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99화 (64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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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시베리아

우랄산맥 동쪽, 서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격변은 이 지역에 사는 여러 원주민 부족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북쪽의 한티 족과 만시 족은 모피 세가 사라지자 좀 더 많은 모피를 들고 튜멘을 찾아왔다. 거리가 멀어서 조만간 이르티쉬 강과 오비 강의 합류점에 교역 도시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남쪽 카자흐인들의 땅 카자흐 칸국은 큰 무리(Great Horde), 중간 무리, 작은 무리라는 이름으로 부족들이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세 무리로부터 공동 추대를 받아 즉위해야 할 카자흐 칸국 공통의 칸이 없었다. 그래서 북서쪽 영토는 노가이, 동쪽 영토는 오이라트에게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었다.

유목민 세력은 잠시라도 분열되어 약화되는 낌새만 보이면 즉각 주변으로부터 가혹한 침략과 약탈에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카자흐 칸국은 스텝 지역의 영토가 워낙 넓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가르에게 동쪽 영토를 대규모로 빼앗긴다. 코사크와 토르구트 족의 이 지역 이름인 칼미크도 카자흐 칸국의 영토 잠식에 참가한다.

“남쪽 카자흐 칸국과 남서쪽 노가이 족과는 가급적 충돌하지 말고, 국경 침범을 삼가시오. 다만 필요할 때에 대비해서 명분을 쌓아두시오.”

“예, 전하. 하오면 만약 도적 집단이 국경을 넘어 영토에 침입하더라도 영토 경계에서 추격을 멈춰야 합니까?”

“영토 경계선 너머까지 추격해서 섬멸하는 것은 허용하겠소.”

이민호가 그렇게 대답하자 토르구트의 타이지가 씩 웃었다. 그러나 설마 토르구트 기병이 카자흐 칸국의 영토를 관통해서 멀리 남쪽 페르시아까지 도적단을 추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었다.

“침략자들이 반드시 후회하도록 해주겠습니다, 전하.”

“혹시 튜멘 남쪽에 요새 같은 것을 세우는 게 좋겠소?”

이민호가 지도를 펼쳐서 현대의 쿠르간에 해당하는 지역을 손으로 짚었다. 원래 역사에서 쿠르간은 17세기 중반에 러시아 농민들에 의해 개척돼서 유목민의 약탈을 막아내던 요새 도시였다. 그러나 타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전하. 유목민 기병에게는 초원이 집이며 활동 공간입니다. 요새는 기병의 적입니다.”

“알았소. 그럼 타이지만 믿고 가겠소. 이주할 때 가급적 철도를 최대한 활용하시오. 만약 카자흐 지역을 관통해서 지나가면 문제가 많을 것 같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전하.”

8월 하순에 튜멘을 떠나 기차를 타고 남동쪽 옴으로 향했다. 튜멘에 시장과 관료 집단, 자원탐사단, 그리고 구르카 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튜멘 수비대와 우랄산맥 산악경비대가 도착한 다음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순양함에 국왕좌승함, 장갑차에 1호차가 있듯이 열차 객차에도 1호차가 있었다. 그다지 화려한 편은 아닌 대신 안전에 중점을 두고 설계된 객차였다. 생활하기 편하게 넓은 것도 특징이었다. 2호차와 3호차는 1호차 앞뒤로 연결된 객차였으며, 20명밖에 안 되는 여진족 호위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벌써 낙엽이 지는구나.”

“곧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겠죠?”

여진족 호위들이나 함경도 출신 민지는 추운 곳에 오래 못 있어서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추워지기 전에 얼른 왕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너희들은 그렇게 얇게 입고 안 추워?”

“조금 덥습니다, 전하.”

루스인 궁녀들은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조선말 외에는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워낙 추운 지역에서 살던 여자들이라 더위를 많이 탔다.

“쟤들 왕도에 데려가면 12월에 쪄 죽겠다.”

기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은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침전에서 뒹굴면서 시간을 보냈다.

호위들은 이민호가 이번에 다른 후궁이나 시녀들을 안 데려온 이유를 진정으로 알게 됐다. 여진 호위들은 그 동안 안겼던 횟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안겼다.

하루 만에 도착한 옴은 단순한 철도 교차점으로 예정하고 건설 중이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교역을 하겠다고 몰려온 원주민들 때문에 빠르게 도시로 성장해갔다. 철교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객차를 분리시켜 배로 이르티쉬 강을 건넌 다음 다시 기관차에 연결했다.

다음 날 아스 시에 도착했다. 오비 강 본류답게 강폭이 넓어서 이곳도 배로 넘었다. 철교가 가장 늦게 완공될 곳이었으나 상류나 하류에서 배를 타고 몰려든 원주민들로 시장이 북적거렸다.

