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73 72. 아이슬란드의 여왕 =========================================================================
72. 아이슬란드의 여왕
북극해에 가까운 바다에는 5월에도 가끔 빙산이 돌아다녀서 항해용 전파탐지기를 작동시킨 채 조심스레 북동쪽으로 향했다. 물론 1912년에 침몰한 타이타닉 호와 달리 호위 함선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국왕좌승함이 빙산에 충돌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한 함선 9척에서 사방의 바다를 경계 중인 견시만 40명에 가까웠다. 바다를 흐르는 빙산을 발견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너희들은 국왕폐하의 시녀들이지만 동시에 아이슬란드 여왕폐하의 신하이기도 하다. 두 분을 모실 때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 공작 전하.”
국왕좌승함 침전에서 비올레타가 아이슬란드 시녀들을 세워놓고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이민호는 졸음을 꾹 참으며 교육이 끝날 때까지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요즘 왕궁 사람들이 은근슬쩍 이민호를 전하가 아닌 폐하라고 부르는 경우가 늘었다. 이민호는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명나라나 조선에 일러바칠 사람이 없는 자리라면 칭호 정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유럽 왕실에서는 남성 국왕과 그의 배우자인 왕비 모두에게 폐하라고 칭한다. 그런데 군주가 여왕일 경우에는 여왕만 폐하라 칭하고 그 부군을 폐하가 아닌 한 등급 낮은 전하라고 칭한다. 영국 왕실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후 엘리자베스 왕비는 폐하,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은 공식 칭호가 전하다.
“넌 이름이 뭐지?”
“카트린 브륀디스아르도티르입니다, 전하.”
“카트린! 왕실에 들어온 이상 부칭은 쓰지 말랬지?”
“죄,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비올레타가 가느다란 가죽 채찍을 들면서 카트린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카트린이 오들오들 떨면서 치마를 올린 다음 비올레타의 무릎에 상체를 올렸다.
이민호가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왕실 여자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어서 이 상황에 끼어들기는 곤란했다. 조선에서도 국왕이 내명부의 일에는 거의 개입하지 못했다.
- 짜악!
“꺄악!”
비올레타가 다 큰 처녀의 엉덩이를 까고 채찍을 휘두르는 꼴을 보게 됐다. 그 장면이 묘하게 선정적이었지만 이민호는 가슴이 아팠다.
비올레타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아이슬란드 시녀들도 필사적으로 고산국 왕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슬란드 입항을 앞두고 시녀들을 단속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헤드비히 여왕폐하께는 소피에와 카트리네라는 여기사, 나나, 리네, 요한나라는 시녀들이 있다. 이들과 너희들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여왕폐하의 시녀 분들이 신분이 높습니다. 저희들은 아이슬란드라는 작은 섬나라 속국의 귀족 영애일 뿐이나 그분들은 덴마크의 당당한 귀족 영애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국왕폐하의 승은을 이미 입은 줄로 압니다. 그에 반해 저희들은 아직 학생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일단 왕궁의 여자가 됐다면 승은을 입든 말든 무조건 국왕폐하의 여자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리고 시녀라면 국왕폐하와 가까운 쪽이 무조건 높다. 너희들은 고산국 국왕폐하의 시녀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헤드비히 여왕폐하가 비록 아이슬란드의 여왕이시라 하나 감히 고산국 국왕폐하와 동등한 위계에 계신 분이라 할 수도 없느니라.”
결국 아이슬란드 시녀 여섯 명이 다 벌을 받았다. 만에 하나 대답을 잘했다 해도 아직도 조선말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면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폐하!”
“어, 수고하셨소, 비올레타.”
“시녀들이 사소한 실수를 하더라도 자칫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도 있어요. 다른 교육은 폐하께서 직접 시키세요.”
“그렇게 하겠소. 이만 편히 쉬시오.”
비올레타가 냉기를 폴폴 날리며 에스파냐 시녀들과 함께 침전에서 나갔다. 로잘린이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다가 시녀들에게 동정의 눈빛을 던지는 중에 이민호와 눈이 마주쳤다. 로잘린이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닫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줄지어 선 시녀들 여섯이 침전에 남아 있었다. 숙소에 있었다면 서러워서 눈물을 펑펑 쏟았을 것 같았다. 이민호가 민정에게 눈짓을 해서 어의를 불러오도록 했다.
