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71 71. 북대서양 =========================================================================
“관과 상인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그렇소. 관에서 아무리 열심히 협조해줘도 상인들에게 섭섭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오.”
국왕과 시장 레벨에서 말하는 상인은 규모가 큰 무역상들을 지칭했다. 건국 초에 이민호가 조선과 명나라를 들락거릴 때에는 모든 상거래를 직접 통제했다. 조선의 해동상단이나 명나라 신라방 같은 경우 이민호가 시킨 일을 수행하기도 벅차서 자체 계정으로 상거래를 하는 경우는 아주 적은 비중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용상단이라 불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근에 북미를 개발하고 유럽 국가들로 교역 중심이 옮아가면서 새원산을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한 독립적인 상공인 세력이 있었다. 대부분 조선인이며 소수 중국인 혹은 고산국에 귀화한 유럽인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에서 공개한 기술로 훈련된 직공들을 고용해 생산한 면직물 등 상품을 유럽에 수출해 큰돈을 벌었다.
“하오나 전하. 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상인들이 똘똘 뭉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가격 담합이나 일삼는 상인조합은 없애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상품 가격을 시청에서 정하겠다는 뜻이오?”
“그건 아닙니다만, 상인들이 너무 뭉쳐서 시청에 대항하는 식이라면 나중에 왕실에도 대항할 수 있어서 더욱 위험합니다.”
새원산 시장도 상품 가격이 일일이 통제되면 시장이 제 기능을 잃고 재화가 효율적으로 분배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다가 이민호에게 물은 것이었다.
“관료로서 상인들을 통제하려면 상인들이 분열돼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지만 상인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려면 상인들끼리 서로 협력하도록 어느 정도는 내버려둬야 하오. 지금 문제가 되는 자들은 전문 무역상도 아니고 기술이 중요한 상공인들 아니오?”
“유럽의 각종 직공 조합처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직공 길드의 폐해도 있지만 장점도 분명히 있소. 그리고 고산국은 토지를 왕실에서 독점하고 사업체의 지분을 보통 절반 넘게 보유하고 있는 한, 상인들은 결코 국가와 관에 대한 도전을 하지 못할 것이오.”
이민호는 자본의 국제화, 특히 금융자본이 국제화될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00퍼센트 왕실 또는 정부 자본이 투자된 은행이 국제자본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은행이라 칭하는 금융기관은 전당포 비슷한 서민 대여기관에 불과했다.
고산국에서는 상인이 창업하는 순간부터 국가의 지분 참여가 시작됐다. 자본 증감과 영업 분야 변경 등 중요한 문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나머지는 대표이사인 상인이 자유롭게 영업행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만약 국가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회사의 영업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상인들을 자주 접해야 하는 시장의 관점은 달랐다.
“저는 상인들의 탐욕이 두렵습니다. 상인들은 국가의 부를 훔쳐 개인의 재산으로 만들 소지가 다분한 자들입니다. 직공을 고용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국가에서 다년간 교육비를 들여 훈련시킨 기술자들을 상인들이 거의 공짜로 쓰지 않습니까?”
“그래도 상인은 상품을 새로 만들어내도록 일하는 자들이라 꼭 필요하오. 직공이나 근로자들처럼 직접 손을 써서 만드는 자들만 상품을 생산한다고 착각하면 곤란하오. 상인들이 계속해서 팔기 때문에 직공들이 꾸준히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오. 그 역할을 인정해주시오. 사실 나도 상인 출신 아니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러나 상인들의 가격 담합 행위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한 회사가 독점하나 여러 회사가 담합하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독과점은 공정경쟁을 방해하고 기술 개발을 억제하며 결국 국가와 소비자에게 손실을 끼친다.
“그럼 어떻게 가격 담합을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수출품을 제외하고 국내용 소비재만 두고 말씀드립니다.”
“2개 이상 회사의 상품 가격이 1퍼센트 이내로 비슷하다면 무조건 담합으로 간주하고 그 품목의 일 년 영업이익에 해당하는 벌금을 때리시오. 상인들이 돈을 숭상하는 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막대한 벌금이오.”
