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62화 (611/1,000)

00662  70. 귀로  =========================================================================

예루살렘에서 아슈도드 항구로 돌아가는 길은 양쪽으로 오가는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순례자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일일이 인사를 하고 평화를 기원했다. 교황도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가끔 걸음을 멈추고 순례자들에게 축복을 내려줬다.

“그냥 승합차 타고 달리시지 말이야.”

“순례자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가 없으신 모양이죠.”

이민호는 장갑차 사수석에 탄 채로 연신 하품을 했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와 구르카 용병들은 교황 일행이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데도 단 한 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도로 주변 편의시설은 잘 구비돼 있었다. 길옆에 천막을 치거나 노숙을 할 너른 공간, 지붕 달린 우물, 이 시대에 보기 어려운 야외 화장실까지 갖췄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오가는데도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업을 영위해 나갔다.

“국왕폐하! 아흐마드 파샤의 전언입니다!”

“전령은 말에서 내리지 말고 즉시 고하라.”

리드완 왕조의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보고했다. 머리에 쓴 터번 외에는 유럽인의 무장과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전시에는 터번이 아닌 투구를 쓰므로 더더욱 유럽인 기사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전령은 말에서 내렸다. 세계 어딜 가나 전령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전국시대의 일화나 이븐바투타 여행기에 소개된 에피소드에서도 높은 사람이 직접 말은 안 해도 꽁해 있다가 아랫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발견된다.

“파샤께서는 아슈도드 항에서 폐하와 교황 성하의 송별연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도착할 것 같지 않은데? 알았다. 교황 성하께도 여쭤라.”

항구까지의 거리는 20km 정도 남았으나 교황은 계속해서 걸었다. 성지 예루살렘에서 느꼈던 감동을 최대한 오래 느끼고 싶어 하는 듯했다. 교황이나 추기경들은 나이가 많아서 다시 성지 순례를 오기 어려웠기에 이민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두 행렬에 선 교황이 이동속도를 높여야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빠져 나오고 새로 도착한 순례자들이 입성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절을 보낸 순례자들이 아직 반도 출발을 못했다는 보고가 무전으로 왔다.

“대략 50km 길에서 30km 정도 왔군. 1km에 빡빡하게 5천 명을 잡아도 이틀 만에 겨우 15만 명이 예루살렘에서 빠져 나왔어.”

“많지는 않지만 도로 옆으로도 걷고 있어요.”

순례자들이 도로변 밭작물에 피해를 안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했다. 평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예루살렘에 남은 순례자들은 여러 성문을 통해 더 빠르게 나올 수 있는데도 북문 하나만을 이용해 성지에 있는 시간을 늘리려 했다.

그 사이 리드완 왕조의 전령이 교황에게도 보고해서, 교황이 승합차를 타겠다고 전했다. 교황이 추기경들에게 부축을 받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 간신히 교황 전용 승합차 계단에 올랐다.

“감동아! 사령관! 교황께서 승합차에 타셨다. 기병으로 길을 열어라.”

- 와! 드디어 경호 부담이 줄어들겠군요. 기병 중대를 바로 보내겠습니다, 도련님.

무전이라는 것이 참 편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호출 부호도 필요 없고, 암호를 쓸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다른 나라에서 조만간 전파통신의 원리를 이해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언젠가 통신체계를 한 번 손봐야 했다. 주파수 도약방식이니 뭐니 도청이나 통신방수를 극복할 방법은 이미 메모해뒀다.

잠시 후 행렬에 변화가 생겼다. 선두에 선 기병들이 대오를 맞춰 천천히 뛰고, 그 뒤를 구르카 용병들이 지붕 위에 탄 장갑차 몇 대, 그리고 승합차들이 따랐다. 기병과 차량 대열이 움직이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순례자들이 길 한쪽으로 몰렸다.

“우와! 철마다!”

“앞에 몇 개는 흑마야!”

