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64 70. 귀로 =========================================================================
새벽에 함대가 아슈도드 항구를 빠져 나가는 중에 어둠 속에서 나타난 꽤 큰 상선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형을 확인해보니 고산국에서 건조해 덴마크 서인도회사에 대여한 상선 3척 중에서 한 척이었다.
역시나 마스트에 새로 만든 아이슬란드 여왕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 배는 헤드비히 공주가 성묘 기사단 기사로서 근무하는 동안 지중해 연안을 돌며 무역을 하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국왕 전하 천세!”
갑판에 한 줄로 늘어선 선원들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여왕의 배를 운영하는 선원들 중에 절반이 덴마크, 절반이 고산국 국적이었다.
현재 서인도회사에 임대된 상선의 항해와 기관 부서는 고산국 국적만을 고용할 수 있었다. 범선만으로는 교역에 어려움이 큰 탓에 어쩔 수 없이 고산국 상선 세 척을 임대 형식으로 서인도회사에 넘겼다.
“저는 뱃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본토나 북미에서 훨씬 안정되고 수입도 많은 직업을 쉽게 구할 수 있잖아요? 뱃사람들은 역마살이 낀 건가요?”
“역마살과 다르면서도 비슷하지. 하지만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데 뭐 어쩔 거야?”
북미 도시의 회사에 속한 상선 선원도 아니고 덴마크 서인도회사에 고용된 고산국 선원들은 방랑벽의 극치에 이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절반은 고산국 국적을 유지한 채 덴마크로 가족 전체가 옮겨 살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하지 않은 선원들도 흔했다.
“주인님도 왕도에 차분히 계시라는 요구를 많이 받죠?”
“어쩔 수 없어. 이번 성지 순례처럼 내가 하는 일이 사실상 없더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 민지 너는 돌아다니는 게 싫어?”
“아니요. 그럼 아예 호위를 안 했죠.”
민지는 여진족 호위들 사이에 낀 몇 안 되는 조선인 혈통이었다. 함경도 여자나 평안도 여자는 오히려 여진족 여자들보다 말 타고 활 쏘는 데에 능했다. 여진족과 몽골족이 조선보다 좀 더 가부장적이기에 여자가 남자처럼 하고 다니기가 더 어려운 탓이었다.
민영은 숙소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의와 간호사들, 여진족 호위들이 극진하게 모셔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후궁 대접을 받았다.
“호위대장이 되니까 어때?”
“민희님이나 민영님처럼 주인님과 수준 높은 대화를 할 자신이 없어요.”
“일반 호위도 그렇지만 호위대장은 특히 힘든 일이야. 하지만 내게는 단순한 대화 상대가 필요한 것이지, 재상이나 참모가 할 조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정답을 말하려고 과도하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무슨 말을 하든지 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까.”
“그래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어요.”
민영이 여진족도 아닌 함경도 노비 출신인 민지를 추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머지 호위들은 국익이나 전쟁을 주제로 이민호와 대화를 나누기를 어려워한 까닭이었다.
여진족 호위들도 수원에서 살 때부터 충분히 교육을 받았기에 대화 상대로서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왕과 대화할 때는 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탓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착하다. 공부는 평생 해야지.”
“헤헤!”
자그마한 체구의 민지는 머리를 쓰다듬기에 딱 적당했다. 키가 작아서 어렸을 때부터 몸보다는 머리를 많이 썼기에 호위대장에 적합했을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 함대는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에 도착했다. 바다 양쪽으로 오가는 범선이 잔뜩 떠 있어서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이라클리온 항구 바깥에 몰타 기사단의 군선 네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왕! 엄마!”
이라클리온 항구에 내리자마자 베네치아 시녀들이 부모 품에 뛰어들었다. 이민호가 물끄러미 모녀 상봉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데 추기경이 알현을 신청했다.
“교황 성하께서 바로 오늘 로도스 섬으로 가서 성 요한 구호기사단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미사를 열기를 원하십니다.”
로도스 섬은 1522년 슐레이만 대제 때 오스만 제국에 함락됐다. 이때 성 요한 기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소수의 생존자만 시실리 섬으로 퇴각하는 것이 허용됐다. 이들의 후배들이 몰타 섬을 중심으로 지중해 전역에서 활동 중이었다.
로도스 섬에서 교황이 미사를 올리는 것은 이미 오스만 제국의 동의를 받았다. 로도스의 산작베이와도 협의를 마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객선 한 척만 가는 것으로 하십시오. 순양함 네 척을 호위로 딸려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교황이 탄 여객선과 1개 전대가 내일 오전에 크레타로 돌아오기로 하고 출발했다. 몰타 기사단 범노선 4척이 각각 고산국 순양함에 예인된 채로 함께 동쪽으로 향했다. 교황 호위 전대는 전단 기함과 일정 시간마다 계속 통신을 주고받았다.
