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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13화 (662/1,000)

00713  78. 교육과 연구  =========================================================================

양력 12월 하순 동지부터 새해까지는 고산국 왕도에서 신년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외국 사신들과 상인들이 몰려오고 속국의 관료들이나 새 영토의 총독들, 북미나 호주에서 살다가 고향을 찾은 이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왕도는 매우 북적거렸다.

이때 산에 사는 원주민들이 꽃단장을 하고 왕도로 내려와 매일 같이 축제 분위기를 돋웠다. 평소에는 상의를 입고 생활하다가도 축제 때만 주최 측의 요구에 따라 복장이 달라졌다. 원주민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몸에 문신을 그려 넣은 다음에 북을 두드렸고 여자들도 평소보다 가볍게 입고 춤을 추었다.

“오랜만에 시끌벅적하고 좋구나.”

이민호는 올망졸망한 어린 왕자, 공주들과 함께 왕궁의 성벽에 올라 원주민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했다. 잠시 후 해가 지면 시작될 불꽃놀이도 구경할 참이었다.

그런데 일곱 살짜리 공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민호가 자세를 낮추고 팔을 벌리자 어린 공주가 목에 팔을 둘러 안겨왔다. 이민호가 평소 왕궁을 자주 비우더라도 틈틈이 아이들과 잘 놀아주기에 아이들이 낯을 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왜 그러느냐, 아지야?”

“아바마마! 원주민들은 야만인 같아요.”

“응? 저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짜 주인이다. 서로 존중하면서 함께 살도록 해야 한단다.”

어린 왕자와 공주들이 보기에 원주민들의 문명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민호가 듣기에 몹시 불편했지만 아직 어린애들이라 나무라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엘리트 교육을 받았는지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하는 왕자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아마도 유럽인 귀족 유학생이 가정교사를 맡은 왕자 같았다.

“아바마마! 국제관계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우리가 저들을 정복한 것이 아닌가요?”

“원주민들과는 국제관계가 아니라 국내관계다. 그리고 저들은 정복당한 열등한 노예들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부터 서로 힘을 합쳐 함께 나라를 세운 동업자들이란다.”

“그럼 피지배 민족이 아니란 뜻인가요?”

“물론이다. 다른 백성들과 동등한 고산국의 백성들이지. 오히려 우리가 저들에게서 땅을 얻어냈으니 그 보상으로 특별히 우대해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들 입장에서 축제 때 이상야릇한 옷을 입거나 헐벗은 원주민들이 열등 민족이나 노예로 보이기 쉬웠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본토 인구의 1할 이상, 농민의 2할, 군인의 1할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해상 탐사대 외에 지상 탐사대를 창설할 때도 강원도 사냥꾼, 심마니와 함께 초기 창설 요원을 구성한 주요 인종 집단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원주민 부족의 여자들이 따로 직업을 갖지 않고 육아에 전념하므로 임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다. 당연히 고산국 의료체계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 대부분이 살아남아서 다른 인종보다 인구증가율이 더 높았다. 앞으로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원주민들은 언제든 왕도나 다른 도시에 와서 살 수 있고, 지금도 왕도의 주민 일부는 원주민들이다. 조선 출신자들과 용모로 구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원주민들이 도시에서 편히 살 수 있는데도 험준한 산맥에서 사는 것은 저들에게 고향이 그만큼 좋다는 뜻이다.”

“사막이나 숲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너희들이 왕궁 밖에서 생활하려면 불편하듯이, 원주민들은 도시 생활이 불편할 수도 있단다.”

왕자와 공주들은 다들 아직 어린데도 몇몇은 꽤나 영민했다. 개미굴을 연구하겠다고 후원의 땅을 파내는 아이도 있고, 직접 인형 옷을 만들어서 입히는 아이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이야 온갖 데에 관심을 쏟을 테니 잠깐 관심을 둔 것이 평생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할 일은 그저 여러 가지 다양한 세상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 분야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고산국 백성들이 이용하는 여러 기물들 중에서 대다수를 만들어내셨다고 들었어요. 비행기나 기차는 외국에서 도저히 베껴 만들 수 없는 것이라면서요?”

“나 혼자 만든 것은 아니다. 뭔가 새로운 발상을 한 다음 그것을 실제로 제작할 수 있도록 유능한 장인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지원을 해준 것뿐이란다. 이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다.”

