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51화 (600/1,000)

00651  69. 성지 순례  =========================================================================

69. 성지 순례

“무슨 배가 이렇게 많아?”

“유럽이 보유한 모든 배가 지중해에 뜬 것 같습니다, 전하.”

전대장의 말처럼 바다에 온갖 배가 잔뜩 떠 있었고, 전파탐지기의 전시기 화면에는 흰 점들이 한가득 떠서 반짝거렸다. 이 모든 배들이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순례자를 실은 범선 또는 범노선이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배들을 피해 함대는 남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출발 전에 수시로 레반트 지역에 탐사대를 보내고 어용상인들을 통해 현지 상황을 확인했다. 아슈도드와 텔아비브를 비롯한 예루살렘 서쪽 항구들은 확장 공사 또는 보수 공사를 완전히 마쳤다. 탐사대 지휘관들은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주변 편의시설도 상태가 괜찮았다고 보고했다.

“우리가 늦은 건 아닌데, 조금 걱정되네.”

“대부분 범선이니까 충분히 여유를 갖고 출발한 것 같습니다.”

일정을 하루 단축하기 위해 함대는 크레타 섬을 건너뛰고 밤새도록 항해해 몰타로 향했다. 베네치아 시녀들이 잠시 섭섭해 했으나 현재 상황을 알고 있으니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물론 로마에서 교황을 태우기로 약속한 날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순례자들에게 로마를 제대로 구경시켜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중해에 올 때마다 들렀던 몰타 섬에 도착했다. 총기사단장 마르틴 가레스는 로마로 갔고 부기사단장은 이미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교황을 맞을 준비를 한다고 했다. 수석 기사 후안 페드로는 함대를 이끌고 항로를 지키느라 바다에 나갔고 차석 기사가 몰타를 맡고 있었다.

“폐하아~ 폐하 덕택에 저도 예루살렘에 순례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울지는 마시오.”

“늙은 기사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입니다, 폐하!”

노예 시장이 있던 곳을 슬쩍 살폈으나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몰타 기사단은 그 동안 북아프리카 해적들과 싸운 적도 없었다고 한다. 아니, 해적 자체를 구경한 적이 없다고 했다.

“노예시장이 없어져서 기사단 운영이 어렵지 않소?”

“작년부터 갑자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 후원금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교도 국가에서도 후원금을 보내는 동시에 신교도 기사들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신교와 구교 구별 없이 기사를 증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신교도를 이단이라고 화형 시킬 때는 언제고 후원은 받겠단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신구교의 간극이 조금 메워진 셈이라 다행이었다.

여객선에 탄 사람들을 부두에 내리게 해서 조금이라도 운동을 시켰다. 순례자들은 바위를 깎아 성을 만든 요새 도시의 위용에 놀라고 옛 노예 시장의 녹슨 철창을 보고 두려워했다.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건축물들은 결코 아니었다.

“전하! 로제타석의 그리스어를 다 해독했어요. 따로 조선말로 번역해왔어요.”

“오! 루치아, 고맙다.”

비문의 내용은 정말 별 것 없었다.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후원금을 듬뿍 받은 사제들이 파라오를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파라오를 신과 여신의 자식인 신으로 미화하는 내용이 압권이었다.

“잘했다, 루치아. 줄리아!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겠니?”

“예, 전하. 선교사님들과 함께 이미 라틴어로 번역했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이 번역한 것과 비교해 보니 몇몇 단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려요. 지금도 선교사님들이 토론 중이세요.”

“성서 시대 이전의 고대 그리스어라서 학자에 따라 해석이 조금 다르겠지. 이교도의 기록인데 기분 나쁘지 않아?”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공부하는 동안 온갖 신들 이름이 등장해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믿은 신이라도 일단 역사적 사실인걸요?”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줄리아와 루치아는 견습 수녀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신학과 어학은 강제로 시킨다고 높은 수준에 오르는 것이 절대 아니라, 흥미가 있거나 사명감을 갖고 배워야 하는 분야였다.

이민호가 중국어와 일본어를 미친 듯이 배웠을 때는 예전에 수능을 보려던 때가 아니었다. 고산국을 세우기 전에 돈을 벌려고 발악하던 무렵이었다.

어리지만 그래도 수녀들이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이상해서 꾹 참았다. 대신 선물을 주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한 너희 셋에게 선물로 뭘 주면 좋을까?”

