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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95화 (644/1,000)

00695  75. 스텝  =========================================================================

“저 도적떼의 마을을 점령해 가족들을 노예로 삼아야 합니다, 대왕! 여자와 아이만 남아 어차피 해체될 마을입니다.”

“내버려두시오. 여자들은 친척들이 알아서 지켜주겠지요. 아니면 뜯어먹거나.”

토르구트의 타이지가 초원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칙을 제안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방금 죽은 키르기스 족의 가족들을 노예로 삼는 게 더 인도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로 삼는다지만 다른 부족을 흡수하는 방식의 하나로서, 아이들이 크면 부족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민호는 키르기스 마을에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마침 감동이 키르기스 족 전사자들 사이에 숨어있는 자들을 끌고 왔다.

“부상자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포로들입니다, 도련님. 121명입니다.”

“잘 됐네. 군의관은 응급처치를 해주고, 통역! 내 말을 전해다오.”

이민호는 군의관들이 포로들 몸에 칼질과 바느질을 하는 동안 몇 가지를 일러두었다. 강도질을 하던 키르기스 전사들이 신의 징벌을 받았으니, 나머지 가족은 고산국이 건설하는 철도선 안쪽으로 들어와서 보호를 받든지 아니면 친척들에게 의탁해서 살길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철도는 고산국과 나머지 세계, 그리고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선이었다. 폭력에 절은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자유와 죽음의 분리선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너희들 무슬림 맞지?”

“예, 예. 중국에서 말하는 회교도가 맞습니다.”

무슬림이 듣기에는 비칭이 될 수 있는 호칭이 회교도였지만 이들 입에서 아주 쉽게 나왔다. 총격의 무서움을 직접 겪었기에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철도선 북쪽으로 넘어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 고산국 치하에서 먹고 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그러나 철도와 그 북쪽 지역을 공격할 경우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 그리고 비행기를 동원해서 어디든 본거지까지 쓸어버리겠다. 종교의 자유도 보장한다. 카자흐든 키르기스든 고산국을 신경 쓰지 않고 지금처럼 살아가도 좋다.”

“관대하십니다.”

“내 의견은 이렇다. 따를지 말지 너희들이 판단해서 결정해. 그리고 다른 부족들에게도 알려라. 어서 가!”

포로들을 말에 태워서 보냈다. 포로들은 쭈뼛쭈뼛하더니 어느새 속도를 내어 남쪽으로 치달렸다.

“타이지! 초원에 나오자마자 싸움을 했소. 앞으로 계속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소.”

“송구합니다. 저희는 그저 대왕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토르구트 타이지가 아부하는 꼴은 처음 봤다. 토르구트 부족 입장에서는 고산국을 계속 등에 업으면 정착하고 난 뒤에도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듯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보기에 토르구트는 기병을 최대한 몇 만씩 내는 강력한 전사 집단이라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토르구트에게 유일한 위협은 코사크도 노가이도 크림한국도 아닌 루스 차르국뿐이었다.

“이곳은 오래 거주하기에는 불편하겠지만, 토르구트 족 전체가 가축을 몰고 초원으로 이주하는 도중에 짧게 머물면서 휴식을 취할 만하겠소. 조만간 철도가 놓일 테니 여기에 식량을 준비해두겠소.”

“매번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토르구트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주지를 선정하고 이동로를 개척하는 일에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1630년에 토르구트 족이 노가이 족의 본거지인 볼가 강 저지대를 빼앗기 전에 이곳 이르티쉬 강 유역에 잠깐 머물렀었다. 어디로 향하든 땅은 넓고 죄다 초지라서 유목민들이 풍족히 살 수 있는 지역이었다.

토르구트에게 밀린 노가이 족이 코카서스 북쪽으로 이주하면서 다른 지역에도 순차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유목민 부족이 집단으로 이주하는 일은 초원 전체에 연쇄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지만, 흔히 일어났다.

“유목에 가장 적합한 땅을 찾는 것이 타이지의 사명인 것 같소. 우리 함께 찾아봅시다. 아! 타이지가 직접 비행기를 타보면 어떻겠소? 비행기에 타면 높은 곳에서 멀리까지 살필 수 있소.”

“대왕!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토르구트의 타이지에게 고소 공포증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에도 몇 번 권했었지만 타이지는 절대로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 했다.