시베리아의 여러 원주민들은 유사 이래 다른 강력한 종족들이 타이가 숲에 도시를 개척하든 도로를 건설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만약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거나 부족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경우에는 숲속 깊숙이 들어가 피할 뿐이었다.

고산국에 대해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역으로 인해 점차 삶이 풍족해지면서 점점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 조선말이 타타르어를 몰아내며 빠르게 교역용 언어로 자리 잡았다.

다음 날에는 알타이 산맥 북쪽 야린에 도착했다. 이곳 철교도 아직 완공되지 않아 예니세이 강을 배로 건넜다.

야린에는 남쪽 아바칸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하카인들이 자주 찾아와서 교역을 했고, 때로는 철도 회사 노무자로도 고용됐다. 고산국 기술자들이 돌산을 폭파시키면 하카인들이 작은 크기의 자갈로 가공해서 철도 건설 현장으로 마차 수송하는 일을 담당했다.

강을 건널 때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당분간 낮에만 다니기로 해서 기차가 하루에 500km 넘게 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철도는 여기서부터 남동쪽으로 방향이 꺾였고 다음 날 앙가라에 도착했다.

시베리아에 건설 중인 도시들의 간격은 대략 300km에서 500km 사이였다. 그리고 예외 없이 강변에 건설되고 있었다. 유사 이래 시베리아의 교통망이 강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를 건설하더라도 겨울에는 얼어붙고 날이 풀리면 진흙탕으로 변해서 철도 아니면 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여러 도시의 행궁이나 가끔은 아예 객차에서 밥을 먹는 것도 고역이었다. 운동 부족에 시달리다 보니 입맛이 없어서 라면을 끓여먹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리나, 율리아! 같이 앉아서 먹자.”

바이칼 호 서쪽 앙가라 시에서는 행궁이 공사 중이라 객차에서 지냈다. 밤늦게 루스인 궁녀 둘이서 라면을 끓여왔다. 같이 먹자는데 궁녀들이 사양했다.

“셋이 나눠 먹기에는 라면 양이 부족해요, 전하. 저희들은 따로 챙겨 먹을게요.”

“너희들 그릇에는 햄하고 소시지를 넣고, 내 밥그릇에는 식은 밥을 넣어.”

라면 두 개를 끓여서 셋이서 나눠먹는 방법이었다. 루스인 궁녀들은 고기 종류를 참 좋아했다. 며칠 전에는 삼겹살을 굽지 않고 날로 먹는 것도 봤다.

“불편한 건 없어?”

“말이 잘 안 통하는 것 외에는 다 좋아요. 호위 언니들이 잘 보살펴주세요.”

이민호는 아랫사람에게 잘해주는 편이었다. 특히 이들은 집도 절도 다 잃고 노예로 끌려갈 뻔했다가 구해진 셈이라 잘 다독여 주었다. 루스인 궁녀들이 메이드 복을 입어서 특별히 귀여워한 면도 있었다.

“루스인들 불쌍해요. 그들을 도와주세요, 전하.”

“루스인들이 세운 나라는 루스인들이 알아서 해야지.”

“귀족들끼리 매일 싸워서 평민은 살기 힘들어요.”

“어서 말을 배워라. 그리고 루스인들을 위한 건의를 해. 웬만하면 들어주마.”

루스 차르국이 아니라 루스인 백성들을 돕는 일이라면 이민호도 어느 정도 허용해줄 마음이 있었다. 서 시베리아에 농민이 부족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주변에 유목민만 잔뜩 있어서 농경지를 확장시키기 어려운 탓이었다.

우랄산맥 동쪽에서 농사짓다가 타타르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은 루스 차르국에서 추진하는 농업이민에 따라 정착한 자들이 아니었다. 대체로 귀족들의 경제적 착취를 버티다 못해 동쪽으로 도망쳐 나온 농노들로서, 카자흐 또는 코사크의 어원과 같은 도망자들이었다.

현재 튜멘에 정착시킨 젊은이들과 농민들이 어느 정도 도시 생활과 농장 생활에 적응한 다음에는 루스 차르국에 마음대로 왕복시킬 계획이었다. 가장 확실한 정치 선전은 입소문이었고, 바로 이것을 활용해 다른 루스인들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로 인해 루스 차르국이 멸망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우랄산맥에 가까운 동부 지역의 인구를 많이 빼앗아올 작정이었다. 루스인 귀족들이 농노에 가까운 신분인 백성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더 많은 병력과 자금을 투입해 국경을 막거나,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농노들에게 잘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백성에게 좋은 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수고가 많네.”