“교황 성하를 만나 뵙고 싶어요!”

“응? 그건 당연한 거야. 로마에서 뵙게 해주지. 다른 선물은?”

“꺄악! 정말 좋아요.”

견습 수녀들이 좋다고 폴짝폴짝 뛰었다. 이민호가 주겠다는 다른 선물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수녀들에게 교황은 최고의 스승이며 아버지 같은 보호자이며 달리 보면 아이돌 같은 그런 이미지가 있었다. 우피 골드버그가 주연한 누나의 행위, 아니 <시스터 액트>라는 영화에서 교황에게 열광하는 늙은 수녀들이 딱 그랬다. 그래서 이민호는 선물을 견습 수녀들에게 직접 주는 것보다 교황을 통해서 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다음 날 일찍 몰타에서 출항해 카타니아 앞에 이르렀다. 시칠리아를 지나 로마로 향하려 했는데 메시나 해협 뒤에 숨어서 함대를 기다리는 손님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하! 제노아의 군선 같은 배 한 척이 해협 너머에서 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노아 군선 한 척이 우릴 기다려?”

그러나 해협을 통과하고 나서 보니 제노아 군선의 실체는 북아프리카 해적선이었다. 시력이 좋은 견시들이 쌍안경으로 선원들의 복장을 보고 사라센 해적들임을 확인했다. 정체가 드러나자마자 해적선은 곧 순양함들에 포위당했다.

혹시나 화약을 잔뜩 싣고 자폭하려는 배인가 해서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해적선 갑판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뭐래? 무슨 말인지 아는 통역관 있나?”

“아랍어입니다, 전하. 사라센의 사략선, 혀가 꼬이는군요. 하여튼 해적들이 기독교인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합니다.”

“귀찮군. 인질은 누군데? 설마 순례자들은 아니겠지?”

오스만 제국과 로마 교황청이 석 달 간의 이 당시로서는 짧은 협상 끝에 순례자들을 위한 보호 협정을 체결했다. 특히 부활절을 전후한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국가들과 일시 휴전을 하기로 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통제하는 이슬람 사략선이 활동할 시기는 절대 아니었다.

“개인적인 원한 같습니다. 작년에 원정함대가 지중해에서 작전했을 때 알바니아인 선장을 죽였는데 그가 자기 형제라고 합니다.”

“인질이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을 안 해? 귀찮다. 그냥 가자.”

국왕좌승함이 순양함들에 포위된 해적선을 지나가는 동안 이민호가 쌍안경을 들어 해적선을 살폈다. 알바니아 출신의 선장이 지휘한다는 제노아 군선에 탄 사라센 해적들은 역시나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갑판이 소란스럽더니 선장이 어린 선원을 끌어당겨 권총을 머리에 들이밀었다.

“저 꼬마가 기독교도 인질인가 보다. 원래 같은 해적이지만 기독교도인 것은 맞겠지.”

기독교도라기보다는 동유럽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아직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은 어린 선원이었다. 그러나 형제를 잃은 선장이 분노하고 꼬마 해적이 바들바들 떠는 동안 선원들이 움직였다. 앞뒤 가리지 않는 선장의 독주에 분노한 선원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카리브 해에서 활동하는 유럽인 해적들은 투표를 통해 선장을 뽑고 전리품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등 이 시대 기준으로 몹시 민주적이었다. 그러나 사라센 해적들은 선장이 배를 구하고 선원을 고용하므로 지배자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런데도 해적선에서 반란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 타앙!

선장이 항의하는 선원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순간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선장이 벨트에 묶인 권총집에서 다른 권총을 꺼내려는 순간 선원들이 무기를 들고 선장을 덮쳤다. 그 사이 꼬마 해적은 선장에게서 빠져 나왔다.

그런데 선장에게도 같은 편이 있었다. 해적선 갑판에서는 해적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 권총과 칼끝을 겨누며 치열하게 싸웠다. 선장은 이미 피를 흘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와! 선상 반란이다.”

“어떻게 합니까, 전하?”

전대장이 묻자 구경거리에 환호하던 이민호는 난감했다. 순양함들이 이미 그 해적선에 포구를 맞춰놓고 언제든 날려버린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적대적인 해적들만 모여 있다면 몰라도, 이제는 피아가 뒤섞인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해적선을 향해 함포를 쏘는 것도 맞지 않았다.