장갑차와 승합차를 처음 본 순례자들이 기겁해서 물러났다. 기독교에서 흑마나 철마라는 것은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었고, 종말에 관련된 단어였다. 그러나 차량마다 교황청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장갑차에 위장도색을 칠해야겠어.”

“투입되는 지역마다 색이 달라야겠어요.”

민영이 수첩에 메모했다. 덕택에 잊지 않고 해당 부서에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달려서 한 시간 후에 교황 일행이 여객선에 탔다. 그 뒤에도 순례자 수송 작전은 한참 더 이어졌다.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성지순례자들이 여객선과 수송선에 타려면 며칠 더 걸릴 것으로 봤다.

로마에서 출발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객선과 수송선에 타게 됐다. 처음 로마에서는 두려워하며 일부 탑승을 거부했던 사람들도 여객선이 안전하게 아슈도드에 도착한 것을 보고 여객선에 올랐다. 고산국의 여객선과 수송선 외에도 아슈도드 항이 유럽에서 온 범선들로 가득 차서 빠져 나가는 것도 문제일 것 같았다.

아흐마드 파샤가 주최하는 송별연이 열리기 전에 미카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민호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이에 미카가 순양함 4척을 이끌고 레반트 지역 항구 도시들을 평정하고 있었다. 물론 작전은 전단장의 통제를 받는 전대장이 수행하고 있었지만, 미카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항구 주변 바위에 함포 좀 쏘고 비행기를 날렸더니 그 지역 유력자들이 구경 잘했다고 금을 잔뜩 바치지 않겠어요? 고산국 상선들에게 과중하게 물리던 관세도 오스만 상인들과 같은 1할로 줄여주겠다고 해요.”

“잘했어. 위험한 자들에게는 실력을 보여주는 게 최고야. 마론파는 어땠어?”

예루살렘에 가장 많은 암살자들을 파견했다고 의심받는 마론파의 행동이 궁금했다. 그러나 암살을 애용하는 자들이 그렇듯 음험한 자들이었다. 창립자인 수도사 마론의 이상은 이미 사라지고 마론파 지도부는 이미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돼 있는 자들이었다.

“결정권도 없는 자를 사절로 보내서 무슨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위에 물어본다고 레바논 산으로 왕복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수상비행기를 보내 수류탄을 떨어뜨려 교회 종탑 몇 개를 부숴버렸어요.”

“그런 협상은 질질 끌 필요가 없지. 잘했어.”

윗놈이 책임은 지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다는 흔한 욕심쟁이였다. 미카에게 일단 마론파로 개종한 다음 협상을 시작하겠다는 둥 비현실적인 조건을 내세우는 것은 물론, 이미 합의된 사항도 걸핏하면 파기했다. 협상이 진척될 리가 없었다.

“종교시설에 대한 공격인데 괜찮아요, 주인님?”

“종탑 정도야 괜찮아. 일반 신도들만 안 다치면 돼.”

“예. 대신 드루즈파는 전혀 건들지 않았어요.”

“내년에 아흐마드 파샤가 시리아 총독에 임명되면 마론파 지도부들을 퇴진시키라고 압박을 가할 거야. 만약 싸움이 나면 좀 도와줘야겠어.”

“그 동안 많이 시달렸는지 아흐마드 파샤의 부하들이 마론파와 드루즈파에게 이를 갈고 있더라고요.”

이 시대 레바논에서 드루즈파가 강성하고 마론파 기독교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이민호는 어째서 20세기 중반까지 레바논에서 마론파가 득세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1516년부터 레바논을 장악했던 드루즈파는 18세기 중반에 이 지역 아미르였던 바쉬르 2세가 마론파로 개종하면서 몰락했다. 아미르가 드루즈파 지도자들을 궁전에 소집한 다음 모두 죽여 버리고 드루즈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신도가 확 줄어들었다.

대신 마론파 신도들이 늘어나 다수가 됐다. 마론파도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아랍인들이기에 평상시에는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전례 언어는 예수 시대의 언어였다는 전통의 아람어였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마론파가 주축이 된 레바논의 팔랑헤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수적으로는 이슬람에게 밀려버린다.

