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53화 (602/1,000)

00653  69. 성지 순례  =========================================================================

성년(聖年) 또는 희년(禧年), 주빌리에는 성지를 순례하는 신도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로마에도 수십 만 명이 멀리서 찾아와 북적대서 동양인 순례자들이 로마에서 숙박할 곳을 구하기 어려웠다.

고산국 순례자들이 부유하다는 소문이 나서 로마 범죄조직들의 표적이 되었다. 낮에도 몇몇 순례자들이 소매치기를 당했다. 여기에 더해 밤에는 로마 시의 치안을 보장할 수 없다는 국무성성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순례자들을 저녁나절에 여객선과 수송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고산국 원정군은 교황을 호위해야 하기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가까운 궁전과 주변 건물 몇 채를 임시 숙영지로 배정받았다. 이민호는 회의실로 추기경과 지휘관들을 불러 밤늦게까지 호위 계획을 최종 검토했다.

“폐하! 교황 성하께서는 국왕이나 귀족과 달리 신도들과 수시로 접촉한다는 점에서 경호에 애로 사항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 교황 성하께서는 선종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기에 경호 병력이 많은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한 마디로 교황 성하는 몹시 까다로운 경호 대상입니다.”

“신의 뜻대로, 이런 식이군요. 그나마 스위스 근위대가 있어서 다행이오.”

이민호 입장에서는 교황을 수상비행기에 태워 예루살렘에 내리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경호 방법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명목상 일반 순례자들을 보호하며 성지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는 일도 맡아야 했다. 성지 순례를 떠나는 신도들에게서 교황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러나 교황 성하께서는 로마교황청과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십니다. 개인적인 희망과 반대로 일단 교황에 선출되셨으면 책무를 완수하셔야 합니다. 제가 할 일은 교황 성하를 지키는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고산국도 교황 성하의 경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소.”

일단 우두머리가 되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은 어느 조직이나 비슷했다. 얼마 전까지 나이가 많은 교황들이 선출되자마자 잇달아 노환으로 선종하자 피선거권자 나이까지 제한했던 교황청이었다. 평소에도 어떻게든 연장시키려고 노력했던 교황의 목숨을 성지 순례 중에 잃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번 성지 순례에서 교황의 호위를 담당한 추기경은 내부의 인적 방벽은 교황 직속 기사단과 스위스 용병으로, 외부 경호는 고산국에서 맡길 원했다. 이민호는 경호 라인의 내부는 구르카 용병, 대열 보호는 장갑차, 외곽 경호는 기병 연대 위주로 분담해 배치시켰다.

그리고 교황이 교황청을 떠나는 순간부터 최소한 수상비행기 한 대를 항상 상공에 띄우기로 했다. 수상비행기 12대가 하루 한 시간씩 비행하면 대충 맞출 수 있었다. 비행기에 무선통신 중계 장치를 달아 외곽의 기병과 원정군 지상군 사령관 감동이 탄 장갑차 사이의 통신을 중계하는 역할도 맡겼다.

“어휴! 돈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힘겨운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배정된 옛날 궁전의 침전에서 쉬었다. 베네치아 시녀들도 상인들과 계속된 상담을 마친 다음 지쳐서 자러갔고, 침전에는 민영과 호위들만 남았다.

“전에 주인님이 평화가 가장 큰 이익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성지 순례가 끝나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고산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설 거여요,”

“지들이 적대적이면 뭐 어쩔 거야? 자기들만 손해지.”

아직도 유럽 상인들 중 일부는 고산국을 이교도 국가라고 백안시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훈족 아틸라와 몽골족 때문에 동쪽 나라, 혹은 황인종에 대한 공포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던 시대였다.

황인종은 강한 군사력으로 유럽인들을 학살하거나, 비단과 도자기를 만드는 중국인처럼 문화적 수준이 높은 인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근래에 새로이 등장한 고산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높은 문화 수준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나라로 유럽의 백인들에게 인식됐다.

“민정이가 오늘 미사에 참가했다가 교황 성하께 세례를 받았어요.”

“오, 그래? 축하한다. 선물을 줄까?”

민정을 침대로 불렀다. 이로써 여진족 호위들 중에서 이슬람교가 둘, 기독교가 셋이 되었다. 현재 30명 정도가 호위 업무에 투입돼 있었으니 숫자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섭섭하게도 FSM을 받아들인 호위는 없었다. 저번에 호위들을 대상으로 FSM의 교리를 설파했을 때 다 듣고 나서는 그저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파게티를 맛있게 잘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신도들이었다. FSM교는 신도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다 해도 미워하지 않을 정도로 아량이 넓었다.

“필요한 건 다 있어요. 주인님이 보살펴주셨잖아요.”

“그럼 물질적인 것은 넘어가고, 육체적인 것으로.”