그 사이 여진족 기병들이 양떼와 수레 행렬을 몰고 왔다. 울란우데에서 몽골족에게서 구입한 양을 기차에 실어 아스 시까지 보내면 보급을 맡은 여진족들이 이곳까지 보급을 추진했다.

꽤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다고 자부하던 요동 여진족들은 시베리아의 스케일에 압도돼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스텝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남쪽은 카자흐 족과 키르기스 족이 섞여서 살고 있소. 그들이 토르구트의 상대가 되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에는 더 좋은 초지를 찾는 게 좋겠소.”

“저희들은 추운 지역도 상관없습니다. 저희 부족 정찰병들이 살펴 본 결과 시비르한국이 망하고 나서 그 영역이 비어 있다고 합니다.”

바투가 세웠던 킵차크한국이 멸망하면서 크림한국, 아스트라한한국, 카잔한국, 시비르한국으로 분열됐다. 카스피 해 북쪽, 우랄산맥 서쪽에 세워진 카잔한국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루스 차르국의 영역에서 노예사냥을 업으로 삼다가 1552년 이반 4세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우랄산맥 동쪽 오비 강 하류 지역과, 남쪽으로 이어진 광대한 스텝 지역을 영토로 삼았던 시비르한국이 2년 전에 코사크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는 수도가 적에게 점령되거나 칸이 전사하면 쉽게 망해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토르구크 부족이 여기서 이쉬타르 강을 따라 내려가 시비르한국 시대에 코사크들이 건설했던 튜멘이나 토볼스크를 점령한다면 시비르한국을 대신해 넓은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튜멘과 토볼스크는 코사크가 붙인 러시아식 이름이고 시비르한국 때에는 그 지역 근처에 도시 칭기투라와 요새 카실리크가 있었다.

“숫자가 적긴 한데 타타르인들 외에도 한티인, 만시인, 네네츠인 등이 거주하고 있소.”

“예, 대왕. 저희들도 정찰대를 보내 여러 종족의 주거지 등을 어느 정도 확인했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그리신 큰 그림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지금까지 사내놈들끼리 서로 좋아서 붙어 다닌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민호와 토르구트의 타이지는 목적은 달라도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을 갖고 있었다.

“지도를 보시오. 나는 루스 차르국이 동쪽으로 밀고 오는 것을 원하지 않소. 우랄 산맥과 그 이남에서 루스 차르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 오스만 세력의 동진을 차단하길 원하오.”

“4한국이 차례로 망하면서 초원은 힘의 공백 상태입니다. 누구든 기회를 잡았을 때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유목민 부족은 주변 정세 변동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토르구트 부족이 오이라트 내부의 세력 다툼에서 물러나 서쪽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것에는 외부에 대한 꾸준한 정보 수집 활동이 바탕이 되었다.

“사실 나는 이곳 시베리아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 곤란하오. 그래서 그대 토르구트 부족을 동맹으로 삼아 우랄 산맥 남쪽의 스텝 지역을 장악하길 바라오.”

“볼가 강과 카스피 해까지 장악해야 고산국의 국경 방어가 편해지겠습니다.”

이민호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타이지의 말처럼 되면 좋겠지만 과다하게 넓은 땅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텝 지역은 아스 시부터 흑해 북쪽 드네프르 강, 우크라이나까지 뻗쳐 있었다. 스텝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타이지는 방어에 유리한 볼가 강 유역을 제시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그 선까지 우리가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되, 일단은 이곳부터 우랄 산맥 남쪽까지 우리 땅으로 만들어야겠소.”

“루스 차르국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돈 코사크 탐험대를 보이는 대로 쫓아내겠습니다.”

“지금까지 같이 움직이면서 총기의 장단점을 파악했을 것이오. 그러나 고산국이 보유한 총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오. 현재 사용되는 총기의 단점이 있는 만큼 잘 이용하도록 하시오.”

토르구트 족에게 화승으로 불을 붙이는 마상총 100정과 머스킷 100정을 넘겼다. 생각 같아서는 기병대대와 기병 포대 하나를 교대로 토르구트에 파견하고 싶었지만 장거리 파병이란 여러 가지로 부담이 컸다. 1개 기병연대가 고스란히 파병 업무에 매달려도 부족할 것이다.

