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76 72. 아이슬란드의 여왕 =========================================================================
다음 날 저녁 함대가 덴마크 쾨벤하운에 도착했다.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항구까지 달려 나와 반갑게 마중했다.
“나도 크리스 자네를 봐서 반갑네만, 옷이나 제대로 입고 나오지 그랬나? 설마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을 입은 건 아니겠지?”
“아! 거기, 기사! 망토 좀 빌려주게.”
크리스티안이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과 비슷한 연출을 했다. 다행히 젊은 국왕이라 배가 나오지는 않아 안구 테러할 일은 없었다.
“자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서 말일세.”
“국왕이 되니 외롭지? 친구를 좀 사겨.”
“왕이 되면 문제가 생길까봐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아. 비키가 유일한 친구였는데 이번에 자네가 데려갈 거잖아.”
“안 됐네. 여동생 대신 늙은 학자를 친구로 사귀면 어떨까? 권력에 꼬이는 파리들이 줄어들 거야.”
크리스티안 4세는 작년에 장남 프레데리크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죽어서 몹시 낙담했으나 최근에 다시 활달해졌다. 이 시대에는 많이 낳고도 어릴 때 워낙 많이 죽어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자식이 드문 편이었다.
그것은 왕가에서도 다를 바가 없어서 왕조가 교체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현재 고산국에서 임시로 의사들을 파견하고, 덴마크 유학생들을 받아 왕도와 마카오에서 교육 중이었다.
고산국의 의술은 이미 유럽 국가들에 정평이 나 있었다. 유럽 여러 왕실에 초빙된 고산국 의사들은 왕족의 진료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공중위생에도 관여해 전체적인 위생 수준이 크게 올라갔다. 덕택에 흑사병이나 여러 가지 치명적인 전염병의 유행이 유럽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덴마크 왕실과 궁정은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신랑인 이민호는 할 일 없이 크리스티안의 안내를 받아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녔다.
오늘은 두 국왕이 항구로 행차했다. 군제개혁과 경제개혁을 추진 중인 덴마크의 젊은 왕은 해군 함선들이 크게 증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민호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
“서인도회사에서 이익을 많이 낸 덕택에 함선의 건조 속도가 빨라지고 있네. 60척을 건조할 예정인데 승조원이 부족해서 문제야.”
“승조원이 부족하더라도 배는 미리 만들어두는 편이 좋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니 말일세.”
“그렇지? 늙은 대신들은 그걸 이해 못해. 부족한 승조원은 상선 선원들로 채울 수도 있는데 말이야.”
군선을 비롯한 배는 제작 기간이 길어 유사시에 숫자를 증가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배가 신형이면 승조원들이 배에 적응하지 못해서, 낡으면 배의 성능 자체가 떨어져서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했다. 해군을 유지하다 보면 그런 고민은 항상 갖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났을 때 상선 선원으로 부족한 군함 승조원 숫자를 채우는 것은 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네덜란드 같으면 독일계 해군 용병들을 대량으로 고용해 해전에 투입했다.
영국은 사략선을 동원하는 외에 상선을 징발해 선원들을 항해에 종사시키고 전투는 지상군이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유럽 해군은 아직 발전하는 중이었고, 고질적인 자금 부족 현상 때문에 전시에는 동원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했다.
“그런데 저 비행기 말일세. 비행기는 배를 공격해도 배는 비행기를 공격하기 어렵잖아? 그럼 군함의 시대는 끝난 걸까?”
순양함에서 이륙한 수상비행기가 외레순 해협을 따라 날고 있었다. 쾨벤하운 시민들은 물론 멀리 해협 건너편에서도 구경꾼들이 해안에 몰려와 비행시간 내내 함성을 질러댔다.
유럽의 군함에서 머스킷이나 전장식 화포인 컬버린을 쏴서 비행기를 격추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비행기의 능력을 확인한 크리스티안은 속으로 몹시 불안한 듯했다.
“배에서 비행기를 공격할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비행기가 유리하긴 해도 절대적인 무기는 아니야. 그리고 먼 바다에서 비행기가 활약하려면 배에서 이륙해야 해.”
“내가 배를 건조하는 게 헛짓은 아니었군. 설마 비행기를 외국에 팔지는 않겠지? 지금 덴마크의 기술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전혀. 장갑차나 배의 기관도 안 팔잖아. 서인도회사에 임대한 기관 달린 배나 잘 지켜줘.”