“내버려두고 가자. 복수를 목적으로 나왔다니까 털어봐야 돈도 없겠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이긴 모양이야. 배를 팔면 귀향할 여비가 충분히 나오겠지.”

나라를 세우고 키워가는 과정에서 여러 세력 혹은 개인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다. 그러니 복수하러 나설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도전하면 받아주겠지만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그 날 저녁 나폴리에서 정박하고 다음 날 새벽 일찍 출항했다. 전단장이나 주요 장교와 부사관들 대부분이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인데다 뱃사람 출신이었다. 새벽 같이 일과를 시작해서 출항할 때 이민호는 아직 자고 있었다.

덕택에 오전에 로마 바깥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갑차 대대와 기병 연대가 내리고, 구르카 용병도 1개 대대가 상륙했다. 그리고 여객선과 수송선에 탄 순례자들 중에서 로마를 방문하겠다고 희망한 사람이 2천 명에 달했다.

“폐하! 지금 출발해도 해가 지기 전까지 로마에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간에 마을에 전령을 보냈으니 거기서 쉬고 내일 아침에 로마에 도착하시면 됩니다.”

“추기경! 내가 어느 나라 국왕이오?”

“그야 당연히 고산국의 국왕폐하이십니다.”

왕도에서 같이 출발한 추기경이 어리둥절했다. 기병 연대는 전원 말에 탔으나 배에서 마차가 한 대도 내리지 않았다. 구르카 용병이나 순례자들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이내에 로마에 도착하겠소.”

“예? 설마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시겠다는 뜻입니까?”

“내 군대와 백성들을 남겨두고 나만 혼자 편히 갈 수는 없지 않소? 저 마차에 타시오!”

추기경과 신부들 앞에 선 것은 길쭉한 육면체의 쇳덩이였다. 겉에는 라틴어 등 여러 문자로 ‘1600년 성지 순례단 쇠마차’라는 글이 인쇄돼 있었다. 운전사와 안내원이 출입문 옆에 서서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타라고 손짓으로 권했다.

쇠마차는 겉만 철판으로 되어있고 안에는 의자 수십 개가 배치돼 있었다. 이 세상 최초의 버스였다. 추기경과 신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리고 전혀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여성 안내원이 친절하게,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만으로 승객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 사이 쇠마차 운전사가 차 앞쪽의 시동기를 돌려서 엔진을 시동시켰다. 시동이나 전조등에 사용할 축전지가 개발 중이지만 아직 효율이 형편없이 떨어져서 임시로 회전형 시동기를 달았다.

“출발!”

기병 첨병 중대를 앞으로 내보낸 다음 가장 선두에 선 장갑차에 오른 이민호가 손을 들었다가 앞으로 뻗었다. 장갑차 대대를 필두로 기병 연대가 측면을 호위했다. 그리고 순례단과 구르카 용병들을 태운 버스 70여 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버스에 탄 추기경과 신부들은 이민호가 예상한 것과 달리 겁에 질려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성호를 긋거나 하느님을 찾았을 뿐이었다.

“쿨럭! 이게 웬 먼지야.”

“안으로 들어오세요. 돌로 포장된 도로가 곧 나와요.”

이민호는 민영의 권유로 문을 닫고 기관총 사수석 안으로 들어왔다. 작년과 달리 강화 플라스틱으로 빈틈을 메워 먼지가 스며들지 않았다. 기병들이 눈에 익은 장갑차보다는 새로 만든 버스를 더 신기하게 여기는지 자꾸 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차 위주로 만들고 계신데 작은 차는 안 만드시나요?”

“혼자 타는 차를 만들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해서 말이야.”

장갑차와 경운차를 만드는데 작은 승용차라고 못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축전기 등 여러 가지 장비가 필요했고 아직 교통법규 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이 시대에는 세상 어딜 가든 도로 대부분이 비포장도로라서 시내 외에는 타기도 어려웠다. 가장 결정적으로, 개인이 승용차를 사기에는 아직 너무 비쌌다. 승용차를 수출할 경우 차 자체, 또는 엔진이 군용으로 전용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 작품 후기 ============================

편 제목을 바꿔서 여기서 성지 순례 편으로 하겠습니다.

더 늘어나면 안되는데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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