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03화 (652/1,000)

00703  76. 시베리아  =========================================================================

몇 년 전에 운석이 떨어져 레나 강 중류 지역에 큰 충격파를 일으킨 사건을 조사하러 갔던 탐사대가 돌아왔다. 나무 수십만 그루가 쓰러지고 순록 수백 마리가 죽으면서 원주민들 사이에서 지금도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사건이었다.

야쿠트 족 원주민들에게 위치를 물어서 운석 낙하 지역을 조사한 탐사대가 운석 세 조각을 얻어왔다. 혹시나 방사능을 띈 운석일 수도 있어서 이민호가 시켜서 납으로 만든 두꺼운 상자 안에 넣었다.

“운석 조각을 수집한 지점을 지도에 표시하고 가져왔습니다, 전하.”

“수고했네. 박물관에 보내면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를 하겠지.”

탐사대원 일부가 지질학 공부를 해서 지구상의 암석이 아닌 운석을 쉽게 구별해냈다. 제5 탐사대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구분한 것도 이런 교육의 힘이었다.

탐사대원들이 일 년 내내 시베리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도 가정을 가진 직장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탐사단장을 제외하곤 탐사대들이 교대로 최소 6개월을 왕도에서 근무하며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고 목격자가 많아서 목격담을 충분히 채록했습니다. 그 지점에 가봤더니 가로 세로 10km 정도에 있던 나무들이 죄다 쓰러져 있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던가?”

“예. 토담이 흔들리고 벽에 금이 가는 정도였습니다.”

“별로 큰 운석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1908년에 발생한 퉁구스카 이벤트에서는 2,150평방킬로미터 면적에 서 있던 나무 수천만 그루가 넘어졌다. 2002년에 비팀 강 유역에서도 비슷하지만 훨씬 작은 규모의 공중폭발로 인한 충격이 있어서 비팀 이벤트로 이름이 붙었다.

“전하! 혹시 하늘에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크기에 따라 영향이 다르겠지.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생명은 이어질지도 몰라.”

젊은 탐사대원이 세상이 망한 듯한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결혼해서 신부를 왕도에 두고 온 탐사대원이었다.

“그럼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떨어지기 전에 격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법이 있나? 능력이 있으면 나도 그렇게 하겠네.”

“전하께 조만간 그런 능력이 생기길 기원하겠습니다.”

“아마 앞으로 몇 백 년 안에는 어려울 거야.”

인류가 언젠가는 우주로 진출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민호가 과학의 발전을 앞당겨서 실제 역사보다 조금 빨리 우주 진출과 로켓 발사를 이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서너 세대 안으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9월 중순에 고산국 국왕 주최로 나담이 열렸다. 치타 남동쪽 너른 평원에 큰 천막을 치고, 장갑차 대대와 기병연대, 여진 기병 순서로 원형으로 진을 치듯이 숙영지를 단단히 건설했다.

초청을 받아서 온 부족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숙영지를 세웠다. 나담은 축제이면서 여러 부족이 각종 경기에 참가해 기량을 겨루는 스포츠 행사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나담을 구경하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몰려왔고, 일부는 이 기회에 교역을 하기도 했다.

시장 등과 함께 단상에 오른 이민호는 주요 경기를 친람했다. 그리고 우승자들에게 상을 내릴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면이 몽골씨름 부흐에서 3등을 했을 때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경기 전에 선수들이 항가리드라는 전설의 새의 춤을 추는데 이면만 유별나게 어색했다.

웃통을 벗고 토시가 연결된 저고리인 조닥을 입은 데다 배꼽 위에 가느다란 노끈을 둘러서 더 웃겨 보였다. 샅바 역할은 노끈이 아니라 조닥이 했다.

“항공대장은 일등 하겠다고 나갔다가 겨우 3등이네? 키 작은 노인에게 되치기 당한 감상이 어떤가?”

