 더 이상 조선에서 고산국으로 인구가 유입되지도 않았고, 조선인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딱히 장점도 없었다. 오히려 양반 나부랭이들이 유입해 들어올수록 이들이 고산국을 유교 사회로 만들지 못해 안달하면서 시끄러워졌다. 양반 대접, 어른 대접 받기를 강요하며 남들을 밑에 두고 깔아뭉개려는 자들은 고산국에 필요 없었다.
만약 조선에서 정쟁에 패배한 정파가 집단으로 이주한다면 조선 대신 고산국을 자기들이 상상하는 나라로 바꿔나가길 원할 수도 있었다. 이민호나 고산국 백성들이 결코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인구가 폭발 중인 고산국은 앞으로 십 년 정도만 기다리면 인력 부족 문제에서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인구 부족으로 인한 문제 대부분이 해결된다.
신분제가 없는 고산국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다수를 점하는 사회에서, 조선의 낡은 체제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소수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을 요구하는 양반들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으므로, 이제는 무작정 인구를 늘리는 것보다는 국민 통합이 더 필요한 시기였다.
“형제 국가로서 조선을 어느 정도 높은 단계에 올려놓으면 좋겠어. 고산국 속국보다는 낮고 유럽이나 명나라보다 높은 정도로, 더 이상 이민자가 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조선 백성들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닫히는 셈이군요. 하지만 조선이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을 거여요.”
“당연하지. 하지만 고산국에서 조선에 갖고 있는 이권이 은근히 많아. 은광이나 시멘트 공장, 양식장 같은 곳 말이야. 이런 지역 위주로 더욱 발전시켜서 지역간 불균형을 초래해볼까 해.”
제주도는 물론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발전한 곳이 되면서 주변 다른 고을 주민들로부터 시샘을 받았다. 일부는 고산국에 이민을 가서 고산국 군대 등 사회의 주축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조선에서 이민자가 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현상유지가 아닌 고산국을 따라오는 정도로 조선이 꾸준히 발전하기를 이민호는 바랐다. 권한은 별로 없다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인 추밀원 개설을 앞둔 시점에서 고리타분한 유권자 수백만 명이 한꺼번에 생기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 지역들은 따로 도와줄 필요도 없이 우리와 교역만 계속해도 충분히 발전할 거여요. 주인님께서 몇 가지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제주도가 그렇게까지 발전한 것이 저는 더 신기해요.”
“관리들이 제대로만 하면 제주도 정도까지는 쉽게 발전할 수 있어. 명심해. 조선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조선에 남은 친척들이 다른 나라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거야. 그리고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큰 불만 없이 그대로 고향에서 계속 살게 해주는 거야.”
조선 후기에, 특히 1670년에 경신 대기근 등 먹고 사는 문제가 간혹 발생했으나 한때에 그쳤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 자체는 없었으나, 외국에 비교해 지나치게 가난했다. 심지어 오랫동안 경제발전이 정체된 청나라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졌다. 북경을 다녀온 사신과 역관들을 중심으로 초기 실학사상이 생겨난 이유가 있었다.
3월 초순, 부활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가는 기독교 신자들이 여객선에 탑승했다. 승객들은 고산국과 마카오, 마닐라 총독부, 그리고 소수 명나라 기독교인들이었다. 교황청 대사도 여객선에 동승했다.
부활절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춘분 다음 보름달이 뜬 다음의 첫 번째 일요일이었다. 1582년 그레고리력으로 역법이 바뀌면서 10일의 오차를 수정한 다음 1600년의 부활절은 4월 2일로 정해졌다. 부활절은 3월 22일에서 4월 25일 사이에 있는데 올해는 빠른 편이었다.
지상군도 장비와 함께 탑승을 완료했다. 기병 연대와 구르카 여단, 그리고 1개 중대를 동해국에 보내 감편된 장갑차 대대는 이제 해외 원정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잘 다녀오십시오, 전하. 제 막내아들 놈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동안 나라를 잘 지켜주십시오, 총함장님.”
이순신의 아들 이면이 이끄는 항공대 수상비행기 비행중대는 정비대와 함께 임시로 해군 소속으로 편제됐다. 나중에 해군 항공대로 고착될 수도 있었다.
“왜 대형 여객선에 타지 않으세요? 주빈실이 넓어서 편할 텐데요.”
“첫 손님은 교황으로 하려고.”
혜영이 개똥이를 데리고 부두에 나왔다. 장남 개똥이가 씩씩하게 이민호에게 인사했다.
“성공적인 원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바마마.”
