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2 69. 성지 순례 =========================================================================
차량과 기병 행렬은 테베레 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강 건너 로마 시내를 목전에 두고 북쪽 길로 접어들었다. 테베레 강 여러 곳에 로마 시내로 통하는 다리가 걸려 있었으나 무거운 장갑차와 승합차가 허술한 나무다리를 건널 수는 없었다.
돌로 만든 아치교도 무너질까 겁나서 바로 로마 교황청으로 향했다. 중간에 마주친 얕은 개울은 그냥 넘어갔다. 장갑차나 버스가 타도 무너지지 않을 가교장갑차를 준비해왔으나 쓸 일은 없었다. 견인장갑차도 하는 일 없이 뒤따라왔다.
“도착했어요, 주인님.”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네?”
한 시간 만에 20여 km를 천천히 달려서 교황청 건물이 보이는 도로에 도착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베드로 광장 동쪽의 도로, 나중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서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대로를 건설할지도 모를 거리에서 기병 연대와 100여 대에 이르는 차량 행렬이 멈췄다.
그런데 울긋불긋한 복장을 갖춘 교황청 근위대 소속 스위스 용병들이 대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장창을 앞으로 내민 채 비장한 각오로 대열을 맞춘 스위스 용병들이 제법 멋져 보였다.
총병도 없이 장창병만으로 근대화된 고산국 군대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위스 용병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임무를 져버리지 않았다. 마치 명량해전에서 왜선 수백 척이 몰려오는 울돌목을 가로막은 이순신의 좌선 단 한 척처럼.
“고산국 국왕전하와 순례자 행렬이오!”
통역장교가 서둘러 차에서 내려 외쳤다. 그러나 스위스 용병들이 잠시 서로 마주보다가 다시 장창을 굳게 쥐었다.
행렬과 동행한 추기경이 근위대장에게 얼굴을 내밀고 나서야 용감한 스위스 용병들이 장창을 들어올렸다. 해안에서 급히 보낸 로마교황청 전령이 차량 행렬보다 뒤늦게 도착한 탓에 잠시 오해가 있었다.
“훌륭해. 구르카 용병 외에 저들도 고용하고 싶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아직도 탐나세요? 하지만 지금 고산국에는 장식용밖에 안 될 거여요.”
“훈련을 시켜야겠지.”
호위들이 먼저 내리고 구르카 용병들이 주변을 에워싼 다음 이민호가 장갑차에서 내렸다. 도로 양쪽에 줄줄이 정차한 승합차에서도 승객들이 한꺼번에 내렸다.
순례자와 성직자들, 로마 시민들이 몰려와 이국의 손님들과 장갑차나 승합차 같은 시대를 앞서간 기물들을 구경했다. 바로 이때 로마의 하늘에 수상비행기가 높이 날았다. 비행기를 보고 놀란 로마 시민들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례자들이 차멀미나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다행히 운전사가 차를 살살 몰고 승객들도 주변 경치를 감상하느라 멀미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전 처음 버스를 탄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비행기는 이들의 지식수준에서 이해하지 못해 잠시 헛것을 본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천사라는 둥 악마가 보낸 새라는 둥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왔으나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폐하! 얼맙니까?”
“예? 뭐가 말이오?”
“이 쇠마차 얼마에 살 수 있습니까? 연로하신 교황 성하를 태우면 로마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당들을 쉽게 방문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기경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물었다. 이민호가 얼마를 부르든 당장 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드러나서, 장사하면 절대 안 될 사람이었다.
“많이 비싸오. 교황청에 한두 대 기증하고 싶지만 정비나 연료 문제 때문에 운영하지 못할 것이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면 기증하겠소.”
지금으로부터 50년쯤 지나서 로마교황청에 승합차를 기증할지 여부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 쇠마차가 많이 생산된다면 성경 말씀대로 인간이 온 세상에 번성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전에 도로 포장부터 먼저 하셔야 할 것 같소.”
