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54화 (603/1,000)

00654  69. 성지 순례  =========================================================================

시칠리아 주변부터 온갖 배들로 바다가 완전히 메워지다시피 했다. 각양각색의 배들은 모두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히 승객 대부분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가려는 순례자들이었다.

그래서 함대는 로마에 갈 때처럼 순례자의 배들이 수평선에 보이는 한도 내에서 한참 남쪽으로 이동한 다음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교황은 마주치는 순례자들의 배마다 축복을 해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가 너무 많고 고산국 함대와의 속도 차이로 인해 사고 우려가 커서 어쩔 수 없었다.

함대 지휘는 전단장이 알아서 하고 이민호는 배에 탄 순례자들을 살폈다. 예정보다 많은 인원이 탑승했으나 식량 부족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집트에서 아슈도드로 더 많은 식량을 보내라고 카이로에 무선 통신을 보냈다.

“설마 수송선에서 벽과 문짝을 뜯어서 불을 피우지는 않겠지?”

“설마요. 조리된 음식을 부족하지 않게 나눠주고 있어요. 그리고 매 시간 해병들이 선내에 순찰을 돌고 있어요.”

함대가 이동하는 동안 베네치아 시녀들이 순례자들의 식사와 의료 지원 문제를 총괄했다. 알현실은 혹시나 손님맞이할 때 필요할까봐 내버려두고 집무실을 지휘본부로 활용하고 있었다. 궁녀들과 호위들 일부가 손을 거들어주었다.

유럽에서 목욕탕이 악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공중위생이 저하된 시기라서 자칫 전염병이 선내에 돌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순례자들을 배에 태우기 전에 목욕과 빨래를 시킬 것을 하고 후회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범죄자들도 순례 기간에는 조용하거든요. 성지로 가는 중에 그 동안의 인생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니까요.”

“범죄자는 언제든 범죄자야. 반성은 물론 기도나 회개를 한다고 해도 안 믿어. 확실히 통제하는 수밖에 없어.”

그때 노파를 죽여서 돈을 다 빼앗을 걸. 오! 주여! 제게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단호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그런 기도나 반성을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옆집 처녀를 따먹게 도와주소서. 이런 헛된 망상이나 할 것이다.

“순례자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원해요. 게다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평생 한 번뿐일지도 모르니까요. 다들 조심해요.”

“그나저나 인원이 워낙 많아서 단 며칠뿐인데도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나오겠군.”

“교황청에서 내준다니 다행이에요. 그래도 예전처럼 상선들을 끌어 모으는 것보다 훨씬 적게 들 거여요.”

순례자들은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라 원래는 배 삯은 물론 밥값도 받을 생각을 안 했다. 그러나 교황청에서 함대가 소모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 고산국이 부유하다지만 천여 년이 넘게 존속한 교황청의 재산은 추산이 불가능하므로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여객선은 물론 수송선마다 배치된 신부와 수도사들이 순례자들이 먹은 음식 값은 물론 물 값까지 다 계산했다. 출발하기 전에 교황청에서 여객선 건조비 절반과 함대 출동비까지 계산해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크레타 섬에서 하룻밤 정박하고 아침에 출발했다. 한 시간쯤 항해하는데 저 앞에서 역풍을 받으며 몰타 기사단의 함선이 나타났다. 함선은 크고 작은 배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국왕좌승함으로 접근했다.

“전하! 몰타 기사단의 범노선입니다! 수석 기사가 대화를 청합니다.”

“배를 접현시키게.”

몰타 기사단의 배에서 대화를 요청하는 깃발을 올리기에 국왕좌승함을 멈추고 접현을 허용했다. 순양함의 갑판이 훨씬 높아서 해병들이 늘어뜨려 준 줄사다리를 타고 몰타 기사단 수석 기사 후안 페드로가 국왕좌승함으로 건너왔다.

“폐하! 대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요. 교황 성하께서 교황청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축배를 올립시다.”

“그래야겠습니다.”

“순례선들 사이에서 별 일은 없었소?”

후안 페드로는 별 일 없었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실로 다양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풍랑이 일지도 않았는데 낡은 배 한 척이 바다에 가라앉고 주변 배들이 구조에 나섰으나 수십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배끼리 충돌한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고 한 척이 침몰했다. 이때는 순례자들과 선원들이 모두 구조됐다. 크레타 섬의 어느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는 한밤중에 불이 나서 수십 명이 떼죽음 당하기도 했다.