“왕도에 돌아가면 비행기에서 투하할 폭탄을 만들자.”

“내륙지역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겠군요.”

비행기를 개발함으로써 지상군을 내륙 깊숙이 투입하는 위험과 장기적인 원정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지지 않고도 넓은 지역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게 됐다. 예멘에서 이맘의 세력과 싸울 때 내륙 산악지역 깊은 곳에 위치한 사나를 칠까말까 고민하던 것이 바로 1년 전이었는데 그 문제가 바로 해결됐다. 폭탄 재고에 한계가 있어서 항복할 때까지 폭탄을 퍼붓지는 못하겠지만, 그럴 가능성만으로도 상대는 공포에 질리게 된다.

수상비행기로 마론파 교회를 살짝 공격한 것이 당장은 아니었지만 장기적으로 레바논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마론파와 드루즈파를 비롯해 레바논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소수 종파들은 오래 전부터 종교 탄압을 피해 산악지대로 몰려든 종교 공동체의 후손들이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등장하면서 산악지대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기독교 세력이 쫓겨난 직후 맘루크들에 의해 보복 학살을 당한 적이 있던 레바논 산악지역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소수 종파들, 특히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이번 일로 고산국에 찍히면서 비행기로부터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살아남으려면 본거지를 멀리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론파 지도부는 고산국 국왕에게 교황 암살 시도에 대해 사죄하고 암살에서 손을 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리가 동방 정교회에 가까우면서도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해 로마가톨릭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려는 식으로 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여기에 1601년부터 시리아 총독이 된 아흐마드 파샤가 개입했다. 순례 중에 교황 암살 시도에 개입했던 마론파 지도부들은 교단에서 내쫓기고 다마스쿠스로 압송돼 죄과를 받았다.

“아흐마드 파샤의 공이 큽니다. 도로 공사와 교황 성하의 경호까지 깔끔하게 잘 처리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폐하. 두 종교의 화합을 위한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에 제가 자그마한 보탬이 된 것 같아 기쁩니다.”

아흐마드 파샤가 준비한 연회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술과 기름진 음식은 물론 배꼽춤을 추는 무희조차 없었다.

아흐마드 파샤는 리드완 왕조의 수장이라 불리는 이 지역 유력자이면서도 분위기를 읽을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아주 조금 섭섭했다.

“앞으로도 순례자들을 잘 보호해주십시오. 파샤만 믿겠습니다.”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교황 성하. 내년 초에 제가 시리아 총독으로서 다마스쿠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알 쿠즈, 그러니까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그 북쪽도 제가 관할하게 됐습니다. 더 이상 기독교도 순례자들에 대한 위험은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순례 기간 동안 불미스런 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파샤께서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순례자들은 더더욱 안전할 것입니다. 마론파와 드루즈파는 확실한 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으드득!”

이번 일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개인적인 원한, 혹은 가문의 원한도 어느 정도 쌓인 모양이었다. 아흐마드 파샤가 마론파와 드루즈파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도록 밀어주기로 했다.

다만 아흐마드 파샤의 나이가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교황도 나이가 많아 앞으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모처럼 능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서 이민호 입장에서는 몹시 편했으나, 앞으로 어떤 후계자들이 나와서 멍청이 짓을 할지 걱정스러웠다.

이번 성지 순례로 인해 교황이 기독교 세계에서 확실한 권위를 인정받게 됐다. 교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에서도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상 이런 합리적인 교황만 선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흐마드 파샤도 고산국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시리아 총독으로 승진하며 다마스쿠스 등 레반트 북동쪽 넓은 지역을 장악하게 됐다. 반독립적인 레바논에도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지역에 평화가 정착될 것으로 기대하게 했다.

고산국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양쪽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어느 쪽의 신도도 아니라서 아직 확실한 종교적 칭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군사력이나 자금만으로 성취할 수 없는 종교적 권위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레반트 전 지역이 이집트를 중개지로 한 고산국의 무역권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일단 하나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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