도로가 완벽하게 포장되더라도 차를 외국에 내보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유럽의 기술이 부족해 당장은 복제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따라올 것이 분명한데, 눈앞에 실물이 있으면 참고가 많이 되기 때문이다. 유럽과의 기술 격차를 충분히 넓혀놓고 그 간극을 즐기면서, 후발주자들이 따라올 때마다 저만큼 앞서 나가길 원했다.
버스 창문을 열고 달렸는지 추기경과 순례자를 가리지 않고 다들 먼지를 듬뿍 뒤집어썼다. 그러나 예전에 마차를 탈 때보다 훨씬 나았다. 20여 km를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엉덩이가 아프지 않다면 이 시대 기준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교황청에서 나온 추기경이 동행한 추기경과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민호에게 와서 고했다.
“교황 성하께서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가겠소. 줄리아! 가자.”
약속보다 이틀 빨리 왔는데도 고산국왕의 이름으로 예약도 안 하고 교황을 만날 수 있었다. 이민호는 제복이 화려한 근위대를 앞세우고 군악대를 뒤따르게 한 다음 화려한 마차로 갈아탔다.
- 빰! 빰! 빰! 빰빠밤 빰빠밤~
군악대가 장중하면서도 약간 이상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대로를 따라 행진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을 앞에 두고 원형의 성 베드로 광장에 도착한 근위대와 군악대를 중심으로, 기병 연대와 장갑차 대대가 좌우로 늘어섰다.
가장 바깥에는 구르카 용병들이 배치됐다. 기병 연대와 장갑차 대대와 달리 구르카 용병들은 화려한 예복을 처음 입어봐서 약간 어색했다.
“군악이 행진곡 풍이긴 한데 약간 이상해요.”
“좀 안 어울리지? 제국 행진곡이라서 그래. 내가 명색이 왕인데 군악대가 선곡하는 것까지 간섭하긴 그래서 내버려뒀더니 이 모양이야.”
예전에 이민호가 장난으로 군악대 연습곡으로 만든 영화 <스타워즈>의 주제곡 ‘임페리얼 마치’가 성 베드로 광장에 울려 퍼져서 이민호도 몹시 불편했다. 예수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며 제자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꿨다. 그 베드로가 순교한 땅에 세워진 광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성 베드로 광장 주변에 늘어선 열주 위에 서 있는 기독교 성인들이 이민호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이 시기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지 않았다.
“주인님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지면 분위기를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이해해요.”
“바로 그게 문제야.”
호위를 불러 군악대장에게 가톨릭교회에 맞는 음악을 연주하라고 보냈다. 그 사이 교황청의 국무성성 장관이 이민호에게 환영 인사를 올렸다. 국무성성 장관도 역시 추기경이었고, 교황을 제외하고 교황청에서 최고위 직책이었다.
잠시 후 이민호는 붉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추기경 두 명과 견습 수녀 세 명을 앞세우고 뒤에 베네치아 일곱 시녀, 그리고 호위들을 이끌고 걸었다. 민영이 이민호의 옆에 서서 함께 걸었다.
“성스러운 아버지 폰티펙스 막시무스께 동방의 고산국 국왕이 인사드립니다.”
“과분한 칭호입니다, 폐하. 천국과 지상의 다리는 제가 아니라 오히려 국왕폐하께서 이으시는 것 같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폐하께 대한 인사로 대신합니다.”
폰티펙스는 다리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제사장이라는 뜻이고, 막시무스는 최고라는 뜻이라서 로마 시대에 최고 제사장의 칭호로 사용됐다. 그러나 4세기까지 로마 황제의 칭호로도 사용됐다.
그 후에 폰티펙스라면 주교를 뜻했고,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최고 주교니까 당연히 교황이었다. 원래의 뜻과 로마 황제들이 사용했다는 역사성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칭호였다.
“순례를 떠날 준비는 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번에 세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신 국왕폐하의 공이십니다.”
“교황 성하께서 용기가 있으신 덕택이지요. 교황 성하의 영도 아래 1600년 주빌리가 성도들에게 화해와 평화의 해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언제든 주의 곁으로 갈 날만 꿈꾸고 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에 가본 다음에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오래도록 소명을 다하셔야지요.”