“그래. 그 동안 동생들 괴롭히지 말고 엄마를 잘 모셔라.”
“동기간의 애정표현이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제발 이름 좀 바꿔주세요. 개똥이가 뭐에요? 애들한테 놀림 받을 거여요.”
“후후! 너 하는 꼴을 봐서.”
현대 한국에서 법원에 개명 신청을 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부모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로 지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전근대 시대에 역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천하게 짓는 차원을 넘어서서 아예 자식을 모욕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과 달리 이민호는 아내들과 협의해서 자식들의 이름을 이미 정해놓고 주민등록도 마쳤다. 처음에는 햇살, 들판, 바다 등 밝고 희망 섞인 기대가 반영된 그런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자식 숫자가 30명이 넘어가면서 점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놀림 받을 만한 이름은 없다고 자부했다. 그래도 여가수 김정은처럼 미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때문에 나쁜 이름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후궁들, 자식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눈 다음 이민호가 순양함에 탑승했다. 그 동안 원정군 병사들은 물론 성지 순례자들까지 후궁들과 자식들 숫자를 보고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내와 자식들 190명과 인사를 나누는데 겨우 5분을 배분한 것이 애초에 잘못이었다.
“왕실이 나날이 번창하는 것 같아 기쁩니다, 전하.”
“비꼬는 소리로 들리는군. 전대장도 득남을 축하하네.”
새로 함장 겸 전대장이 된 사람은 눈에 익은 장교였다. 임진왜란 때 단기 장교과정을 수료한 청년이 어느새 대령으로 승진해 호위전대장을 맡았다.
“전하께서 허해주시면 바로 전단장께 출항 준비 완료를 보고하겠습니다.”
“언제든 출발하도록 전단장에게 보고하게.”
예인선이 양쪽에서 배를 잡아당기면서 순양함들에 이어 거대한 여객선이 부두에서 떨어졌다. 국왕좌승함도 자력 운항할 수 있는 상태에서 항구 바깥으로 침로를 잡았다.
이때 부두에 나온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 이제는 천세가 아니라 만세로 완전히 고착된 것 같았다. 명나라에서도 아는 것 같았지만 고산국 백성들이 무식하다는 식으로 혀를 찰 뿐, 뭐라고 하지 않았다.
국왕좌승함과 대형 여객선을 중심으로 구성된 성지 순례 원정 함대는 부두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하늘은 푸르고 바닷물은 적당히 출렁거렸다.
백성들이 기원하는 무사귀환은 국왕과 원정군 장병들의 안전한 귀환만을 뜻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함대는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중이었다.
아무도 그런 임무를 고산국에 맡기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가 평화로울수록 전란 중일 때에 비해 국방비가 적게 들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고 주변국들에게 강요해 고산국 상선들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하는 것은 고산국의 가장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다. 미국이나 로마제국과 같은 상황이라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나라 백성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전하! 수상비행기를 출격시킬 시간입니다.”
“전대장! 이제부터 내 명령이 아닌 전단장의 명령에 의해 항해할 것 아닌가? 더 이상 내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나 이민호는 보고를 받은 다음 쌍안경부터 챙겼다. 훨씬 선명하고 거리 측정까지 가능한 것이 외눈 망원경과 다른 점이었다.
- 푸하악~
“떴다!”
국왕좌승함 옆에서 항해하는 순양함에서 솟구치는 허연 연기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날개를 펼친 뭉툭한 모양의 수상비행기였다. 항공대장 이면이 탄 비행기였다.
다른 순양함에서도 차례로 수상비행기를 사출시켰다. 수상기 네 대가 잠시 함대 상공을 비행하더니 세 방향으로 흩어져 초계 임무에 들어갔다. 민영이 소녀처럼 꺅꺅 소리를 질렀다.
“주인님! 여객선에 탄 사람들이 놀라는 것 좀 보세요.”
“턱이 빠지겠다.”
사실 이 시대에 수상비행기는 항해에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력문제만 해결되면 중간에 사고가 좀 났지만 여러 나라에서 금방 만들어낸 것이 비행기였다.
터보샤프트 엔진이 개발된 시점에 이미 항공기의 출현을 예정하고 있었다. 항공역학에 관련된 기술과 경험이 좀 더 축적된다면 더욱 발전된 비행기를 만들 여력이 충분했다.
북미와 왕복하는 용도로도 비행기를 사용하겠지만, 이민호는 더 이상 전투를 하기 싫어서 비행기를 만들었다. 고산국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면 다른 나라에서 고산국에 도전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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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원정은 짧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인도와의 관계 설정은 아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