“쯧쯧! 고생한다. 이리들 올라와라.”
아이슬란드 시녀들을 침대에 올라오게 한 다음 속옷을 내리고 엎드리게 했다. 평소라면 엉덩이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겠지만 채찍에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사이 유부녀 어의와 간호사가 침전에 들어왔다가 화들짝 놀랐다.
“전하! 성적 취향이 변하신 것이옵니까? 그렇다 해도 시녀들의 몸에 상처를 낸다면 조금 과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요.”
어의가 간호사와 함께 시녀들의 엉덩이에 상처 소독용 연고를 바르면서 물었다.
“그럼 누구이옵니까? 비록 교훈을 주더라도 이들은 전하의 여자들입니다. 아니라 해도 여성의 몸에 상처를 주는 체벌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범인은 이 안에 없소.”
“그렇군요. 하지만 비올레타님이 생각 없이 그랬을 리는 없고, 뭔가 뜻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시녀들이 충분히 크기 전에는 안지 않을 것이오.”
어의가 혀를 차면서 침전에서 나갔다. 여섯 시간마다 새로 바르라고 어의가 약을 남겨두었다.
시녀들 중 하나가 훌쩍거렸다가, 깜짝 놀라면서 울음을 그쳤다. 침전에는 이민호 말고도 여진족 호위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녀들에게 여진족 호위는 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내명부의 일이라서 저도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시녀들을 여기서 재우실 건가요?”
민지가 묻기에 이민호가 아예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쩔 수 없지. 작은 숙소에서 훌쩍거리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아.”
“주인님 앞에서 엉덩이 까고 엎드려 있는 것이 더 부끄러울 것 같아요.”
“그런가? 홑이불이라도 덮어줘.”
이민호는 아이슬란드 시녀들의 뒷모습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른 홑이불을 가져온 민지가 소파에 오르더니 이민호와 함께 덮었다. 민지를 꼭 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순양함과 수송선의 순항속도는 동일하게 23노트, 현대 화물선의 순항속도인 25노트보다 약간 느렸다. 1해리가 1.852km니까 시속 42.6km로서 24시간에 이동하는 거리는 1,000km 살짝 넘었다.
선단의 이동 속도는 속도가 가장 느린 배가 기준이 되므로 전투함과 동행하는 수송선의 속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현대 군함과 달리 고산국 순양함은 선형이 수송선과 비슷하게 함폭이 넓었다. 최고 속도는 줄어들지만 안정성과 적재량 면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이틀 동안 항해해서 오전에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서쪽 해상에 도착했다.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항구 언덕에 하얀 왕궁이 서 있었다. 성곽은 아직 건설 중이었지만 본궁 건물만은 새원산에서 보낸 건축기술자들이 고급 자재를 써서 완성시켜 놓았다.
“거 참. 별로 쓸 일도 없을 텐데, 낭비 같아.”
“왕궁은 그 나라의 얼굴과도 같은데 허름하게 지을 수도 없잖아요.”
“할 수 없지. 상륙하자.”
민지가 호위 네 명과 함께 이민호를 근접 경호하는 가운데 민정이 나머지 호위들을 이끌고 배에서 먼저 내렸다. 지자 돌림 호위들은 충분히 교육을 받은 데다 이곳이 법적으로 아직 고산국 영토가 아니라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귀족들이 부두에 달려 나와 여왕폐하의 부군을 맞이했다. 그 사이 레이캬비크라는 도시 자체가 크게 변해서 귀족들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허름한 목조 건물 몇 채가 있던 항구가 유럽 여느 대도시들보다 최신의 도시로 변모했으니 매일 일어날 때마다 자기 뺨을 꼬집어 볼 것 같았다.
“왕궁은 해가 진 다음에 가고, 먼저 지열발전소부터 갑시다.”
“저희들이 안내하겠습니다, 전하.”
말을 탄 귀족들이 앞장서고 호위들과 장갑차 행렬이 뒤따랐다. 도로도 잘 닦아 놓았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말도 추운 기후에 적응했는지 검은 말갈기가 몹시 길었고 신체 다른 부위에도 많이 났다.
