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8 77. 동해국에서 =========================================================================
“이곳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봐서 조선 사람들이 여전히 어렵게 사는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어째서 함경도에서 기병을 하는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일할 생각을 하죠?”
“글쎄 말이다. 민지는 어떻게 생각해?”
이민호가 조선에 있었을 때 조선 전 지역에 사창을 뿌리내린 것은 물론 감자와 고구마를 비롯해 갖가지 작물을 보급해 조선 사람들이 배를 주릴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제주도를 제외하더라도 고산국이 무역을 통해 조선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이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했고 고산국 외에도 각자 명나라나 큐슈와 무역을 하며 부를 축적했다. 해동상단은 운송 문제에서 조선 조정과 민초들의 부담을 크게 완화시켜주었다.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금광과 은광을 개발해 일자리 수천 개를 마련해줬고 강원도에서 꾸준히 시멘트를 수입했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이익이 백성들에게 안 돌아가고 왕실과 양반들이 독점하는 거죠?”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전쟁 중에 함경도에서 인구가 대폭 줄었으면 일인당 경작 면적이 늘어나서 개별 가계는 풍족해져야 경제 원리에 맞았다. 그러나 주인 없는 논밭이 왕실 내수사 소유로 대부분 흡수되고, 전쟁 직후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토지를 확대한 양반 지주들의 광작이 늘었을 뿐이었다.
함경도 정병들은 여전히 작은 농지를 경작하며 간신히 먹고 살면서 기병과 보병으로 평생 근무하며 국경을 지켰다. 말을 키우고 무장을 마련하느라 당연히 적자가 구조화됐고, 개간은커녕 자기 땅을 지키기도 버거웠다.
함경도 정병들은 살아가는 동안 미래에 보다 나은 삶이 되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 중소 자영농인 정병들이 이 정도인데 경제적 약자인 소작농이나 노비들은 더 심했다.
“조선 왕실은 양반 사대부와 권력을 나눈다. 국왕의 권력 기반이 양반들의 지지에 달려있는 셈이야. 그리고 지방관이 파견된다 해도 농촌은 실질적으로 양반들이 다스리고 있어. 그러니 국왕은 농촌에서 양반들이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도록 용인해줄 수밖에 없지.”
“국왕과 양반들은 가끔 백성을 위해주는 척하고 말이죠? 농사도 백성이 짓고 나라 지키는 것도 백성이 다 하는데 양반들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농사짓고 나라를 지키도록 백성들에게 시키는 일을 양반들이 맡고 있지.”
“농담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더 무서워요.”
농담이 아니라 어느 나라나 지배층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직접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일반 백성들이 생산한 수확물을 더 많이 분배받았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유교 교육을 통해 신분을 유지하면서 토지를 늘리는 것이 가문이 번창하는 길이었다. 성공한 가문이란 과거 문과 합격자 숫자가 많고 넓은 농지를 소유한 가문이었다. 특히 농지 확대는 한두 세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토지는 이 시대 유일한 생산수단이면서 특권계급이 유지, 확장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야. 내가 왜 토지를 농민들에게 안 나눠주는지 이유를 알겠지?”
“예. 일반 농민은 국초에 자영농으로 시작했어도 농지를 대대로 지킬 수가 없어요.”
“맞아. 가난한 농민들은 흉년이 오거나 정병으로서 군사 장비를 마련할 때마다 땅을 팔게 돼 있어. 그래서 조선에서 양반이 고산국으로 이민 오면 나를 욕할 수밖에 없어. 땅을 사서 소작농이나 노비에게 경작시키면서 편히 살 수가 없으니까.”
“주인님만이 고산국에서 유일한 지주니까요.”
그러나 고산국에 이민 온 양반들도 제각각 살 길을 찾았다. 가장 쉬운 길은 유학 지식을 바탕으로 학자나 교사가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있었다.
조선에서 천대받는 상인은 인기가 적었으나, 큰 재산을 운영하던 사람들이라 치재에 밝아 장사도 잘했다. 다만 일 안 하고 편하게 살면서 큰소리칠 기회가 없어 불만이 쌓이는 편이었다.
반면에 조선 무관 출신 양반들은 고산국이 신분과 가문을 떠나 실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였다. 조선에서 승진하기 어려운 한미한 가문 출신의 무관들이 고산국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흔했다. 장교가 아니라 일반 병사만 해도 충분한 녹봉을 받아 가족이 배를 곯을 염려도 없었다.