“규칙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다음에 다시 하면 반드시 일등을 할 수 있습니다.”

“퍽이나. 큭큭!”

씨름 말고도 여러 가지 경기가 진행됐다. 이민호는 특히 활쏘기 경기에 관심을 가졌다.

출전자들이 3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과녁 대신 보릿자루를 놓고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눴다. <열하일기>에 나온 것처럼 몽골인, 일부 여진인들이 쏜 화살은 대부분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다. 그러나 박지원이나 이민호의 기준에서 크게 빗나간 것이지, 몽골인이나 여진인에게는 그것이 평균 수준이었다.

“신궁이다!”

가끔 잘 쏘는 사람이 있다면 여지없이 시버 족 아니면 직할 기병연대 소속이었다. 기병연대 중사가 걸어가면서 쏘는 보사(步射)를 선보였을 때는 활터 주변이 구경꾼들이 내지르는 환호와 함께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원래 나담에 없던 종목인 기사(騎射) 시합에는 아예 기병연대 간부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천 명 가까이 뽑는 무과 별시 합격자만 돼도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족은 예선에서 다 떨어지고 시버 족과 기병연대 하사 이하 사병들이 경쟁했다. 조선에서 기사 시험에는 판정관이 과녁 바로 옆에 서 있는데, 여기서 그렇게 했다가는 판정관 수십 명이 죽거나 병원에 실려 갈 판이었다.

그 사이 다른 경기도 치열하게 진행됐다. 특히 어린이 경마에 참가한 여러 부족의 아이들은 정말 죽자 살자 말을 몰았다.

어른들이 쏟는 높은 관심 속에서 아침에 시작된 7살 이하 어린이 경주는 원나라 역참과 같은 30km를 달렸고, 10살 이하 경주는 오전에 출발해서 60km 거리를 달려 점심때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이 두 명이 낙마해서 크게 다치고 말 수십 마리가 결승선을 앞두고 거품을 문 채 쓰러졌다.

그런데 10살 이하 경주에 할하 부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들이 참가했고, 다른 부족 참가자들을 보이지 않게 방해했다.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고 진로를 방해하는 정도라서 심판들이 반칙을 선언하기 어려웠다.

결국 할하 부 귀족의 아들인 아이가 우승했다. 그러나 할하 부 아이들의 방해를 뚫고 시버 족 아이가 기어코 2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뜻밖에 숲 사람인 어웡키에서 3등을 차지했다. 할하 부 아이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난리가 났다.

“10살 이하 경주의 우승자에게는 은 5백 냥과 천리마 망아지를 혈통서와 함께 수여한다.”

할하 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다른 부족 구경꾼들은 몹시 웅성거렸다. 종목별 우승상금 천 냥을 1, 2, 3등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이미 공표했었다. 그러나 페르가나 망아지를 상품으로 준다는 말은 없었다.

몽골씨름 우승자에게 힘이 센 황소를 부상으로 주듯이 경주에서 우승한 어린이에게 줄 만한 상징적인 상품으로는 말이 가장 적당했다. 그러나 페르가나 말이라면 기대 이상이었다. 망아지를 잘 키워 종마로 삼는다면 먼 훗날 이 지역에 페르가나 명마의 우월한 피가 확산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할하 부 사람들은 마치 자기 자식이 우승한 것처럼 기뻐했다. 다른 부족 사람들은 할하 부 사람들이 페르가나 망아지를 비단으로 치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몹시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2등과 3등에게 시상하는 것을 보고 분위기가 바로 뒤집혔다.

“2등과 3등에게 각각 은 3백 냥과 2백 냥, 그리고 천리마 망아지를 혈통서와 함께 하사한다.”

“와! 설렁거 칸 만세!”

수상자들의 출신 부족인 시버 족과 어웡키 족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할하 부에 짓눌렸던 다른 부족들까지 일제히 환호를 터뜨렸다. 페르가나 말의 혈통이 약한 부족들이 소유한 말 사이에도 퍼질 기회였다.