지열발전소보다는 온천에서 레이캬비크로 온수를 연결하는 파이프가 먼저 완공됐다. 왕궁은 물론 레이캬비크에 새로 지은 집마다 실내난방을 하는 동시에 뜨거운 온천수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찬물이 필요할 때는 온천수를 밖에 내놓아 식혀야 했다.
- 삐이익~
지열발전소는 완공을 앞두고 시험 가동 중이었다. 고산국 기술자들이 국왕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험 가동에 매달려 있었다. 이민호는 합리성을 강조하는 젊은 국왕이었기에 능력 없는 꼰대들처럼 의전만 중요시하지 않았다.
“압력 더 낮춰! 잘못하면 터지겠다.”
“문제가 있소?”
이민호가 레이캬비크 지열발전소장인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소장이 화들짝 놀랐다.
“여긴 지하의 기압이 너무 강해서 문제야. 앗! 전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도착했소. 바깥도 신경 좀 쓰시오. 적이 공격하면 어쩔 뻔했소?”
“지금 중요한 순간이란 말입니다. 경비는 경비대가 알아서 하겠지요.”
이곳 지열발전소에서는 지하에서 올라온 강한 압력의 뜨거운 수증기가 터빈을 직접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지하 수증기의 온도와 압력이 낮아서 다른 냉매를 투입해 2차 발전을 하는 방식이었다.
“전하께서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오신 모양이다. 전원을 화력발전에서 지압발전으로 전환해라!”
“전력 공급원을 전환하겠습니다.”
- 파앗!
잠시 발전소 건물의 전등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전력을 변환했다는 표시였다. 이제 무한대에 가까운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성공이다! 국왕전하 만세!”
“만세!”
소장과 기술자들이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불렀다. 이민호는 얼떨떨했으나 기분은 매우 좋았다.
소장이 이민호 기분 좋으라고 방문일시에 맞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예정일보다 며칠 늦게 지열발전을 성공해냈다.
“수고하셨소. 여러분은 고산국의 전력산업에서 새로운 발전방식을 성공시킨 기술자들이오. 다른 곳에서도 지열발전소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공하기 바라오.”
“헤헤! 전하! 며칠 놀고 시작하겠습니다.”
“물론이오. 다음 연락선 편으로 북미에 가서 한두 달 쉰 다음에 다른 발전소를 지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러나 지열발전소는 왕궁이나 레이캬비크 민가의 전등불을 밝히기 위해 건설한 발전소가 전혀 아니었다. 지열발전소를 지은 것은 알루미늄 제련소를 돌리는데 필요한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제련소도 이미 레이캬비크 외곽에 완공됐다. 원료인 보크사이트는 호주에서 대량으로 실어왔다. 보크사이트는 광상이 형성된 조건에 따라 사암이나 화강함, 편마암 등 형상이 제각각이기에 이것이 과연 보크사이트를 얼마나 함유했는지 한 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크사이트가 지표 가까이서 발견되기에 대부분 노천 광산에서 쉽게 채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보크사이트는 경제성이 떨어져 채굴을 포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보크사이트는 호주 여러 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다. 호주의 보크사이트 매장량은 세계 2위, 생산량은 세계 1위를 자랑했다.
보크사이트는 처음에 수산화알루미늄, 즉 알루미나로 변환했다가 전기분해를 통해 알루미늄으로 제련한다. 이 과정에 필요한 싸고 막대한 양의 전기를 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빙정석은 그린란드에서 구하지 못했고 형석으로 합성 빙정석을 만들어냈다.
북미에서도 수력발전소를 건설해 값싼 전기로 알루미늄 제련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댐을 지으려면 몇 년씩 걸리고 댐에서 항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련소까지 굵은 송전선을 연결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답답했다. 레이캬비크는 항구에 가까운 곳에 운영비가 아주 저렴한 지열발전소를 세울 수 있어 가장 경제적으로 알루미늄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었다.
“폐하! 알루미늄은 로마시대에 처음 만들었는데 금보다 몇 배나 비싼 금속이라고 들었어요. 이것으로 화폐를 만드시려고요?”
“아니오. 싸게 생산해서 보전식품용 깡통이나 항공기를 만드는데 사용될 것이오.”
비올레타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근세까지 알루미늄은 제련하기 어려운 고가의 금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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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