“예루살렘을 바로 앞에 두고 안타깝군요.”

“배 안에서 더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일일이 통제하지 못합니다.”

노인과 병자들이 다수 참가한 탓에 범선 기준으로 보름 남짓에 불과한 뱃길에도 사망자가 다수 나왔다. 물론 출발 전부터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몰타 기사단의 함선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감시한 것이 큰 효과를 봤다. 최악의 사건들, 즉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순례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순례자들도 일부가 무장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순례자들이 선원들을 죽이고 배를 빼앗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수도 있었다.

“그렇겠지요. 이 정도만 해도 몰타 기사단이 큰 공을 세운 것 같소.”

“아슈도드에 도착하면 국왕폐하와 교황 성하께 따로 정식으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몰타 기사단의 배는 다시 순례자들의 배에 뒤섞여 동쪽으로 흘러갔다. 함대는 남쪽으로 거리를 두고 다른 배들보다 빨리 항해했다.

고산국 함대와 성지 순례단은 3월 26일 낮에 아슈도드에 도착했다. 거대한 여객선이 일착으로 부두에 정박하고, 다른 함선들이 연이어 부두에 도착했다.

“전하! 함대 지휘권이 전단장에서 지상군 사령관으로 넘어갔습니다. 상륙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좋아. 우리 배도 감동의 지시를 따르자.”

기병 연대가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다음 미리 정해진 지점을 향해 중대 단위로 흩어져 달려갔다. 장갑차도 내려서 도로를 장악했다. 구르카 용병에 이어 여객선에서 스위스 용병들이 장창을 들고 내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교황청 직할 기사들이 여객선에서 내렸다.

호위 병력 외에 순례자들 중에서 첫 번째로 배에서 내린 사람은 교황이었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여객선에서 내렸다. 부두에 내린 교황이 가장 먼저 한 행위는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은 경호선 바깥, 며칠 일찍 도착했다가 교황을 향해 울부짖는 병자와 장애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교황 경호에 나선 기사들과 스위스 용병들이 가장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교황님! 제발 제 손을 잡아주소서!”

병자와 장애인들이 일제히 울부짖으면서 교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교황의 손을 잡거나 옷깃만 잡아도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이 병자와 장애인들을 흥분케 했다.

“교황께서 너무 무모해요. 병자와 접촉하면 병이 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저러나요?”

“알아.”

민영이 고개를 돌렸다.

“예?”

“교황도 안다고. 알면서도 저렇게 하는 것이 의무니까. 교황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없는 자들이야. 짜증나더라도 참아.”

“짜증나는 것은 아니에요. 안타까워서 그래요.”

그 사이 여객선에서 일반 순례자들이 내렸다. 이들이 부두에서 벗어난 다음 수송선에서도 차례로 순례자들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 말을 타고 무장한 아랍인들이 항구로 떼를 지어 몰려왔다. 이교도들의 출현에 기사단과 스위스 용병들이 깜짝 놀랐으나 적대 행위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아흐마드 파샤! 반갑소. 별 일은 없었소?”

가자 지구의 공식적 지배자인 지사이며 예루살렘 지구와 그 북쪽 나블루스 지구의 실질적 지배자인 아흐마드 파샤가 마중을 나왔다. 아흐마드 파샤의 리드완 왕조는 지난 일 년 사이에 도로 건설과 교역 등으로 이스탄불보다는 고산국과 훨씬 밀접히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입니다. 알 쿠즈로 가는 길은 저희 가문의 병사들이 확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만이 넘는 기독교 순례자들이 알 쿠즈,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로마 교황의 성지 순례가 성공하면 리드완 왕조는 이슬람과 기독교 양쪽에서 지지하는 훌륭한 왕가로 성장할 것이오.”

“그래서 가문의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폐하. 내년에 시리아 총독이 되고 나면 더욱 확실히 기독교 순례자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기대되는군요.”

이때 교황이 추기경들과 함께 항구에서 출발했다. 이민호는 당연히 승합차를 타라고 권했으나 교황은 교황답게 일반 순례자들과 함께 노구를 이끌고 길을 따라 걸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성지까지 걷는 것은 고난과 역경, 박해를 상징했다. 그래서 교황을 말리지 못했다.