“원래 물질과 반대라면 정신적인 것이 아닌가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어. 건전한 육체인지 확인 좀 해보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의 격언까지 끌어와서 민정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민정의 옷을 다 벗기고 옆으로 누운 채 뒤에서 껴안았다. 피부를 최대한 밀착시키면서도 여기저기 몸 곳곳을 편히 만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흘 전에도 확인하셨잖아요.”

“싫어? 무릇 선비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고 했어.”

“싫지는 않아요.”

이민호가 특정 후궁을 대상으로 권태기에 빠질 일은 없었다. 후궁들 숫자가 워낙 많아 누구를 안든 항상 새로웠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임시 숙영지가 시끄러웠다. 무슨 일인가 하고 테라스에서 고개를 내민 이민호는 평소에 조용하던 감동이 병사들 앞에서 펄펄 뛰는 장면을 구경하게 됐다.

“그래. 로마에서 점령군 흉내 내니까 좋냐? 좋아? 너희들이 멋대로 기분 내는 동안 그 동안 국왕전하께서 로마교황청과 시민들에게 들였던 노력이 다 허사가 됐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거야? 앙?”

휴식 시간을 줬으면 곱게 관광을 하거나 휴식만 취할 것이지 이 기회에 으스대는 병사들이 반드시 있었다. 아무리 사전에 주의를 몇 번씩 줘도 소용이 없었다.

“너희들이 월봉을 얼마를 받는데 그런 창피한 짓을 해? 휴가비도 따로 줬잖아! 혹시 못 받았어? 중대장이 중간에 횡령했나?”

“그건 아닙니다, 사령관님. 외국에 왔더니 들떠서 기분 좀 내봤습니다.”

“기분 좀 냈다니! 그런 짓하지 말라고 교육하고 선물 살 돈도 따로 줬잖아! 모처럼 외국에 왔는데, 그것도 유럽의 중심 로마에서 이 지랄을 떨면 어떻게 해!”

사소한 이유로 로마 시민을 위협하고 폭행한 병사가 셋,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맛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돈을 안 내고 나온 병사가 둘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범죄에 불과했지만 로마교황청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노력해 온 고산국의 국책에 맞지 않는 행위였다. 로마 시민들이 고산국 군대를 무서워해서 밝혀지지 않은 범죄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군사재판을 열 수도 없어서 군령을 어긴 자들을 체포한 다음 일단 공개된 자리에서 채찍부터 때리기로 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도 창피한 일이었지만 피해를 입은 시민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고산국 건국 초부터 공개 태형이 가장 확실한 사과 방법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피해자들 또는 현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태형이 진행됐다.

아침식사 후에 로마의 대로에 태형 집행 기구를 설치하고 군악대를 동원해 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통역장교가 범죄자들의 죄상을 큰소리로 알리는 동안, 범죄자들의 상의를 벗겨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군홧발로 밟았다.

“사령관님! 제가 그 예복을 다리느라......”

“앞으로 예복 입을 기회 없으니까 걱정 마! 태형을 집행하라!”

채찍을 맞을 병사는 예복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체포된 병사들은 군법재판을 받은 다음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군대에서 쫓겨난다.

- 짜악!

“아악!”

“비명소리를 더 크게 질러! 네게도 낯짝이 있다면 그게 지금 네가 할 일이다.”

국내에서 이 정도 사소한 범죄는 민간인에 대한 피해보상 외에는 비교적 가볍게 처벌받았다. 고산국에서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군인과 민간인이 서로 주먹다짐을 했을 때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중처벌 받는 경우가 없었다. 농민이 곧 군인이라는 조선의 군사제도에서 비롯된 일반 인식이 고산국에도 아직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정 중에는 병사 하나하나가 모두 외교관 역할이라고 누누이 강조했기에 명령불복종 죄가 덧붙여졌다. 그런데도 항상 사고가 터졌다.

“젊은 혈기 때문에 이런 사고는 종종 터졌어요. 병사들이 숙영지에서 못 나가게 하면 안 되나요?”

민영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면서도 마치 책임을 회피하려는 관료들처럼 말해서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자들 때문에 다른 병사들을 병영에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사고는 엉뚱한 놈이 치고, 벌은 규칙을 준수한 자들이 받게 된다면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병사들 대부분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관광이란 원정에 참가한 병사들에게 평생 가는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군에 지원하거나 나라에 충성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어.”

“저들은 꼼짝없이 명령 불복종죄로 탄광에서 5년 동안 열심히 일해야겠군요.”

“군대에서 쫓겨났는데도 형 집행기간에는 군법이 계속 적용되니까 더 억울하겠지. 하지만 꼭 저렇게 외국에 와서 사고를 치는 놈들을 볼 때마다 내 속이 터진다.”