시장 점유율이 적은 업체는 선도 업체에서 생산한 상품의 기능과 디자인 등을 따라하려는 속성이 있었다. 선도 업체는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같은 가격이라도 더 큰 이익을 얻지만, 후발 주자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가격을 낮춰야 경쟁이 가능하고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약 시장 점유율 2, 3위 업체들이 제시한 상품 가격이 선도 업체와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었다. 현재 가격을 바탕으로 시장 점유율을 유지함으로써 최대한 이익을 얻으려는 업체들의 담합으로 봐도 좋았다.
시장에서 자유경쟁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상인들은 단순한 협잡꾼에 불과했다. 그런 이익단체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를 끼칠 뿐이니 없애버려야 마땅하다는 결론만 나왔다. 자본주의 체제로 가기로 결정한 이상, 신규 창업자들과 공정한 경쟁이 될 토대를 확실히 만들어줘야 했다.
“물론 경쟁업체를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격을 조작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규정을 보완하고 보름 동안 공고한 다음 시행하겠습니다, 전하.”
“시장도 눈치 챘겠지만 새원산 상인들이 다른 이들을 꼬드겨 보낸 기명 또는 무기명 투서가 왕궁과 정부에 산처럼 쌓이고 있소. 시장이 부패하고 역심을 품은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비난이 주요 내용이오.”
“황공하게도 제가 상인들과 관계가 틀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전하. 저보다 유능한 관리를 새원산 시장으로 보내주소서. 그리고 현재 새원산 시장에게 맡겨진 권한이 너무 큽니다. 최소한 군권만이라도 분리해주십시오.”
말이 시장이지 북미 도시들에 부임한 시장들은 다른 나라 같으면 거의 총독급이었다. 특히 새원산 시장이 관할하는 영역은 캐나다를 빼고도 현대 미국의 주 경계선을 기준으로 하면 미시간 호 서부까지 15개 주에 이르렀다. 권한이 집중된 만큼 시장이 반란과 독립의 유혹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원산 시장이 이렇게 상인들과 척을 지고 있는 동안에는 반란은 꿈도 못 꿨다. 그리고 상인들이 보낸 투서로 미루어 시장이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증명됐다.
“그렇지 않아도 군대 지휘권은 조만간 분리할 것이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시장이 상인들을 교육시키도록 하시오. 지금 필요한 것은 상인들이 바치는 뇌물이 아니라 상인들이 시장(市場)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이민호가 시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무역회사들의 경영을 감시할 왕립 감사국 북미 분소를 새원산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고산국에서는 관리들도 기본 소득을 받았다. 관리 일을 관두더라도 생활에 지장이 없기에 관리들이 직무를 이용해 뇌물을 받는 등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부패한 공직자는 자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자리보전에 연연하지 않는 내부 고발자가 쉽게 고발할 수 있어 제대로 견제할 수 있었다. 물론 고산국에서 내부 고발자는 전혀 불이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승진에 도움이 됐다.
이런 이유로 본토에서는 감사국이 제대로 활약한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인들과 머리싸움을 제대로 하게 될 것 같았다. 그 동안 이중장부를 작성했던 상인들은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상인들이 탈세할 경우 기본이 재산 몰수이고 여차하면 탄광에 갈 수도 있었다.
“자유 시장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는 상인이 아니니 관두고 직공이나 농민을 하라고 하시오.”
“예, 전하. 그리고 담합 행위가 과할 경우 상인 조합은 물론 그 상인들의 사업체도 해산시키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은 시장이 하시오. 책임은 내가 지겠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다만 북미 동해안의 경기가 위축될까 두렵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맞는 말씀이오. 그리고 경기가 위축되면 좀 어떻소?”
자전거 경기장을 만들 때 제안은 시장이 하고 공은 국왕이 독차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일에 대한 책임도 국왕인 이민호가 지기로 했다. 경제를 핑계로 불법을 눈감아줬다간 어떤 꼴이 될지 훤히 알고 있는 이민호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상인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소. 전에는 함대 어용상인이 신라방 상인들이었는데 지금은 보급 계통 장교들이 하고 있소. 고등학교에서도 기본적인 상행위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우고 졸업한다오.”
“그래서 인도네시아 무역도시들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전하를 존경하는 것 같습니다.”
“뭐, 상업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단이었을 뿐이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면 안 될 것이오.”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맨해튼 남쪽에 위치한 시청에 도착했다. 시청에서 도로 건너편 12층 건물은 오후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외벽이 유리로 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힘차게 내질렀다.