“교황 성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60세는 확실히 넘은 것으로 알고 있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1536년 2월생이라 현재 만 64세였다. 무릎이 시릴 나이가 벌써 지나서 교황은 커다란 홀을 짚고 추기경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병든 순례자나 장님과 앉은뱅이 등 장애인들을 만날 때마다 축복을 내려주었다. 몰타 기사단과 성묘 기사단이 환자들을 발견하면 즉시 아슈도드 또는 예루살렘의 병원으로 수레에 실어 날랐으나 하필 교황의 눈에만 띄는 환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환자들 사이에 암살자들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협력해서 교황과 순례자들을 지킵시다.”

“리드완 가문의 지휘권과 깃발을 받으십시오, 폐하!”

“고맙소. 그 동안 수고하셨소. 지상군 사령관에게 리드완 왕조의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위임하겠소.”

아흐마드 파샤에게서 창에 매단 깃발을 받아서 감동에게 넘겼다. 감동이 정중하게 깃발을 받은 다음 기수에게 넘겼다.

“감동 장군! 이 속도로 걸어가면 예루살렘까지 며칠 걸릴 것 같아?”

“이 속도가 유지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노인들이라 중간에 자주 쉬셔야지요. 내일부터는 오전이라면 몰라도 오후에는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이러다간 부활절에 도착하지 못하겠다. 승합차가 안 된다면 마차에라도 태워드려야겠다.”

“아슈도드를 벗어나면 교황 성하께 다시 건의하겠습니다.”

감동이 말 탄 기수단과 장갑차에 몰아서 탄 통신단을 이끌고 대로를 향해 달려갔다. 감동이 고산국 병력은 물론 교황청과 이 지역의 지방 정권인 리드완 왕조의 모든 병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슈도드에 도착한 첫 날 4km를 이동했다. 교황이 늙고 중간에 환자들을 돌보는 시간이 많아 일반인이 걷는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였다. 이런 속도라면 예루살렘에는 부활절 넘어서 도착하게 된다.

교황 일행은 길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숙영하기로 결정했다. 무거운 천막을 등에 지고 온 수사들이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웠다. 저번에 노를 저어서 함대를 쫓아오던 사람들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부활절이 4월 2일이고 지금은 3월 26일 밤입니다. 예루살렘까지 7레구아 정도 남았습니다. 성도와 순례자들을 위해 교황 성하께서 좀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순례자들의 행렬이 뜸해지는 곳에서 마차를 탈까 합니다. 그래도 순례자들이 걷는 속도에 맞춰야겠지요.”

교황은 다른 순례자들처럼 말라비틀어진 텁텁한 보리빵과 신 포도주를 살짝 섞은 물을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교황이 변명했다.

“고산국 국왕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순례 기간만이라도 일반 순례자들과 똑같이 고행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도 성도들을 생각하셔야지요.”

“제 건강은 다른 추기경이 잘 챙겨주고 있답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제 의무를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끝까지 주님과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이민호도 모닥불에 주저앉아 육포를 뜯었다. 밤하늘에 별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민영이 데려온 사막 고양이가 이민호의 팔에 머리를 들이밀기에 육포를 뜯어서 입에 넣어주었다.

“고산국 국왕폐하는 과연 기독교의 수호자이십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기독교의 수호자란 기독교 초기 로마 제국이나 프랑크 제국 황제에게나 붙었던 칭호였다. 동로마제국 황제의 칭호이기도 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었다.

물론 교황이 말로만 이민호가 기독교의 수호자라고 해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교황청에서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칭호를 수여해야 했다. 그런데 모닥불 주변에서 교황의 말을 듣고 있는 추기경들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교황청 내부에서 뭔가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고산국 국왕폐하! 국왕이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직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세례를 늦출 필요는 없습니다. 옛날과 다르니 일찍 세례를 받으셔도 됩니다.”

아주 예전에는 세례를 받으면 그 전에 지은 죄를 사해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 전파 초기에는 신자들이 가급적 세례를 늦게 받으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황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저는 FSM교의 신도입니다. 배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황청의 성직자들이 FSM의 교리를 분석했습니다. 성직자들은 FSM이 기존 종교들을 조롱하기 위한 가상의 종교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이기에 FSM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벌컥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들킬 줄 알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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