왕자와 공주들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이민호가 한 말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이들치고는 지나치게 똑똑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그저 건강하게 뛰어놀면서 잘 크면 그것으로 족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왕족으로서 부담을 질 필요는 없었다.

“아바마마! 저희들이 크면 어떤 일을 해야 하나요?”

“다른 고산국 백성들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너희들이 커서 반드시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구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나라에 보탬이 될 것이다.”

이민호가 자녀들이 다른 백성들과 평등하다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왕자와 공주들은 다른 백성들에 비해 이미 다른 출발점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닐곱 살 애들이 벌써 이렇게 애늙은이처럼 된 것은 후궁들이 너무 똑똑한 탓이었다.

그러나 애는 애다워야 했다. 바로 그 다음날 후궁들과 함께 산중턱의 눈썰매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하루 종일 눈썰매를 탔다. 모노레일 같은 철길 한 줄 위에 썰매를 달리는 알파인 코스터를 즐기며 비명을 질러대기도 했다.

연말 축제로 왕도 전체가 북적이는 가운데 고산국을 영영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2년 또는 3년 근무 계약을 마친 구르카 용병들 중에서 일부는 갖가지 상품을 잔뜩 이고지고 고향으로 떠났다. 그 동안 모은 월급과 퇴직금, 그리고 고산국 왕도에서 사서 벵골이나 히말라야에서 팔면서 생길 돈을 갖고 고향에 돌아가면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숫자보다 몇 배 더 많은 청년들이 고산국으로 몰려들었다. 히말라야 남쪽 산록에 산재한 여러 왕국이나 부족들, 특히 고르카 왕국이나 카트만두 계곡의 4개 왕국 등 여러 작은 왕국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고산국에 병사로 지원했다. 고산국에서는 매년 징병관을 카트만두에 파견해 시험을 거쳐 병력을 모집했다.

복건성 출신 노동자들은 한 달 후에 있을 음력설을 쇠기 위해 고향으로 떠났다. 요즘 명나라 노동자들은 필리핀이나 북미에서 주로 일하기에 본토에는 복건성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리수 항에서 배를 갈아타기 전에 물건을 사서 가져가려는 자들로 인해 항구 거리가 미어 터졌다.

“안남은 평온하오?”

“예. 레 왕조의 황제께서는, 아니 안남 국왕께서는 안녕하십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도 국왕의 임무였다. 브루나이와 필리핀 총독부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했고, 특히 연말 축제 기간에는 사신을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아니, 남북조가 서로 싸우지 않느냐는 뜻이오.”

“지금은 평온합니다, 전하.”

베트남 하노이에서 온 사신단 대표는 이민호 앞에서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하노이의 찐 씨 정권 입장에서 고산국은 좋은 우방이었다. 명나라는 베트남에 3년 1공으로 조공을 제한하고 베트남과 명나라의 국경지대에는 해적들로 우글거렸다. 베트남 귀족들이 사용할 사치품을 살 만한 곳은 고산국이 유일했다.

북부의 찐 씨와 남부의 응우옌 씨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조용한 편이었다. 고산국에서 양쪽에 화승총을 파는 바람에 서로 맞붙는 것이 불안한 탓이었다. 최고 권력자가 직접 전투에 나서야 하는 동남아 특성상 그 권력자가 화승총에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 쉽게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더 이상 안남의 쌀을 수입하지 않게 돼서 미안하오. 북미에서 보낸 쌀이 남아돌아서 말이오.”

“괜찮습니다, 전하. 그 대신 고산국에서는 안남에서 꾸준히 구리와 석재를 사주시지 않습니까? 안남과 고산국의 교역과 우호는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고산국은 지하자원, 특히 광물의 경우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본토에서는 범죄자 외에 광산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대규모로 매장된 석유와 석탄 외에 다양한 자원이 국토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지만 매장량은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의 모래와 석재, 인회석은 경제성이 매우 높았다. 건국 초부터 건설경기가 매년 활황인 고산국 본토에서는 가까운 베트남에서 목재와 시멘트 외의 건축자재를 사들였다.

베트남 전역에서 산출되는 인회석은 별다른 화학적 처리 없이 장기간 저렴하게 농지에 인 성분을 공급하는 비료로 사용했다.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서 철광석, 남부에서 보크사이트를 수입했다.