“대왕! 먼저 우랄산맥 동쪽에 위치한 코사크의 요새들 중에서 튜멘을 쳤으면 합니다. 이곳은 여러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토볼스크를 공략할 때 지원을 맡은 곳입니다. 튜멘을 점령하면 토볼스크는 자연히 대왕의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

“좋소. 바로 갑시다.”

연합군은 루스 차르국이 1585년에 칭기투라를 점령하고 1586년에 세운 요새 도시, 튜멘을 향해 출발했다. 숙영할 때마다 토르구트 족이 기병연대의 도움을 받아 총기 사용법을 익혔다. 고산국에서 제조한 머스킷은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사거리가 더욱 길었지만, 안전을 위해 고산국 머스킷을 적도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여러 가지 유목민의 기병 전술을 수정했다.

중앙아시아와 볼가 강 유역 중간에 위치한 칭기투라에 이은 튜멘은 전통적인 교역 도시였다. 당연히 도시의 가치가 높아 지금도 여러 유목민 세력들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고산국과 토르구트 연합군은 이심을 거쳐 빠르게 북서쪽으로 행군했다. 나흘 만에 튜멘에 도착했을 때는 노가이 족이 튜멘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쩐지 중간에 코사크 탐험대를 못 만나서 수상하게 여기던 차였는데,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튜멘은 기본적으로 강변에 통나무로 쌓은 요새였다. 그리고 요새 바깥에 울타리를 치고 허름한 목조 건물 몇 채가 들어서 있었다. 울타리 뒤에 루스 차르국의 총병인 스트렐치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쉴 새 없이 머스킷을 발사했다. 말에서 내린 코사크인들은 활을 쏘았다.

노가이 족은 수비 병력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동원해 요새를 포위했다. 노가이 족이 대포 2문을 가져와서 쏘고 있었으나, 튜멘 요새에도 대포가 4문이나 있어서 노가이 족에 피해가 누적됐다.

“노가이. 큭큭!”

“왜 웃으시오, 타이지?”

“아무리 몽골어에서 개가 좋은 뜻을 갖고 있다지만, 부족 이름으로 개를 내세운 것이 지나쳐서 말입니다.”

1299년에 사망한 노가이 칸은 킵차크한국의 장군이며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노가이 족은 그 이름에서 딴 부족명인데 칸의 이름 노가이는 몽골어 노카이 혹은 노코이에서 왔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충성스런 부하 장수들을 ‘전쟁의 개들’이라고 표현했듯이 나쁜 뜻은 아니었다.

“혹시 고산국 국왕폐하이십니까?”

노가이 족의 병력 일부가 말을 타고 장갑차 행렬로 달려왔다. 기병연대가 경계태세를 갖추었으나 상대방은 고산국 국기를 확인하고 달려온 노가이 족의 지휘부였다.

“세상에! 우리 베이께서 오스만 제국 황제께 지원군을 부탁드렸더니 소문으로만 듣던 동쪽 나라의 국왕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노가이 족의 장군이 어찌 여기까지 왔소?”

놀란 것은 이민호도 마찬가지였다.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 그리고 그 북쪽 스텝에 있어야 할 노가이 족이 꽤나 동쪽까지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가이 족은 카스피 해 북쪽 연안과 그 인근에서 베이를 지배자로 모시며 살고 있는 자들과, 흑해 북쪽에 살면서 크림한국에 명목상 복속된 자들로 구분됐다. 그 외에도 여러 그룹들이 스텝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장군은 베이를 지배자로 모시는 집단이었다.

“그야 스텝에서 수확을 하기 위해서지요. 어? 그런데 저들은 칼미크 아닙니까? 요즘 자꾸 스텝 지역에 나타나던데, 고산국의 부용 부족이었습니까?”

“토르구트는 고산국의 동맹 부족이오.”

이민호가 그렇게 정정해주자 타이지가 꽤나 감동한 듯했다. 그런데 이민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유목민이 스텝에서 수확을 하다니, 설마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닐 것이오. 혹시 농민들의 마을을 공격해서 노예를 잡고 약탈하는 짓이오?”

“바로 그렇습니다, 폐하. 정주민족이신 폐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유목민에게는 생존에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민호가 이마에 손을 짚고 있는데 노가이의 장군이 너무나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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