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72화 (621/1,000)

00672  71. 북대서양  =========================================================================

인구가 증가하는 동안 일반적으로 전체 경제규모는 계속 성장한다. 늘어난 인구가 소비할 자원과 재화 생산량을 계속 증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수요도 증가해 평소라면 버려뒀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땅과 기회를 찾아 오지로 떠난다. 이때 경제 제도가 웬만큼 막장이 아니라면 인구 증가만으로도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통계에 집값과 토목공사 비용까지 포함되면 지표상으로 어마어마한 증가가 있게 된다.

오대호 연안의 이리 시는 들르지 못하고 다음 날 새원산을 떠나 카나타로 향했다. 작은 마을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이곳도 어항과 모피 시장으로 꽤나 번성했다.

새원산에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어민들에게 식량과 숙소, 안전한 항구와 시장을 제공한 이후 유럽 어선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어선들은 만선이 돼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 시장에서 생선을 판매한 다음 다시 조업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면허장을 받지 못한 배들이라도 입어료를 내는 점만 빼면 고산국 어선이나 다름없는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그래서 외국 어민들이 일 년에 8개월 동안 이곳에 아예 눌러앉으려고 합니다. 일부는 입어료를 내기 싫어서 이민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면허장이 유명무실하게 되면 항의가 들어올 테니 면허 없는 어선에게서 입어료를 반드시 받게.”

플라센티아와 합쳐서 400여 장을 발행한 면허장보다 조업 중인 어선 수가 훨씬 더 많다는 문제가 있었다. 면허가 없는 유럽 어선들은 일단 근해에서 조업을 한 다음 카나타 항에 입항하면서 후불제 식으로 입어료를 냈다. 이런 관행이 굳어지자 새원산 시청에서도 무면허 외국 어선들을 강제로 추방하지 않았다.

“외국인 선주나 선장들이 일정한 기간이 넘으면 이 해역에서의 조업을 권리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런 요구를 하는 움직임이 좀 있습니다.”

“원래는 면허장을 받은 외국 배 이외에는 조업을 금지시키려 했어. 조업을 허가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말이야. 외국 어선들의 입어료를 3할 정도 인상하게.”

“예. 선장이나 선주가 고민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상률입니다. 다음부터는 조업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유럽 어민들 입장에서는 어획고를 올리는 것만이 수입이 아니었다. 모피나 고산국 상품을 사서 돌아가 유럽에 판매하는 것이 더 짭짤했기 때문이다. 유럽 어민들은 이곳에서 고산국 국내 유통가격으로 상품을 사기에 무역상들보다 양은 적더라도 더 많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다음 날 입항한 뉴펀들랜드 섬의 플라센티아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유럽 어민들이 새원산에서 보낸 냉동선에 일정 길이 이상의 선어를 판매하고, 나머지 작은 것들은 포를 떠서 물고기 말리는 곳으로 보냈다.

대서양에서 어획고가 가장 높은 곳이 뉴펀들랜드 섬 주변에 2백 km씩 넓게 펼쳐진 대륙붕 해역이었고 주 어획 대상은 대구, 그 중에서도 특히 대서양대구였다. 고산국과 유럽 어선 수백 척이 뉴펀들랜드에 몰려와 대서양대구 한 어종만 연간 5만 톤 정도를 잡았다.

실제 역사에서는 1500년대부터 1750년까지 250년 동안 대서양대구 800만 톤이 잡혔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저인망 어선이 등장하면서 15년 동안 같은 양인 800만 톤을 잡았다. 결국 얼마 못 가서 대구 어획량이 가파르게 줄어들고 어민 3만여 명이 실직했다.

현재는 숫자가 적은 고산국 어민 외에도 유럽 어민들이 조업을 해서 간신히 북미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유럽 어선들이 더 많이 몰려와서 조업을 해도 어획량에 여유가 있으니 아직 조업을 금지하지 않았다. 다만 카나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어업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이는데 신경을 썼다.

“전하. 대서양대구의 산란지와 치어의 서식지를 몇 군데 파악했습니다. 산란기에는 해안 곳곳이 물 반 고기 반이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인공 산란과 치어 양식도 가능하겠소?”

