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06화 (655/1,000)

00706  77. 동해국에서  =========================================================================

해서 여진 호이파 부의 패륵이 떠나고 사흘 뒤에 우라 부의 패륵, 부잔타이가 모란 강의 별궁에 찾아왔다. 부잔타이는 이전 패륵 만타이의 동생으로서 9부 연합군의 패배 이래 건주 여진에서 포로로 생활하다가 누르하치의 도움을 받아 우라 부의 패륵에 오른 자였다.

그런데 여진족의 패륵이 기차를 타고 온 것이 놀라웠다. 여진족은 기차라는 전혀 새로운 기물에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마다 남쪽 지평선에 여진족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 구경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외국인이 기차를 못 타게 제한을 둔 것도 아니고 명목상 부잔타이가 명나라 장수라는 직함을 갖고 탔기에 못 타게 할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역마다 설치된 교역시장을 핑계로, 혹은 국경선이 애매한 틈을 타서 여진족들이 동해국 영역에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진족들이 철도는 절대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고산국의 확고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기차에 치일까봐 두려워하는 건지 아직 확실치 않았다.

“우라 구룬의 버일러가 고산국의 한께 문안인사 올립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을 뵙기를 갈구했으나 이번에야 간신히 인사를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패륵, 어서 오시오. 요즘 고생이 많으신 것 같소.”

건주 여진의 내습에 대비하고 있어야 할 우라 부의 버일러, 즉 패륵이 알현하러 올 정도였으니 얼마나 다급한 지 알만했다. 이민호는 우라 부의 패륵을 만난 김에 영토 조약을 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철도가 멀리 서쪽 땅까지 연결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건주 여진이 무서운데 여차 하면 모든 백성들이 기차를 타고 먼 나라로 이주할 수도 있겠습니다.”

“쿨럭!”

건주 여진이 호시탐탐 노리는 우라 부 입장에서는 충분히 선택할 만한 대안이었다. 시베리아와 그 서부 스텝은 땅이 넓고 사람은 희박한 지역이었다. 독립을 원한다면 고산국 영역이 아니더라도 카자흐 땅 중에서 우라 부가 사는 송화강 중류와 비슷한 지역을 얼마든지 고를 수도 있었다.

우라 부는 한때 해서 여진 4부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지나가고 이제는 건주 여진과 예허 부 사이에서 양쪽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군사력은 아직 남아 있어서, 함경도 종성 문암과 두만강 너머 여진족 땅에서 벌어진 1609년 건주 여진과의 전투에서만 8~9천이 전사한다. 실제 역사에서 부잔타이가 예허부에 귀순해 우라 부가 멸망한 것은 1613년이었다.

“패륵은 건주 여진 용호 장군의 사위라고 알고 있소만.”

“누르하치의 딸을 비롯해 건주 여진에서 여인 세 명을 보내왔지요. 그러나 거대 세력 양쪽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살아남을 길이 아니겠습니까? 건주 여진은 강하고, 예허 부에는 동가 공주가 있고 해서 어느 쪽도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헤헤!”

부잔타이는 매우 똑똑한 인물 같다고 이민호가 생각했다가 마지막 말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마흔 넘은 나이에 아직도 동가 공주에게 홀려 있는 한심한 작자였다.

“위대한 한의 딸을 장성한 제 아들의 아내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 딸들은 나이가 많아야 겨우 여섯, 일곱 살이오. 시집보내기에는 너무 어리오.”

“그 정도면 충분히 시집갈 수 있습니다. 물론 여자구실을 하려면 최소한 4, 5년은 더 먹여야 하니 신랑 쪽이 손해지요.”

부잔타이 입장에서야 여진족의 풍습에 따라 당연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겠지만, 이민호는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공주들 중 하나를 어린 나이에 여진족에게 시집보낼 일은 절대 없었다.

그것은 공주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수세식 화장실로 대표되는 문명 수준의 차이 때문에 명나라든 유럽이든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몹시 고생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딸바보 아빠답게 웬만하면 공주들을 어디에도 시집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사실 고산국 정도 대국이라면 저희 우라 부와 혼인 동맹을 맺어서 이익이 될 일은 없겠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요. 앞으로도 두 나라 사이에 우호를 다집시다.”

이민호가 혼사를 거절한 이유를 다르게 받아들인 부잔타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가 무릎을 꿇었다. 우라 부의 다른 여진족들도 무릎을 꿇거나 부복했다.

“고산국의 위대한 한이시여! 저희 우라 부를 속국으로 받아들여주십시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게, 우리는 같은 대명의 제후가 아니오? 안타깝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소.”