기독교도 입장에서야 오스만 제국 바로 코앞 로도스 섬에서 사투를 벌인 기사단이 자랑스럽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해적질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로도스 기사단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미사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괜히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거슬릴 필요가 없었다.
그 동안 할 일이 없어서 이민호는 침전에서 베게만 안고 뒹굴었다. 민지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다가 일부러 말을 걸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아직도 크레타를 정복하지 못한 것이 신기해요.”
“베네치아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니까.”
크레타 섬은 동지중해 무역의 중심이었고 소아시아 남서쪽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상활동을 틀어막는 위치에 있었다. 오스만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지역이었다.
키프로스와 로도스가 연이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면서 크레타도 오스만의 공격에 노출돼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21년에 걸친 칸디아 공성전 끝에 1669년에 정복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서 오스만 제국에서 계속 욕심을 내겠지. 하지만 이 섬이 오스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낸다면 현상 유지를 할 수도 있어.”
“만약 전쟁이 난다면 우리는 베네치아나 오스만 제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군요. 오스만과 싸우지 않으면서도 베네치아 편을 들어야겠죠?”
“왜?”
“예?”
이민호가 묻자 민지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우호적인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것에 관여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크레타가 베네치아령으로 유지되는 것이 좋겠지만, 어떻게 되든 우리하고는 상관없어. 물론 베네치아나 오스만에서는 우릴 두고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말이야.”
“방금 말씀은 국가기밀이 돼야겠어요.”
“물론이야.”
고산국의 소극적인 대응 계획이 알려질 경우 자칫 이 지역의 균형에 큰 변동을 초래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부담 없이 크레타를 공격하고 베네치아는 고산국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고산국 입장에서 이익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한 사실이 유럽과 오스만 제국에 알려질 거야. 스위스 용병들을 태운 배가 수에즈와 로마를 오가다가 크레타에 자주 입항하겠지? 그럼 우리가 베네치아하고 친하니까 베네치아 영토인 크레타 섬을 지켜주고 있다고 오스만 제국에서 오해할 거야.”
“계속 오해해주는 게 좋겠어요.”
새로 호위대장이 된 민지하고는 대화가 잘 통했다. 이민호는 민지가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민영이 후임으로 추천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했다.
“그 동안 옆에서 지켜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다른 민족을 정복해 노예로 삼을 생각이 없다.”
“예. 먹여 살리기 귀찮으니까요.”
민지가 이민호의 대외 정책을 아주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괜히 제국의 위엄을 세계만방에 떨치기 위해 명나라나 인도를 정복해서 지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주인님 하루 종일 하품만 하시네요?”
“따분하니까. 요즘 잠을 하도 많이 자서 이제는 누워도 잠이 안 와.”
“그럼 남는 시간에 아이들을 안아주시면 좋겠어요.”
“그럴까? 그럼 민지 너부터.”
“어머나!”
조명 몇 개를 꺼서 침전을 어둡게 했다. 민지는 체구가 작은데도 호위로서 수련을 멈추지 않았는지 등 근육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
“제 몸이 흉하지 않아요?”
“아니. 아주 마음에 들어. 오늘 안으면 몇 번째지? 요즘도 세나?”
“52번째에요.”
“그것 참 미안하군.”
열 번째라고 했던 것이 꽤 오래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날 밤, 베네치아 시녀들이 이라클리온 항구의 집에서 묵는 동안 이민호는 여진족 호위들에게 더욱 신경을 써줬다.
다음 날 아침 고산국 함대가 서둘러 바다로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독교 배들과, 이스탄불과 북아프리카를 오가던 무슬림 배들이 크레타 섬 서쪽 해협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 해협은 두 항로가 교차하는 곳이라 이런 사태를 예견해 몰타 기사단 함대가 집중 배치됐으나, 마침 기사단 함대가 로도스로 빠진 틈에 일이 생겼다.
민간 선박들끼리의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북쪽 그리스 방향에서 출동한 오스만 제국의 함대가 크레타로 접근했다. 크레타에서도 베네치아 함대가 대응 출동해서 두 함대가 바다에서 만났다.
전열을 갖추고 발사 준비를 마친 양쪽 함대가 대포를 쏘며 싸우기 직전, 고산국 함대가 크레타 서쪽 해상에 도착해서 간신히 싸움을 뜯어 말릴 수 있었다. 하마터면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날 뻔했다.
오스만 함대와 베네치아 함대의 지휘관들이 탄 기함들이 서로 뒤질 새라 국왕좌승함으로 급히 달려왔다. 갑판으로 올라온 지휘관들은 저마다 상대방의 도발이 먼저였다고 주장했다.
“어찌된 일이오? 한 사람씩 차분히 말하시오.”
그러나 오랫동안 싸워온 이들이기에 함대 지휘관들은 서로에 대한 비난부터 퍼부었다. 이들에게 싸움의 발단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폐하! 저기 불탄 채 가라앉는 가련한 순례자들의 배를 보십시오! 무슬림들은 예나 지금이나 해적에 불과합니다!”