덴마크는 고산국과의 동맹, 특히 공동 설립한 서인도회사를 통해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여왕호를 비롯해 기관으로 추진하는 상선 세 척은 발트 해 연안의 교역에서 다른 범선 열 척 이상의 효율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더 이상 덴마크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기관 추진식 상선을 빌려줄 생각은 없었다. 앞선 기술을 가능한 오랫동안 독점하는 편이 여러 모로 국익에 합당했다.
“이번에는 육군을 사열해보세.”
크리스티안이 권해서 이번에는 항구에서 가까운 들판을 향해 이동했다. 이민호는 크리스티안과 같이 화려한 왕실 마차에 타고 기병과 장갑차들은 뒤에서 따라왔다.
들판에 기병과 보병, 포병으로 이뤄진 군대가 대열을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보병은 머스킷병과 장창병 위주였고, 기병 일부는 흉갑기병이 아니라 기사처럼 전신 갑옷을 입은 권총 기병이었다. 다들 군기가 제대로 잡힌 정예병들이었다.
“어떤가? 내 야심작인 용병부대라네.”
“용병치고는 군기가 제대로 잡혔군. 그런데 용병만 전쟁에 투입하려고?”
“전쟁이 날 경우 소작농들이 징집돼 보조부대에서 근무하도록 계획했어.”
“아예 징병제를 하지 그래?”
“스웨덴은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하는 거야.”
스웨덴에서 조만간 징병제를 실시할 예정이라는 소문을 이민호도 들었다. 그러나 북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징병제를 선택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시민들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직업군인과 다름없는 용병들이 전쟁에 투입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계산 탓이었다.
스웨덴이 징병제를 실시한다 해서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징병제는 용병제의 보충, 또는 자금이 부족한 스웨덴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스웨덴마저도 자금이 허용하는 한 용병을 더 많이 고용하려 했다.
그리고 인구가 적은 스웨덴에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중소 자작농과 광부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징병제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스웨덴의 징병제는 근대와 현대 국가의 징병제인 국민개병제와 많이 달랐다.
“전쟁 기간에는 소작농을 징병해도 주력은 여전히 용병이 맡아야 해. 전쟁 수행 능력은 용병들이 확실히 나으니까. 자네도 용병을 많이 활용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고산국의 주력은 고산국 국적을 가진 직업군인들이야. 해군과 해병대 전체, 육군의 절반 이상이 직업군인이잖아.”
“직업군인과 용병이 다른가? 다르겠구나. 그 많은 병력을 상비군으로 유지하다니, 대단해.”
고산국에서 유지하는 병력은 북미와 구주에 전개된 여진족 기병과 구르카 여단을 포함해 육군이 3만, 해군이 해병대 포함 2만 약간 넘었다. 앞으로 1만 톤급이 기준 함선이 되면 해군 승조원이 많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됐다.
5만이라면 아시아 기준에서 보면 한 줌밖에 안 될 정도로 적은 규모였지만 유럽 기준으로는 대군이었다. 게다가 이 시대 유럽 국가들의 세입으로는 모병제를 통해 비슷한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비군이 아니더라도 유럽 국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병력 규모도 적었다. 오스만 제국과 에스파냐 정도만이 한 전선에 5만 이상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매년 병사들 봉급만 금화로 5백 만 플로린 정도야.”
“우와! 유지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드는군. 지금보다 줄였다가 전시에만 병력을 증가시키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자네가 용병을 고용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야. 저 비행기를 조종하는 장교는 얼마나 훈련을 받아야 할까? 장갑차를 모는 조종수는? 기관을 작동시키는 해군은? 다들 몇 년씩 다뤄온 전문가가 해야 하는 일이야. 기병처럼, 아니 기병 이상으로 숙련도가 필요해.”
물론 고산국에서도 징병제를 시행해 모든 성인 남자들에게 2, 3년 간 군역을 부과할 수도 있었다. 고산국 건국 초기에도 젊은이들에게 짧은 기간이라도 입대할 것을 권했었다. 벽돌 만들기나 막사 짓기 등 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기술도 군에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계산해본 다음 징병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유럽 국가들이 용병을 고용하는 것처럼 모병제로 직업군인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다.
그리고 모병제에 더해 고용 비용이 적게 드는 여진 기병과 구르카 용병으로 부족한 숫자를 채웠다. 스위스 용병들이 훈련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임무에 투입된다면 병력 부족 문제도 한시름 놓게 될 수 있었다.
“보게! 멋지지 않은가?”
“보기에 좋군.”
어딜 가나 사열식은 멋졌다. 덴마크군 병사들이 기병과 보병, 포병 순서대로 분열을 하며 크리스티안 4세가 백마를 타고 서 있는 곳 앞을 지나갔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옆에 말을 타고 선 이민호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을 참고 견뎌야 했다.