앙가라 시가 중부 시베리아와 동부 시베리아 깊숙이 들어가는 시베리아 탐사단의 주요한 기지가 됐다. 예니세이 강의 지류 앙가라 강이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되는 것은 물론이고, 동 시베리아를 흐르는 레나 강의 수원지가 바이칼 호수 바로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시베리아 탐사단 본부를 찾아 대원들을 격려했다. 대원들은 고산국 본토 출신 절반에 동해국 여진족 절반이 섞여 있었다. 몇 년 동안 오지만 돌아다닌 대원들은 모피 외투를 입고 수염을 길게 길러서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다른 점이 별로 없었다.

“연료 보급은 제대로 되나?”

“예, 전하. 오히려 남습니다. 고무 쪽배가 크기가 작아서 연료를 많이 잡아먹지 않는 편인데 보급 계통에서 자꾸 오해를 하는 모양입니다.”

“남으면 난방이나 취사용으로 풍족하게 쓰게. 탐사단이 가장 고생을 많이 하는데 이런 편의라도 봐줘야지. 원주민들에게 예방접종은 잘 해주고 있지?”

“예. 처음 만난 원주민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주사 맞아도 안 죽는 걸 알고는 이제 편히 맞습니다.”

탐사단이 타이가 지대를 지나 북극에 가까운 지역에서 돌간인과 네네츠 족을 처음으로 접촉했다. 야쿠트와 코랴크, 에벤키 족보다 더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 강아지들은 뭔가?”

“순록 유목민인 축치인들이 키우는 썰매 개인데 탐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북미 탐사단에서 개를 탐사에 동행한다는 말을 듣고 저희도 여러 가지 견종을 구하고 있습니다.”

검고 흰색이 반반인 성견과 강아지들은 시베리안 허스키와 비슷하게 생겼다. 동 시베리아와 극동에 사모예드 등 스피츠 계열의 품종이 많았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였다.

사할린과 그 건너편에도 비슷한 견종이 여럿 있었지만 이 품종이 늑대와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러나 생긴 것과 달린 성격이 순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 견종은 영리한 편인데도 과도하게 사회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주인이 누구든 상관을 안 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늑대하고 싸우기에는 체격이 좀 작군.”

“예. 축치인들이 고기를 덜 먹고 지구력이 좋은 쪽으로 교배를 시켰다고 합니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애완견으로서는 큰 중형견 품종이지만 탐사에 동행하기에는 작은 체형이었다. 탐사는 전투 외에도 온갖 위험에 노출됐다.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각종 맹수의 습격이었다.

“호랑이나 표범, 불곰이나 늑대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약해.”

“대부분 개는 일대일로 맹수를 상대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작은 대신에 보통 여섯 마리에서 여덟 마리가 한 무리를 이뤄 거뜬히 썰매를 끌 수 있습니다.”

“크기에 비해 힘은 좋군. 지구력도 좋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썰매 세 대를 동원한다면 스무 마리로 충분합니다. 그 정도면 호랑이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알았네. 혈통관리인을 고용했나?”

“예. 축치인 40대 부인이 관리하며 교배를 시키고 있습니다. 축치족에서는 부인들이 개 혈통을 관리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훈련을 잘 시키도록 하게.”

시베리안 허스키는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주인이 아니더라도 사람하고 쉽게 친해지는 성품이었다. 경비견으로는 빵점이라는 뜻이다.

네네츠인들과도 접촉했지만 아직 사모예드 견종은 입수하지 못했다. 네네츠인은 사모예드 족 중 하나였고, 사모예드 개는 이들이 기르던 썰매 끄는 개였다. 북극을 탐험하게 된다면 털이 긴 사모예드가 더 유리했다.

“이 개들 덕택에 겨울에 북극 지방을 탐사할 수 있겠다고 잔뜩 들떠 있습니다. 다른 탐사단보다 북극을 먼저 탐험하겠다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사고가 날까 우려됩니다.”

“안 됐지만 여기서 출발해서 북극에 도달하기 어려워. 북극 탐험은 알래스카나 그린란드에서 출발할 걸세.”

“거 참 아쉽게 됐습니다.”

탐사단장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씩 웃었다. 젊은 탐사단원들과 다르게 탐사단장은 무의미한 탐사에 대원들을 동원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극 탐험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정치적인 문제였다.

“북극 탐험대를 모집할 때 시베리아 탐사단원 중에서도 지원자를 받겠네. 그렇게 대원들에게 알려주게.”

“휴우~ 예, 알겠습니다. 대원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으로 기대됩니다.”

“북극 탐험대장은 경험이 풍부한 탐사단장이나 탐사대장들 중에서 뽑을 걸세.”

“제가 가겠습니다, 전하!”

시베리아 탐사단장도 미지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형적인 모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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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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