고산국 어업연구소 뉴펀들랜드 분소장은 10여 년 전 해중국 전복양식장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 동안 북미 새강릉 분소에서 체서피크 만의 청게를 연구하다가 작년부터 뉴펀들랜드로 옮겼다.

길이가 1.1미터, 무게가 16kg에 달하는 대서양대구는 수명이 15년 정도로 짧고 빨리 자라는 편이었다. 지방이 적어 오래 보존하기 좋은 식품이면서 어획량이 많아 상업적 어업의 대상으로 적합한 어종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대구는 해안 가까이 산란을 하며 치어도 얕은 물에서 자랍니다. 수온이 다른 치어양식장 다섯 곳에서 여러 가지 사료를 써가며 최적의 양식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민들은 조업 대상 어종의 생태나 서식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어민들이 돈이 되는 한 씨를 말리도록 조업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어획고가 줄어들수록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어민들은 알고도 어족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시장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유지의 비극’은 공유지에서 목축을 하는 마을에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해수면 밑 어족자원의 총량을 파악하기 어려운 어업에서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식으로 한때 물 반 고기 반이었던 어종이 짧은 시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20년대 정어리, 1970년대 참조기, 1980년대 쥐치를 남획해서 고갈시켰다. 한창 때는 아무리 잡아도 절대 고갈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어종들이었다.

지나친 남획은 그 고기를 잡는 어민을 위해서라도 정부에서 막아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했다. 그러나 어획량이 수산업 담당 공무원이나 부처의 실적 평가와 관련되면 남획을 절대 막지 못한다.

노가리가 명태 새끼인 것은 술안주로 노가리를 뜯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어획량에 목을 멘 수산업 담당 공무원들과 어민들은 노가리가 명태와 다른 어종이라고 박박 우겨서 1980년대에 명태 어획량이 급감하는 동안에도 무제한으로 계속 잡았다. 결국 동해안에서 명태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지금까지 유럽 어민들에게 알려진 바와 달리 대서양대구는 회유성 어종이며 북대서양대구(pollock)는 정착성 어종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대서양대구가 노르웨이나 프랑스 연안에 서식하는 북대서양대구보다 상품성이 훨씬 높습니다.”

“회유성이라면 일이 쉬워져서 다행이구려.”

어족 자원을 주인 없는 돈으로 인식하는 한, 어민들에 의한 남획을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꾸준히 잡다 보면 어느새 어획량이 확 줄어들어 다시 회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산국에서는 어업연구소를 통해 인공 수정과 치어 방류를 주요한 사업 과제로 삼았다. 덕택에 사료 생산과 유통, 치어 양식장 등 관련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는 남미에서 많이 잡히는 정어리를 사료로 수입했다.

대서양대구는 1월과 3월 사이에 북대서양 연안에 몰려와 알을 낳았다. 산란이 한창일 때는 대구가 하도 많아서 배가 항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연안 전체가 허옇게 물색이 변할 정도였다.

어족 자원이 흔할 때 약간의 노력만으로 어획량을 유지하는 편이 훨씬 쉬웠으므로, 지금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바닷물고기는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에 불과했다.

“산란기에 금어기를 설정하고 이곳 뉴펀들랜드와 그린란드, 아이슬란드에 부화장과 치어양식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유럽 어민들이 고국에 돌아가는 시기라서 금어기가 잘 지켜질 것입니다.”

“수산업법을 개정하고 예산을 배정해주겠소. 그런데 그린란드에 근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겠소?”

정치가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실무 부처에서 어떤 행정행위의 수행이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예산을 배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지원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말만 그럴 듯하게 해서는 허망한 구호에 그치고 만다.

“저라면 관두겠습니다만, 승진이나 격오지 수당을 제시하면 지원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린란드는 눈과 얼음에 덮인 땅이었다. 더욱 문제는 그나마 따뜻한 남쪽은 수많은 섬들로 구성돼 이동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대서양대구보다 작은 그린란드대구가 서식하며 아이슬란드 근해와 스코틀랜드 북쪽 바다에는 대서양대구와 다른 종인 해덕(haddock)이 서식했다. 그린란드대구는 태평양대구와 같은 종이었다.