우라 부도 호이파 부와 비슷한 결론을 낸 것 같았다. 건주 여진에 항복해서 노예가 되거나 예허 부에 귀부해서 눈칫밥을 먹는 것보다는 고산국의 속국이 되어 안전을 보장받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우라 부에도 역시 명나라 직첩이 문제가 됐다.

“그렇다면 황제폐하께 주본을 올려서 칙허를 받아내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패륵. 황상께서 윤허도 안 하시겠지만, 가는 길이 건주 여진에 막혀서 우회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오.”

“동해국의 도읍에서 배를 타면 될 것 같습니다. 조선 전라좌수영에서 북경 근처로 가는 배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헉!”

“사실 그 전에도 몇 번 이용했습니다.”

여진족들이 고산국과 직접 통교하지는 않았더라도 동해국을 통해 많은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다. 반대로 고산국에서도 건국 이래 여진족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분석해놓았다.

만약 여진족 수장이 이 시대에 강국으로 떠오르는 고산국 관련 정보를 몰랐다면 나라를 운영할 자격이 없었다. 철도를 해서 여진 영역에서 멀리 북쪽에 놓은 것으로 인해 고산국이 여진족 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여진족들이 인정했다. 호이파 부와 우라 부의 패륵이 직접 이민호를 알현한 것도 고산국이 여진족 영토에 야심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라 부에서 그 동안 모피와 인삼을 이고지고 뱃길로 북경까지 왕복하는 보따리 장사를 했었다고 한다. 모피는 배 삯과 여행 경비를 제하고도 서너 배 이익을 봤지만, 인삼은 북경 상인들이 여진 지역 인삼, 즉 두만강 이북의 산에서 캔 산삼임을 바로 알아봐서 별 재미를 못 봤다고 했다. 명나라에서 인삼은 조선의 것이 절대적인 품질을 보장받았다.

그런데 우라 부 사신이 동해국에서 전라좌수영을 오가는 조선 연락선을 이용해 북경으로 가는 것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외국에서 다른 외국으로 직거래하는 교역을 막을 경우 전체 교역에 반드시 문제가 생겼다. 결국 입맛만 다시고 직접 교역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배나 철도는 마음껏 이용하시고, 패륵과 만난 김에 국경이나 정합시다. 알아보니까 우라 부 여진족은 주로 송화 강, 그러니까 송가리 강변에 거주한다면서요?”

“예? 위대한 한께서 철도 남서쪽 100리로 동해국 영토를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들은 위대한 한을 존경하기에 당연히 동해국 국경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송화강 유역을 조금 더 내주는 대신 다른 지역을 철도에서 40km까지 영토로 편입하려던 계획이 산산이 부서졌다. 지도에 먹물로 선을 그을 뻔했다가 팔에 힘을 줘서 간신히 붓대를 붙잡았다.

“요즘도 우라 부 사람들이 철도 가까이 와서 구경하지 않소?”

“그거야 구경하러 국경을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고산국이나 동해국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와 수하들이 이곳 동해국 영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국경이란 허가 없이 외국인이 통행을, 아니오. 됐소.”

이민호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여진족들은 현대의 국제해양법으로 따지면 공해의 무해통항권과 비슷한 개념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1609년에 함경도 종성 조선 영토 내에서 건주 여진과 우라 부가 전쟁을 벌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성과 마을, 농지를 공격하지만 않으면 어느 나라 영토든 거리낄 것이 없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남의 땅 조선에서 싸워놓고도 누르하치는 조선 조정에 사과 한 마디 안 했다. 대신 누르하치는 매우 공손한 문장으로 쓴 서한에서 다른 일을 청했다. 일부러 무시한다고 조선 대신들이 팔짝 뛰었지만 누르하치가 과연 조선을 무시할 의도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주변에 강력한 부족이 없으니 200리나 300리로 정하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희 우라 부가 100년 전 탑산좌위 시절에는 철도 가까이 살았지만 지금은 더 남쪽으로 옮겨서 철도에서 400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럼 패륵의 고마운 권고를 받아들여 철도에서 200리 남서쪽으로 영토 경계를 정하겠소.”

과거에 탑산좌위가 하얼빈 남서쪽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우라 부가 영토 주장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이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소심하게 영토 경계선을 철도에서 200리로 확장했다.

그래도 우라 부의 영토와 전혀 접하지 않았고, 중간에 완충지대라고 하기도 어려운 공백지가 충분히 넓었다. 현대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경계선에서 살짝 남쪽으로 국경선이 지나갔다.

여진 땅에 부설한 철도 길이가 천 km가 넘어갔다. 그러므로 이번 영토 조약만으로 4만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영토를 새로, 그것도 맨입에 얻었다.

“대신에 약탈하거나 군사적 목적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동해국 영토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락해주십시오. 역마다 딸린 시장에 가서 교역을 해야 해서 말입니다.”