조선 무관의 서자들은 좀 더 어린 나이에 고산국에 이민 와서 사관학교에 들어가려는 경우가 많았다. 사관학교 졸업자들이 인사상 특권을 인정받는 경우는 없더라도 승진에 유리한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고산국에서는 사관학교와 학사장교 외에 장교가 되는 문호를 넓히려고 여러 가지 길을 마련해 두었다. 조만간 북미에도 사관학교를 개교해 왕도에 있는 사관학교의 독점체제를 무너뜨릴 예정이었다.
올가의 튼실한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운 이민호가 하얗게 빛나는 에바의 가느다란 종아리를 신기한 듯 어루만졌다. 평소 후궁의 용모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던 이민호가 기어코 입을 열 정도였다.
“에바 넌 다리가 참 길고 가늘구나.”
“열심히 먹어도 살이 안 쪄서 속상해요.”
에바는 진짜 그것이 고민이라는 듯 여자들에게 욕먹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민호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체구가 크고 건강한 여자를 좋아하시죠? 호위님들이나 올가처럼 말이에요.”
“여자야 다 좋지만, 허벅지가 통통하면 푹신푹신해서 무릎 베게로 쓰기에 좋잖아. 왜, 부러워?”
“아니에요. 전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 장단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이민호가 에바를 잡아당겨 앞섶에 손을 집어넣고 만져봤다. 아담하고 호리호리한 체구인데도 의외로 손에 잡히는 게 많아서 흐뭇해졌다. 백인들은 남녀 모두 황인종에 비해 신체의 굴곡이 심한 편이었다.
에바가 가만히 눈을 감고 감촉을 음미했다. 처녀 상태로 가급적 오래 놔두고 즐기려는 이민호의 악취미가 요즘 새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제 저도 충분히 적응했어요. 더 이상 배려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그런 면도 있고.”
에바가 좋은 쪽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의 음흉한 심보를 알고 있는 호위들이 듣고 피식 웃었다. 이민호는 루스인 궁녀들이 아직 숫처녀일 동안 이것도 시켜보고 저것도 시켜볼 예정이었다. 특히 에바는 얼굴이 꽤나 화사하게 생겼다.
“비록 제가 호위님들만큼 예쁘지 못하지만 언제든 전하를 모실 수 있어요. 그럼 참 기쁠 거여요.”
“동양인으로서 예쁜 것과 백인 중에서 예쁜 것은 다르니까 에바 네가 못 생겼다고 침울할 필요는 전혀 없어. 많이 배웠어?”
“에, 밤에 전하를 모시는 방법이요? 예.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민지님과 민정님이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에바가 고개를 숙이고 마치 허공중에 피리를 불 듯이 손가락을 움직여서 이민호가 배꼽을 잡고 굴렀다.
“에바! 주인님 것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아. 앗!”
민지가 괜히 한 마디 보탰다가 주워 담지 못하고 분위기를 싸늘하게 식혔다. 이민호가 삐쳐서 등을 돌리고 누웠고, 호위들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전하 말씀처럼 장단점이 있겠죠?”
“바지 입을 때 별로 표가 안 난다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네.”
씁쓸한 장점이었다. 호위들은 이민호가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혹사한 탓이라고 쑥덕거렸다. 그러나 이 시대 남성들의 평균보다 분명히 컸다. 용불용설이 진화론에 맞는 학설은 아닐지라도 한 개체에게는 적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남자들 사이에 여자 하나만 있으면 공주님이 되고, 여자들 사이에 남자 하나만 있으면 머슴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 이민호는 왕인데도 머슴처럼 호위와 후궁들에게 걸핏하면 놀림을 당했다.
“운동 좀 해야 되겠다. 요즘 배가 나왔어.”
“해구신은 안 드시고요? 앗!”
이번에는 민정이가 거들었다가 얼른 입을 가렸다. 언제 날 잡아서 푸닥거리 한 판 해야 할 것 같았다. 호위들이 밤에는 사근사근한 주제에 낮에는 이렇게 간이 부었다.
누루하치나 그가 보낸 사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10월 초에 모란강 별궁을 떠나 동해국의 도읍에 도착했다.