“트리폴리의 무역선들은 기독교인들이 모욕하는데도 참고 그냥 지나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무역선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도선해서 싸움을 걸었습니다. 트리폴리 상인들은 정당한 방어를 했음을 알아주십시오.”
트리폴리 무역선 3척은 대포 여러 문을 탑재한 꽤 큰 범선이었고, 기독교 순례자들이 탄 배들은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크기였다. 그러나 주변에 기독교 배들이 수십 척이었고, 오스만 함대가 조금만 늦게 왔다면 무슬림 상인들이 몰살당할 뻔했다.
오랜 싸움으로 원한이 쌓인 양쪽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럴 때는 몰타 기사단 함대가 교통정리를 해줬어야 하나, 주요 지휘관들이 교황을 호위해서 로도스에 가 있었다. 같은 기독교 함대라 해도 베네치아 함대와 달리 몰타 기사단은 성지 순례 기간에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에 동의했었다.
“생존자들이 모두 구조됐습니다, 전하.”
“국왕좌승함으로 부르게, 전대장.”
탐사선이 침몰 중인 배에 접근해서 바다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순례자들을 구조해왔다. 부상자들을 포함해 20여 명인 순례자들이 이민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반대로 트리폴리 무역선 선장도 국왕좌승함에 직접 와서 변론했다.
사건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양쪽이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고산국 함대는 휴전 기간 동안 중립으로서 두 세력이 지중해에서 싸우지 못하게 말릴 의무가 있었다.
“기독교도 순례자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트리폴리 배들이 먼저 공격했다고 하느님께 맹세할 수 있느냐? 대답하라! 무역선 3척이 순례자들의 배 50척을 향해 먼저 공격했는지 물었다.”
“틀림없이 무어인들이 먼저 공격했습니다, 폐하! 저희 순례자들이 탄 배에는 대포도 없는데 어찌 먼저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맹세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맹세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평소라면 거짓말을 했을 자들이었으나,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부로 거짓 맹세를 할 배짱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알아보니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트리폴리 무역선으로 건너갔던 자들은 다 죽었다.
“수장시켜버리기 전에 어서 맹세해!”
“모,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진실을 고하라!”
이때 베네치아 함대 지휘관이 슬그머니 빠져 나가 함대로 돌아가려 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위들이 지휘관을 막아섰다.
“저희들이 탄 배의 선장이 분노에 이성을 잃고 무어인의 배를 들이받았습니다. 계속해서 욕설을 퍼붓다 광기에 물든 선장과 선원, 그리고 일부 순례자들이 칼을 뽑아들고 무어인의 무역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방적으로 패했나?”
“다른 무어인들이 탄 배가 기독교도 배들보다 먼저 와서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선원들 대부분이 싸우다 죽었고, 저희들은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렸다가 구조됐습니다.”
“너희들이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겠다. 다른 배에 타고 집에 돌아가도록 해라.”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순례자들이 절을 하고 서둘러 다른 배로 옮아 탔다. 이민호는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의 함대 지휘관들을 불렀다.
“지금 교황 성하와 오스만 제국 황제폐하께서 합의하신 휴전이 진행 중이오. 양쪽 함대 지휘관들은 조약 내용을 이행하셔야 할 것이오.”
“분쟁을 해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체면이 선 오스만 제국 지휘관이 먼저 물었다. 베네치아 지휘관은 먼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통역이 전해주는 말을 다 듣고 있었다.
“크레타와 그리스 사이의 해협은 폭이 20레구아도 되지 않고 중간에 섬도 있소. 양쪽 함대가 반씩 나눠서 지키도록 하시오. 그리고 베네치아 함대는 순례자들이 탄 배가 크레타에 가까운 바다를 항해하도록 유도하시오. 오늘 안에 몰타 기사단 함대가 로도스에서 돌아올 테니 그때 이후에는 임무를 해제해도 좋소.”
“황제폐하로부터 지중해에서 고산국 함대의 협조 요청에 최대한 협력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임무를 받들겠습니다, 폐하.”
오스만 제국의 함대 지휘관이 돌아가고 나서야 베네치아 함대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순례자들이 탄 배를 보호하는 것은 교황 성하와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지시하지 않더라도 저희 기독교 함대의 당연한 종교적 임무입니다. 순례자들의 귀국 행렬이 뜸해질 때까지 주변 해역을 지키겠습니다.”
“고맙소. 그렇게 하시오.”
베네치아 본국에 대한 고산국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강하기에 크레타에 주둔하는 함대 지휘관은 순순히 임무를 받아들였다. 덕택에 몰타 기사단 함대가 로도스에서 돌아올 때까지 이 해협에서는 더 이상 싸움이 나지 않았다. 순례자들이 탄 배나 오스만 제국의 상선들은 마치 순한 양들처럼 양쪽의 군선들이 지키는 해협을 서둘러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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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로마에 승객들을 내려놓고 이번 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