“여진족의 통행을 막을 방법도 없고, 시장은 주로 여진족과의 교역을 위해 열었소. 그렇게 하시오.”

“앞으로 두 나라가 영토 문제로 충돌할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패륵께서 우려하신 바를 철도 수비병들에게도 충분히 일러두겠소.”

이민호와 부잔타이가 협상한 내용을 예조 관리들이 한자로 조약문을 작성했다. 몇 가지 불명확한 지명을 수정한 다음 두 사람이 최종 조인하기 직전에 부잔타이가 조항 하나를 추가했다.

“만약 건주 여진이 우라 부를 노예로 삼으려 한다면 부족민들을 모두 데리고 위대한 한의 영역 안으로 도망치겠습니다. 철도를 넘어가면 설마 누르하치라도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겠지요.”

“용호 장군은 신중한 사람이라 아마 그럴 것이오.”

“물론 저희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가 물러난 그 영토를 고산국이 대신 맡아주십시오. 영토 조약에 그 사항을 추가하면 누르하치도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 사정이 급해지면 철도역으로 피하도록 하시오. 철도역마다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우라 부에 한해서 보호해주라고 일러두겠소. 만약 본거지를 서쪽 멀리 옮긴다면 땅을 알아봐주고 재기할 때까지 물품도 지원해주겠소. 물론 우라 부가 돌아올 때까지 몇 십 년이 걸리더라도 우라 부의 영토를 대신 관리해주겠소.”

“역시 듣던 대로 호방하시군요. 감사합니다, 위대한 한이시여.”

부잔타이가 이민호 앞에 절을 올렸다. 이민호가 얼른 부잔타이를 일으켜 세웠으나 이미 절을 마친 다음이었다.

부잔타이와 우라 부 사절들이 돌아가는 길에 이민호가 선물을 잔뜩 안겼다. 명나라와 여진 땅에서 흔히 통용되는 마제은도 듬뿍 떠안겼다. 별궁의 대문 밖에서 배웅하는데 말을 타려던 부잔타이가 다시 내려서서 정중히 고했다.

“위대한 한이시여! 서로 아들딸을 시집장가 보낸다 해서 반드시 혼인 동맹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익에 따라 동맹과 모반을 수시로 반복하고, 부족을 책임 진 버일러라면 피차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돈이 배반하더라도 며느리를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그건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제 딸을 한의 아드님에게 시집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한께서 제 미욱한 딸들에게 장가드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후궁이 이젠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려 감동, 이면과 눈을 마주치자 두 사람이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감동은 엄처시하에 살고 있었고 이면은 아직 미혼이지만 정식 부인들 중 한 사람은 아체 여제독의 따님으로 이미 결정됐다.

사실 이면의 부친 이순신은 아직도 긴가민가했는데 호탕한 이면의 모친이 혼사 결정을 내렸다. 아체 여제독의 딸이 시할머니가 될 분을 극진히 잘 모셔서 좋은 점수를 땄다고 들었다.

부잔타이가 집요하게 혼사를 권했으나 이민호가 극구 사양해서 간신히 떠나보냈다. 부잔타이는 다시 기차를 타고 하얼빈 방향으로 떠났다. 그 전에 감동이 역에 가서 일반 객실에서 침대칸과 휴게실 공간이 있는 1등석으로 옮겨주었다.

“다들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구나.”

“동가 공주에게 푹 빠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정신입니다.”

“역시 동가 공주가 보통이 아닌가봐.”

이민호와 감동이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9부 연합군의 패배 이후로도 건주 여진을 상대로 자그마치 20년을 버텼으니 어쩌면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시베리아 철도 주변의 영토 경계선 문제는 이로써 완전히 확정됐다. 동해국과 가까운 호이파 부 및 우라 부와 친선을 쌓은 것도 수확이었다.

다른 소수 부족들은 여진 기병들의 무력시위와 함께 적당히 보상을 해주고 잘 넘어갔다. 기차가 지나는 주변 부족들에게 역전 시장의 2층 상가건물 한 채씩 내줬더니 아주 기뻐했다.

소수 부족들을 보호해주더라도 워낙 가난해서 세금을 받을 게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모피 교역으로 세금을 대신한 셈 쳤다. 이것만으로도 고산국에 충분히 이익이었다.

소수 부족들을 경제적으로 자립시켜야 하는 문제가 남았으나, 하얼빈 주위는 사방으로 온통 지평선이라서 경작지가 부족할 걱정이 없었다. 더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 펼쳐진 널찍한 평원을 맡길 예정이었다.

============================ 작품 후기 ============================

만주를 대각선으로 좌악 그었습니다. 국경 분쟁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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