예전에 허허벌판 개울가 옆에 세워졌던 작은 석성이 이제는 꽤 큰 성곽도시로 변모했다. 그리고 기장 밭이었거나 양을 치던 황무지에는 2층 석조 건물이 잔뜩 들어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반갑소이다. 월동준비는 잘 되고 있소?”
역 앞에서 기다리던 아오지 첨사가 반갑게 국왕 일행을 맞이했다. 몇 년 전 작은 여진족 마을을 이끌던 아오지는 동해국 도읍의 시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오지는 동해국이 커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다행히 아오지는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고, 부족 젊은이들의 야심도 억제시켰다. 그리고 동해 여진 여러 부족들을 끌어들여 고산국의 가장 믿을 만한 협력자로 성장시켰다.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에 탐사대를 보내고 소수 민족들과 교류를 지속해 이들이 고산국의 지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공도 컸다.
“추수를 마쳤고 유목민들은 가축 도살을 진행 중입니다. 하오나 겨울에도 진행할 공사가 많습니다.”
“요즘 어딜 가나 공사요. 일단락되면 조용해지겠지요.”
아오지 첨사가 말한 겨울에 공사가 진행될 곳은 현대의 우수리스크, 그리고 우수리 강 유역이었다. 우수리스크는 우수리 강과 다른 수계인 라코브카 강을 끼고 있었다. 물론 양쪽 모두 농경지로 개발할 만한 곳이었다.
현재 몇 년째 북쪽 한카 호 주변과, 더 북쪽에 흑룡 강과 송화 강의 합류부 유역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인구가 적은 여진족만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넓은 평원이기에 한꺼번에 급히 개발할 이유는 없었다. 넓은 평원에서 가장 기름진 곳만 골라 농지로 개간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농경지가 너무 넓습니다, 전하. 동해 여진 전체가 목축을 줄이고 경작에 전념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진족이 곡식만 먹을 건 아니지 않소? 목축이 경작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오.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소나 양을 더 대규모로 키워야겠소.”
“느긋하게 일하던 목동들이 앞으로는 더 바빠지겠군요.”
“그만큼 여유가 생길 테니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오.”
보통 비옥한 땅에는 농사를 짓고 언덕 초지에는 목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개간을 마치고도 농사를 짓지 못하는 광대한 지역을 놀려둘 필요는 없었다.
남는 땅에 사료작물을 키워서 겨울 축사에 건초를 공급하기로 했다. 가을에 일괄적으로 가축을 도살해서 시장에서 제값을 못 받는 것보다는 늦겨울이나 봄에 도살하는 편이 제 값을 받는 길이었다.
“저번에 지나가면서 봤는데 그때는 묻지 못했소. 저 건물은 뭐요?”
“철도회사 직원들의 숙소입니다, 전하.”
성 남쪽에 하얗게 빛나는 3층짜리 대형 석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화려하고 정원에 분수대까지 있어서 당연히 별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기관사나 차장, 역무원 등이 임시 거주하는 건물이었다. 시베리아 철도 노선의 역마다 지은 철도회사 직원 숙소도 꽤나 깔끔하게 지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것 같지만 잘 지었소.”
“훌륭한 기술자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유구국 기관사들이 보름 전에 도착해서 일부는 벌써 현업에 투입됐습니다.”
“인력난이 해소될 테니 참 잘 됐소.”
나하에서 운행하는 기차를 유구국 사람들이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농담으로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산국 본토 사람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기관사를 배출한 곳이 유구국이었다.
유구국 기관사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듯 기차를 모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작은 섬나라 유구국에 건설된 철도 노선은 너무 짧았고, 기관사를 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결국 시베리아 철도에 투입된 기관사의 절반이 유구국 사람들이 될 예정이었다. 북미 횡단 철도가 완성되면 역시나 기관사 절반을 유구국 사람들로 채울 계획으로 현재 왕도에서 교육 중이었다.
“유구국 기관사들이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소?”
“물론입니다, 전하. 아주 유순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입니다.”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바를지 몰라도 유순한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왜구나 동남아 해적들과 싸우며 아시아의 바다에서 생존했던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친 여진족들 사이에서는 유순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 작품 후기 ============================
요즘 하루에 두 편 올리기 힘드네요. 노력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