점심때가 되어 시청에서 여러 부족들에게 말과 소, 잔치에 쓸 양 등을 하사품을 나눠주었다. 특히 시버 족은 장로급들을 국왕의 천막으로 초청해서 대접했다.

시버 족의 관습은 조선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문지방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단검을 구경하자니까 날 부분을 손으로 잡고 손잡이를 내민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시버 족은 대왕의 신하입니다. 어떤 명이든 내려주시옵소서, 대왕!”

“시버 족이 말을 아주 잘 타는 것 같소. 말 탄 채로 활도 잘 쏘고.”

“대왕의 기병보다는 못한 것 같습니다.”

씨름이나 경마는 그렇다 치고, 궁술은 기병연대 소속 병사들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기마궁술은 기병연대와 비교해 시버 족이 조금 나았다. 조선에서 군관급이나 무과 별시 급제자 정도 되면 말도 못하게 수준이 높았으나, 평균은 많이 떨어졌다.

시버 족은 명궁이라 할 만한 사람은 적었으나 평균적인 수준이 높았다. 기병연대가 요즘 기마총술 위주로 수련하느라 기마궁술 연습량이 부족한 것도 이유였다.

“기마궁술은 충분히 자랑해도 될 정도요. 그건 그렇고, 국가에 속한 군인이 될 생각은 없소? 동해국이나 철도 수비대에 속한 여진 기병처럼 말이오.”

“사실, 용호장군께서 저희들에게 그런 제안을 했었습니다.”

“뭐요? 그래서 누르하치에게 붙겠다는 거요?”

“아닙니다, 대왕! 저희들이 그 동안 대왕과 동해국에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마땅히 대왕께 은혜를 갚아야지요.”

이민호가 벌컥 화를 내자 시버 족 장로들이 설설 기었다. 인구가 그리 적지도 않고 말 타고 활쏘기도 잘하면서 위축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몽골과 건주 여진, 해서 여진 등 강한 세력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탓 같았다.

시버 족은 여기서 남동쪽인 훌룬 호수와 그 남쪽 부이르 호수 사이의 초원과 대흥안령산맥 너머 아직 생기지도 않은 치치하르 인근에 2만, 그리고 송화강 중류 송원에 3만 6천 이상이 살고 있었다. 현대 훌룬부이르 시의 면적은 26만 평방킬로미터로서 한반도 면적 22만 평방킬로미터보다 넓었다.

“대우는 여진 기병과 같이 매월 은 2냥으로 하겠소. 물론 말과 무기, 갑옷 등은 군에서 지급한다는 조건이오.”

“높은 대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왕이시여.”

“다른 지역 시버 족들과 연락해서 조만간 거취를 결정하는 게 좋겠소. 얼마나 동원 가능하겠소?”

인구의 10분의 1을 기병으로 상시 동원한다면 훌륭한 궁기병 5천 이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시에만 동원되는 유목민이나 조선 기병이 아니라 직업적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 정도로 좋은 대우를 해주신다면 최소 1만 명이 여섯 달씩 근무하는 식으로 5천 명이 상시 근무가 가능하겠습니다.”

“시버 족의 기마궁사로서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것이오.”

“대왕께서 거신 기대가 크니 저희도 일정 수준을 갖춘 시버 족만 군인으로 내겠습니다.”

장로들은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시버 족과 연락이 닿는다면 더 많은 병력을 고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시버 족이 많을수록 좋았다.

오후에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전형적인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각 경기의 우승자와 상위 입상자들이 출신 부족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국왕하사품이라는 명목으로 부족들에게 배분된 고기와 술, 면포와 비단으로 흥청거렸다.

나담을 마치고 치타 시로 돌아와서 다음 날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루스인 궁녀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쟤들 왜 저래?”

“어의 이모가 최종 검사를 마쳤어요. 주인님이 언제든 안아도 좋대요. 이제 침대 시중과 목욕 시중을 들어도 돼요.”