새강릉의 12층 건물은 시청으로 사용했으나 새원산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관광지로 설계했다. 12층과 옥상 전망대 외에 나머지 층에는 주로 식당가나 상가가 들어섰다. 물론 화재에 특별히 대비했다.
그래도 12층 건물 옥상에는 해양경계용 관측 장비가 배치되고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먼 바다에서 정체불명의 범선이 나타날 경우 이들이 해군과 육군, 시청에 통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새원산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효과도 거두고, 관광객들에게서 입장료를 더 받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2층 건물이 그냥 관광지라면 입장료를 내기 아깝더라도, 군인이 지키는 실제 군사기지라면 돈 내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 일반인들의 인식이었다.
“새원산 관할 지역의 치안 문제는 어떻소?”
“도시 지역, 특히 맨해튼 섬에는 외국 상인들이 많이 방문하는데도 대단히 안정됐습니다. 주변 원주민 부족들도 다른 부족의 약탈에 시달렸던 예전보다 훨씬 안전해졌다고 좋아합니다. 다만 인종별 거주지의 경계지대에서는 오해로 인해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납니다.”
“처음부터 아예 뒤섞어버릴 걸 그랬소.”
“그래도 출신 국적별로 정착시킨 것이 이주민들을 조기에 안정시키는 효과가 컸습니다.”
무슬림인 모리스코인들은 무신론자에 돼지고기를 즐기는 명나라 노무자들을 몹시 혐오했다. 그리고 가톨릭교도는 무슬림을, 개신교도는 가톨릭교도를 증오했다. 유럽의 역사에서 비롯된 원한관계는 고산국에 와서도 지속됐다.
“출신국별로 경찰과 관리를 뽑으라는 지시는 이행했소?”
“예. 아직 조선말을 제대로 못하더라도 출신국별로 다만 몇 명씩이라도 채용했습니다. 고국에서 다들 2, 3개 국어를 구사했던 사람들이라서 조선말도 금방 배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선말을 금방 배워요? 뭐, 열심히 하면 조만간 배우겠지요. 통역으로 잘 활용하도록 하고, 소속 인종 집단에게 얼굴을 자주 내비치게 하시오.”
국민통합을 명분 삼아 모리스코인, 프랑스인, 아일랜드인, 북미 원주민 등을 관리나 경찰로 채용했다. 조선 외의 국가 출신 이주민들도 동등한 고산국 백성이라는 정치적 선전이 주목적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경찰과 관리는 항상 인력이 부족해서 인종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주민들도 순조롭게 북미에 적응해서 잘 살고 있었다. 그들의 조국은 이제 고산국이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지옥에서 구해졌다는 인식이 강해 고산국에 큰 애착을 가졌다. 모리스코인들도 북아프리카 땅으로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고국에서 종교적 이유로 핍박 받았던 두 인종 모두 종교의 자유만큼은 고산국에서 실컷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민을 계속 받으실 예정이신지요?”
“물론이오. 이주민들이 분리 독립할까봐 불안해 할 필요는 없소. 조선 출신 이민자와 그 자손들로 5할에서 6할 정도를 유지할 예정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를 원주민과 이민자로 채우는 것뿐이오.”
현재 고산국의 인구 구조에서 10세 미만이 절반 이상이었고 16세 미만 법적 미성년자가 거의 7할에 달했다. 인력 부족 문제는 조만간 해결될 것 같았다.
“성인 3명이 아이 7명을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북미의 농업생산력도 엄청났지만 사실상 전하께서 다 먹여 살리셨습니다.”
“몇 년 만 더 기다리면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인력이 부족하지 않게 될 것이오.”
“그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다시 아이들을 잔뜩 낳을 것입니다.”
“그럼 좋지 무엇이 문제요? 땅은 넓소.”
백성들이 당분간 아메바처럼 무한 증식을 하더라도 북미와 호주를 합하면 10억 정도 부양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지금도 곡식이 넘쳐나서 농민들이 이제는 과일과 채소, 담배 등 환금작물 재배에 주력했다. 여차 하면 모든 농경지를 곡물 생산으로 전환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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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덴마크로 가야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