교황 클레멘스 8세는 평화와 화해, 교회의 개혁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외교를 통해 전쟁을 억제한 것은 물론 1595년 리투아니아에서 종교집회를 열어 루터교회 소속의 다수 성직자와 교인들을 로마가톨릭으로 다시 개종시키는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조카 두 명을 추기경에 임명한 탓에 성인으로 시성되지는 못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혹시 국왕폐하의 공주님들이신지요?”
“아닙니다. 제가 후견하는 수녀님들입니다. 교황 성하를 만나 뵙고자 이역만리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린 견습 수녀들이 교황을 앞에 두고 잔뜩 상기돼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신심이 깊은 줄리아는 뭔가 실망한 표정이었다.
“줄리아! 교황 성하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교황이 신이라면 오히려 신성모독이다.”
“그래요. 저는 실망하지 않겠어요. 제가 믿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니까요. 교황 성하도 훌륭한 분이세요.”
줄리아가 알현실 구석에 있는 오르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건반을 눌렀다. 갑자기 견습 수녀들이 교황을 위해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라틴어로 개사된 ‘I will follow him’의 앞부분을 견습 수녀 세 명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차분히 불렀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르겠다는 가사는 신을 모시는 성직자의 소명과 같았다.
깊은 바다와 높은 산이라도 그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가사는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평생 신앙의 길을 걸었던 교황과 성직자들에게 감정이입이 강하게 되면서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린 수녀들이 평생 같은 길을 걷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자랑하는 것 같아 교황과 추기경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반부의 감동은 페이크였다. 중간에 갑자기 줄리아가 벌떡 일어서더니 건반을 마구 두들겼다. 그리고 흥쾌한 후반부를 노래했다. 처녀들이, 아니 아직 어린 소녀들이 그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큰소리로 외치는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동방의 자매님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감정이 충분히 느껴집니다. 역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즐거우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럼 견습 수녀들에게 선물을 주셔야죠?”
이민호가 작은 소리로 통역을 부탁했다. 이민호는 교황이 견습 수녀들에게 줄 선물로 십자가나 성서, 혹은 수녀용 베일 같은 물건을 예상했다.
그런데 교황은 견습 수녀들에게 줄 선물을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다. 알현실 바깥 3층 테라스의 탁자에 소박한 목기가 놓였고, 이민호와 민영, 그리고 견습 수녀들이 초청을 받았다.
“자매님들은 나와 함께 커피 한 잔 마시겠소? 무슬림들이 마신다 해서 쓰디 쓴 사탄의 발명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오.”
교황이 직접 주전자를 들어 소박한 목기 잔에 따랐다. 견습 수녀들이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교황의 또 다른 호칭이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었으므로 교황이 일반 신도의 발을 씻기거나 다른 성직자들에게 공손히 대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아무리 악마의 음료라도 교황 성하께서 직접 세례를 하셨다면 안심하고 마실 수 있겠어요.”
“너희들 다 안 컸으니까 딱 한 잔만 마셔야 한다?”
이민호가 커피를 마시면서 잔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설탕이 든 작은 종이포장을 뜯어서 견습 수녀들에게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블랙커피는 이민호가 마시기에도 너무 썼다.
“모처럼 교황 성하께서 주시는 커피니까 여러 잔 마실래요. 설탕 더 주세요. 교황 성하의 잔에도 설탕을 타 드려야죠.”
“그럼 잠 못 잔다.”
“상관없어요. 베에~”
오후의 티타임은 국왕과 교황이 어린 견습 수녀들의 수다를 듣는 것으로 즐겁게 보냈다. 로마의 오후는 따사로웠다.
광장에 도열했던 병사들은 이미 해산해서 일부는 광장과 성당에서, 일부는 로마 시내에서 휴일을 보냈다.
순례자 2천여 명도 고산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부족했던 것을 로마에 와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십자가나 석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동양인 순례자들이 오히려 성직자들과 로마인들의 신앙심을 자극했다.
============================ 작품 후기 ============================
경전에 나온 대로만 하면 어떤 종교든 다 좋을 텐데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