“내년 봄부터 왕조의 자식들을 고산국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디 국왕전하께서는 왕자들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잘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사신이 너무 당당히 통보하듯이 말하기에 이민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고산국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투였기에 베트남 사신에게 분명 다른 뜻이 있었다.

“마치 인질을 보내는 것 같아서 거절하겠소. 고산국에서 교육은 외국인에게도 무료이니 아무 때나 와서 입학하라고 하시오. 기숙사나 셋집을 이용하기에 불편하다는 뜻이오?”

“험! 그래도 왕자들입니다. 체면을 살려주십시오. 안남은 앞으로도 고산국의 주요한 우방 아니겠습니까?”

“알겠소. 그럼 안남의 왕자들을 위해 객관을 하나 제공하겠소. 다만 고용인들은 안남에서 데려와주시오.”

브루나이와 버마, 자바 섬의 여러 무역왕국들처럼 안남의 왕족들 교육도 내년부터 고산국에서 맡게 됐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인질이 절대 아닌데도 그들은 인질인 척하면서 여러 가지 외교적 이권을 챙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에서 얻지 못한 권력의 정당성이었다. 고산국이 뒷배를 봐주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불평분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못 내게 하려는 의도였다.

주변국들과 우호를 위해 왕족들의 교육을 맡아서 해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아프리카 왕국의 왕실 가족들이었다.

국왕 므부투의 처남이란 인간들이 지금까지 수백 명이나 고산국에 와서 6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갔다. 아예 므부투의 처남들을 입소시키기 위한 훈련소와 훈련부대까지 만들어야 했다.

훈련을 마친 처남들은 고산국 군복을 입을 자격이 주어지고, 훈련 기장을 가슴에 매달 수 있었다. 자식들이 어린 지금 므부투의 실질적인 무력과 지지기반은 처남과 장인들이었다.

므부투의 처제들도 몇 년째 연속 수십 명 단위로 와서 신부수업을 받고 돌아갔다. 그래서 가끔은 므부투의 처남과 처제가 연애하는 꼴을 보게 됐다. 이들 중 일부는 고산국 처녀총각들과 결혼해서 아프리카로 가거나, 가끔은 고산국에 남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므부투의 어린 자식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고산국이 유아원이오? 너무하잖소!”

“전하! 저희가 어디에 왕실의 혈통을 맡기겠습니까? 고산국처럼 안전하고 든든한 곳이 없습니다. 부디 아이들을 살려주십시오.”

키가 190cm쯤 되는 아프리카 왕국 왕비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매도 이민호를 괴롭혔다. 귀엽게 생긴 아이들에게 이미 넘어간 혜영과 혜진은 어서 받아들이라고 이민호에게 자꾸 눈치를 줬다.

“어휴! 알았소, 142번째 왕비. 왕비와 왕자, 공주들이 지낼 곳을 알아보겠소.”

말라리아나 황열병 외에도 아프리카에는 각종 풍토병이 만연해 예방접종을 하는데도 아이들의 생존율이 낮았다. 어쩔 수 없이 므부투의 자식들을 받아들였지만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러나 이민호의 속을 들여다보는 므부투는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을 하나 추가해주는 것으로 퉁을 쳤다.

마침 원생이 줄어들어 비어있는 고아원을 개조해 므부투의 고산국 별궁을 마련해주었다. 고산국의 고아원은 거주시설은 물론 기본적인 교육환경이 이미 만들어진 곳이라 다른 별궁을 내주는 것보다 나았다.

다만 보육교사는 왕립여학교에 준해서 비슷한 등급으로 파견했다. 고산국에 먼저 와서 교육을 받고 있던 므부투의 처제들이 조카들의 육아를 많이 도와주었다.

왕실 언어를 조선말로 정한 므부투의 결정이 조금 걱정됐지만, 아프리카에는 언어가 워낙 다양해서 큰 상관은 없다고 했다. 대신 여러 부족 언어를 지키기 위한 지원을 아프리카 왕국 차원에서 열심히 해주고 있었다. 마을마다 학교가 세워지고 어린이들이 굶을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프리카는 많이 발전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자는 바람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프리카 관련해서 이어질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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