태형을 받고 있는 병사들의 인사철을 살폈다. 사고치는 병사들이 항상 그렇듯이 신병들을 못 살게 굴고 선임에게는 대드는 자들이었다. 마치 후배들에게 ‘어린놈의 자식이’ 운운하는 인간이 연장자에게는 늙었다고 무시하는 것과 같이 논리에 일관성이 없었다. 남을 공격할 핑계를 동원해 꾸준히 남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기도 했다.

그런 선임들 밑에 배치된 신병들은 일주일도 안 돼서 전출 신청을 하고 다른 대대로 달아나버렸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2년 계약기간을 채우면 바로 군에서 쫓겨날 자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정말 피곤하겠어요.”

“어딜 가나 민폐야. 제 딴에는 군 기강이 어쩌고 온갖 핑계를 대겠지.”

“2년을 채우지 않더라도 파면하는 게 어때요?”

“그게 좋겠어. 2년을 채우기에는 피해가 너무 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은 끊임없이 나타난단 말이야.”

태형 집행을 마친 다음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은 숙영지 창고에 구금됐다. 군의관들이 너덜너덜해진 등짝을 소독해줬으나 이 과정이 맞을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교황청 성직자들과 로마 시민들이 고산국 군대의 군기가 엄정하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떻게 보면 바로 이 효과를 노리고 태형을 집행한 것이기도 했다.

원정군이 로마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교황이 성지 순례를 위해 출발했다.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에서 미사를 올린 다음 성 베드로 광장을 걸어서 통과해 대로에 접어들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은 엄숙한 태도를 취했으나 수많은 로마 시민들과 순례자들이 환호를 올렸다. 건물 창문마다 고개를 내민 처녀들이 꽃잎을 날리고 비둘기가 하늘을 날았다. 교황 행렬 가장 후미에는 순례자들이 뒤따랐다.

“다른 지역에서 왔다가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참가하겠다는 자들이 2만 명이 살짝 넘어가요, 주인님. 예정 인원을 합하면 3만이 넘어요.”

“그렇게 많아? 순례자들을 배에 다 태우려면 일정 하루를 까먹게 생겼군.”

“저 많은 순례자들을 다 버리고 갈 수는 없어요. 무엇보다 교황이 허락을 안 할 거여요.”

대형 여객선과 수송선들이 있어서 불어난 순례자들을 함대에 태우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당장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이 문제였다. 로마 시 외곽에서 승합차에 순례자들을 태우고 항구까지 여러 번 왕복시키기로 했다.

교황과 성직자들을 가장 먼저 승합차에 태워서 여객선으로 보냈다. 교황의 이동 속도와 맞춰야 해서 스위스 근위대들도 승합차에 탔는데, 기다란 장창을 승합차 위에 올려서 묶어야 했다. 미리 약속된 사항인데도 스위스 용병들은 영 적응을 못했다. 스위스 용병들 대신 장갑차들이 승합차 좌우를 달리며 교황 일행을 경호했다.

“예상 외로 순례자가 늘어나서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하긴요. 순례자가 많아지면 기뻐할 일 아닙니까?”

국무성성 장관이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이민호에게 미안해했다. 성년, 주빌리를 맞아 로마에 성지 순례를 하러 왔다가 교황이 직접 예루살렘에 간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자들이 많은 탓이었다. 문맹이 흔해서 소식이 유럽 전체에 빠르게, 정확히 전달되지 못했다.

이들 중 예루살렘에 가기로 갑자기 결정한 사람들이 자그마치 몇 만이나 됐다. 여객선과 수송선들이 로마와 예루살렘 서쪽 항구들 사이를 몇 번 더 왕복해야 했다.

“저희야 그렇긴 합니다만, 함대에 부담이 갈까 걱정입니다.”

“함대 외에 고산국 민간 상선들까지 동원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을 위한 항구에 천막이라도 쳐주십시오.”

“이번에 배에 타지 못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물과 식량 공급을 교황청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성지 순례에 참가한 사람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승합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여객선과 순양함들, 그리고 비행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그러나 교황이 먼저 여객선에 탑승했으므로 두려움을 가지지는 않았다. 합리적인 교황의 행동 덕택에 순례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문명에 대한 거부감도 덜했다.

국왕좌승함 함교에 오르니 전대장이 이미 보고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교황 성하를 비롯해 성지 순례단 36,273명이 여객선과 수송선에 나뉘어 전원 탑승했습니다. 원정군 인원과 장비도 모두 수용했습니다.”

“바로 출발하게.”

“출발하도록 전단장에게 어명을 전하겠습니다.”

기적이 울리고, 함대가 부두에서 벗어났다. 교황과 성지 순례단을 환송하러 아침 일찍부터 항구에 나온 로마 시민 수만 명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렇게 출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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