민지가 눈을 찡긋했다. 후궁을 새로 들인 경우 꽤 긴 시간에 걸쳐 검사를 받았다. 루스인 궁녀 네 명이 드디어 신체검사를 최종 통과한 셈이었다.

그 동안 루스인 궁녀들은 빨래와 청소 위주로 일하고 검사 대부분을 통과한 다음부터 밤참을 담당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후궁들이 하는 모든 일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거야? 화장도 야하게 했군.”

루스인 궁녀들이 처음으로 눈 화장을 하고 입술을 빨갛게 칠해서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호위들이 인형놀이를 하듯이 궁녀들에게 화장을 해준 것 같았다. 단순한 화장이었지만 갈라티아 궁녀 파티마와 아이샤 자매나 우크라이나 궁녀들만큼 미인들로 변신했다.

“이름이 에바였던가?”

“예, 전하.”

다른 후궁들 같으면 부끄러워서 눈길을 피했을 텐데, 에바는 이민호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리고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전하.”

그 동안 언어교육을 아주 잘 받은 것 같았다. 한자어에서 비롯된 어려운 단어 빼고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거의 없었다.

소파로 옮긴 이민호는 에바와 올가를 옆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었다. 비번인 이리나와 율리아도 불러서 주변에 앉히니 마치 꽃밭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말을 어느 정도 배웠으니 이제 제대로 물어볼 수 있겠다. 너희 가족이 우랄산맥을 넘은 이유에 대해 말해봐.”

“저는 우랄산맥 동쪽에서 태어났어요. 오프리치니나, 그러니까 외국 이주민이나 하층 지주계급으로 왕성에 구성된 오프리치니크가 폭정을 하던 시대에는 정말 무서웠대요. 1572년에 보야르였던 할아버지가 처형당하시고, 부모님은 친척들과 함께 도망쳐 우랄산맥을 넘으셨어요.”

보야르는 단순히 영지를 가진 러시아 귀족으로 번역되기도 하나, 귀족 가문 구성원 전체가 귀족이 되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영국처럼 한 가문 당 한 명으로 제한되는 방식이었다. 보야르 자격이 바로 상속되는 것도 아니고 그 가문의 원로가 차르에게서 호칭을 허락받아야 비로소 보야르가 된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그 전에 우랄산맥을 넘어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아 정착했대요. 보야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아요. 아빠가 괜히 허세를 부렸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배웠다는 교육수준이 높은 것으로 봐서 에바는 진짜로 200여 개밖에 안 되는 보야르 가문 출신일 것 같았다. 올가에게 잡혀온 과정을 물었더니 눈물부터 뚝뚝 흘려서 다독이느라 애를 먹었다.

반면에 이리나와 율리아는 이민호에게 부모와 동생들의 복수해달라면서 노가이인들이 루스인 농민들을 노예로 잡는 과정을 상세히 진술했다. 노인들을 땅에 박은 말뚝 뾰족한 곳에 항문을 끼워서 죽이고 스스로 걷지 못하는 아이들을 창에 꿰어 죽이는 등등 온갖 참혹한 짓을 해서 듣다 보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전하께서 복수를 해주시면 좋겠지만, 크림한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라 힘들겠죠?”

“글쎄다. 크림한국에 압박을 가한 다음 노아기를 치거나, 아니면 크림한국까지 멸망시켜버려야겠다.”

루스 차르국이나 노가이 족, 크림한국, 돈 코사크 등등 러시아 스텝 지역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죄다 적이었다. 원래는 철도를 흑해까지 부설하면서 주변 부족들에게 매년 일정 액수를 지급하는 계약을 하려 했는데, 기마 유목민들이 그 계약을 제대로 지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동향에 따라 위험한 기마 유목민들을 하나씩 제거하기로 했다. 토르구트 족은 물론 시버 족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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