“괜히 부하 직원들에게 강요해서 관두게 하지 말고, 설상차가 개발된 다음에 치어양식장을 건설해도 늦지 않을 것 같소.”

“전하! 그 일을 그린란드 원주민들에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흐음! 생각해보니 그린란드에는 섬과 만이 무수히 많아서 굳이 부화장이나 치어양식장을 건설할 필요도 없겠소. 곡식과 철제 도구를 줄 테니 산란기에 대구 산란장을 보호해달라고 원주민들에게 요청하시오.”

“그게 좋겠습니다. 곡식과 철제 도구를 충분히 제공하면 그린란드 원주민들이 유럽 어민들과 접촉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어업연구소는 농업연구소나 국방연구소와 함께 고산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실용연구기관이었으며 당연히 최고 대우를 받았다. 이들 기관은 항상 해외로 바쁘게 움직이는 국왕의 손발이나 다름없었다. 이민호가 이론과 가능성을 제시하면 이들 연구기관에서 시간을 들여 결과를 만들어냈다.

- 까악!

키가 허리까지 오고 부리가 큰 날짐승이 이민호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민호가 화들짝 놀라는 사이, 새의 접근을 알고 있었던 호위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민호가 엉겁결에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날씬한 펭귄 같은 새는 뭐요?”

“웨일즈 어민들이 펭귄이라 부르는 큰바다쇠오리입니다, 전하. 이놈들 때문에 뉴펀들랜드 섬에 개와 고양이의 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펭귄은 원래 큰바다쇠오리에 붙은 이름이었다. 큰바다쇠오리가 멸종한 다음에는 비슷하게 생긴 남극의 새에게 펭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큰바다쇠오리는 요즘 잡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뉴펀들랜드나 그린란드 근해에서 조업 중이던 유럽 어민이나 탐험가들이 잡아먹고, 수가 줄어든 다음에는 박물관 박제용으로 사냥해서 멸종시켰다. 그러나 식량이 풍부한 현재 뉴펀들랜드에서는 어민들이 굳이 큰바다쇠오리를 사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고산국에서는 큰바다쇠오리를 딱히 보호종으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국 어민들은 고산국 관리들에게 밉보일까봐 다른 지역에 배를 대지 못하게 됐고, 큰바다쇠오리들은 수백만 마리라는 엄청난 숫자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뭐, 어쩔 수 없구려. 그렇게라도 해서 보호하지 않으면 사람한테 좋다고 달려드는 이 멍청한 놈들은 금방 멸종될 것이오.”

생태계는 인간이 알기 어려운 방법으로 연결돼 있어서, 한 종의 멸종은 다른 종의 생존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구아노의 사례처럼 큰바다쇠오리의 새똥이 바다로 흘러들어 플랑크톤을 증식시키고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먹이사슬을 형성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해달을 잡아 없애니까 성게가 늘어 해초 숲이 멸망하고 물고기가 산란할 곳이 없어지는 연쇄작용을 이 시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민호가 큰바다쇠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비올레타가 물었다.

“하는 행동이 귀엽네요. 전하께서는 이 새를 왕도의 동물원에 보내고 싶지 않으세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할 거여요.”

“그건 아니요. 추운 지역에 사는 놈을 더운 곳에 보내면 문제가 많을 것이오.”

고산국이 뉴펀들랜드와 그린란드, 아이슬란드를 차지하고 있는 한 큰바다쇠오리가 멸종할 일은 없었다. 어업연구소 분소장이 대구포를 찢어 큰바다쇠오리에게 주는 것을 보면서 이민호는 국왕좌승함으로 돌아왔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자연에서 풍부한 자원을 얻으려면 꾸준히 연구하고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 자연 앞에 왜소한 인간이 거만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지만, 인간이 자연이 해악을 끼치는 이상으로 자연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칠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진 고산국 국왕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은 아이슬란드입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