“덴마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스웨덴이 아니라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이라네. 유럽 왕실들이 다 그렇듯이 여기저기 핏줄이 연결돼서 여차하면 외국 영토로 넘어갈 수도 있어.”
“뭐라고? 북소리 때문에 안 들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은 신성로마제국 영토이면서도 덴마크 국왕의 영지로서, 덴마크 국왕은 동군연합의 군주로서 이 지역을 통치했다. 중세 이후 북부 슐레스비히를 제외하면 덴마크인보다 독일인 거주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나 프랑크왕국 샤를마뉴의 북진을 막은 덴마크의 구드프레드 왕은 811년에 아이더 강을 경계로 획정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등, 덴마크에게도 역사적 권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유럽은 국가 혹은 영지마다 결혼제도와 상속제도가 달라서 모계 계승을 부정하는 살리카 법은 물론 귀천상혼 배제 원칙이 적용되는 지역들이 있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왕과 왕비의 자손이 왕위 계승자가 되려면 왕비도 국왕과 동등한 신분이어야 하기에, 왕비의 출신 가문이 극도로 제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노버 왕국은 한때 영국과 동군연합이었지만 여성에게 왕위를 상속하는 것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 즉위 후에 영국에서 분리됐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도 승계 문제에서 살리카 법이 적용되는 영지라서 상황에 따라 덴마크로부터 분리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까, 시간이 남는 내가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을 순회하면서 민심을 사로잡아라 이거지?”
“그래. 독일계 백성들이 덴마크는 우습게 봐도 고산국은 달리 볼 테니까.”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이 덴마크의 지배로 넘어갔을 때 독일계 주민들은 매우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독일계 주민들이 덴마크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킨다거나 덴마크의 지배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실천에 옮긴 적은 없었다. 이 시대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아직은 지배자가 외국인이라도 받아들였다.
“흠. 어차피 시간도 남는데 유람도 할 겸 그 지역에 가서 고산국과 덴마크가 동맹국임을 과시해주지.”
“이왕이면 제국 자유시 함부르크를 정복해주면 더 좋아.”
홀스타인 남동쪽에 위치한 함부르크는 엘베 강을 통해 북해에 연한 항구 도시로서, 같은 한자 동맹 도시이며 1241년 이래 강력한 동맹 관계인 뤼벡이 쇠락하는 것과 달리 아직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201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가 홀스타인과 함부르크를 점령해 한때 20여 년 동안 지배하기도 했으나 반격을 받아 물러섰고, 지금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제국 자유시라는 법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방어전쟁 때만 도와준다고 했지?”
“농담이야. 하하!”
표정을 보니 전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시대 함부르크의 경제적, 전략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고산국이 덴마크와 함께 함부르크를 점령한다면 신성로마제국 전체를 상대로 선전포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고산국 군대가 강하다지만 소수에 불과하기에 덴마크 국왕 입장에서 그것은 악몽이었다.
다음 날 오전 장갑차 중대와 기병 중대, 구르카 중대, 그리고 왕실 직할의 덴마크 권총 기병대를 이끌고 홀스타인의 북단인 항구 도시 킬에 상륙했다. 아이더 강 북쪽의 슐레스비히는 누가 봐도 확실한 덴마크 영토였기에 그 남쪽 홀스타인에서만 무력 시위하기로 크리스티안 4세와 합의했다.
왕실 기병대가 커다란 깃발을 휘두르며 앞서서 달리고 장갑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대로에 몰려나온 독일계와 소수 덴마크계 농민들이 국왕군과 동맹국인 고산국 군대의 행진을 구경했다.
장갑차를 처음 보는 농민들은 집채만 한 쇳덩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비행기가 행군 대열 상공을 지나가자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도망쳤다.
“정말 크군요.”
“뭐가 말이오, 비올레타?”
비올레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방목장에서 풀을 뜯는 얼룩무늬 젖소들이 있었다. 요즘 고산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하는 품종이었다.
“홀스타인 젖소는 착유량이 아주 많다고 들었소. 특히 영양 부족 증상이 심각한 아일랜드의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렇죠. 저렇게 크니까요.”
비올레타가 젖소를 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기 가슴을 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이민호가 머리에 손을 짚었다.
“혹시 헤드비히 공주가 이야기했소?”
“예. 전하께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젖소의 유방을 만지셨다고요.”
“휴우~ 내가 변태로 낙인찍히고 만 것 같소.”
“풋! 푸하하하! 표정 푸세요.”
비올레타가 오랜만에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그 사건 때문에 후궁들에게 평생 놀림감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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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늦어지네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