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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16화 (665/1,000)

00716  78. 교육과 연구  =========================================================================

1601년 새해가 밝았다. 이민호는 아침에 궁성에서 왕실 가족들과 고위 신료들에게서 신년 인사를 받았다. 이제는 일정 시간 안에 새로운 후궁이 들어오는 것보다 아이들이 더 많이 태어났다. 이민호를 제외한 모두가 기뻐했다.

그리고 오전 일찍 외국 사신들로부터 신년 하례를 받았다. 고산국의 세력 아래에 들어온 동남아 여러 나라들, 브루나이와 베트남뿐만 아니라 자바 섬의 여러 무역 왕국들까지 찾아왔다. 필리핀의 에스파냐 사람들과 마카오의 포르투갈 사람들도 왕도에 대거 몰려와 신년을 보냈다.

그러나 고산국은 명나라나 조선처럼 조회를 열지 않고 이민호가 국왕으로서 사신들과 인사만 나눴다. 그 다음에는 예조 관리들이 사신들과 함께 국가 간 현안을 협의하고 교역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월 1일은 예조 관리들이 가장 바쁜 날이었다.

오전에 의형 이순신의 저택에 인사를 가고 이어서 부친께 세배를 갔다. 부친이 뒤늦게 본 막둥이 딸은 이민호에게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나이 차가 많아 절대로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으려 해서 이민호가 많이 실망했다.

“이보시오, 국왕!”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우리끼린데 그냥 편하게 말하자. 민호야. 네가 세상을 떠나면 태조라 불리게 될 거다. 그런데 보통 태조의 4대조까지 추숭(追崇)하지 않느냐?”

“저번에 그 여송 사람이 태상왕이 되고 명나라 정사에 기록이 남는 바람에 지금 상태에서는 추존을 하기 어려워요.”

이민호의 부친은 그 동안 조상들의 묘를 왕도 근처로 이장하는 일을 모두 끝냈다. 그리고 혜영이 고산국의 종묘로 사용할 땅을 궁성 가까운 곳에 마련해두었다. 아직 완공되지 않았으나 종묘 건물은 현대식과 전통 한옥 방식을 뒤섞어 웅장하면서도 깔끔하게 건축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조상들의 위패를 아직 종묘에 모시지는 못했다. 수도를 옮긴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런 문제가 있구나. 그럼 역시 제국을 개창해야겠지?”

“추존하기 위해서 제국을 열어요? 어휴! 호칭이 중요한가요.”

고산국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송나라의 제후오묘제를 본 따 태조와 4대조까지를 별도의 사당에 모시는 별묘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산국이 제국이 될 경우 현 황제이며 나중에 태조라는 묘호를 받게 될 이민호와 6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칠묘제를 운영해야 했다.

“나도 잘난 아들 덕 좀 봐야지. 명나라가 오늘 내일 하는 모양이야. 지금이야 어떻게 이어간다지만 당금황상이 승하하시면 명나라의 위세도 많이 수그러들 거다.”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조상님들 묘호나 준비해두세요. 예조에 이 일을 다 맡길까요?”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추존왕은 목조, 익조, 도조, 환조까지 4대 조상들이었다. 그 외에도 왕이 되지 못한 왕의 부친이 추존왕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아직 성종의 아버지 덕종 한 사람뿐이지만, 조선 말기까지 다섯 명으로 늘어난다.

“내가 멋지게 지으마. 물론 시자(諡字) 중에서 태와 세, 성 등은 빼고 말이다. 예종이나 익종처럼 뜻만 좋고 잘 안 쓰는 말들이 많더라. 아차! 태조 이전이니 종보다는 조를 종호로 사용해야겠구나.”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갈 때 태조 고황제 외에 장헌세자의 묘호를 장종으로 고친 다음 다시 장조 의황제로, 정종은 정조 선황제로 추봉했다. 정조 임금은 조선이 끝날 때까지 묘호가 정종이었고, 정조는 대한제국 황제로 추봉된 다음의 묘호였다.

“괜히 실수하지 마시고 예조에 물어봐가면서 결정하세요. 참! 묘호 외에 칭호도 정하세요.”

“정말 제국을 칭할 거냐?”

“명나라가 돌아가는 상황 봐서요. 절대 소문내지 마세요.”

“좋다. 정말 좋다.”

이민호 부친의 집안은 워낙 손이 귀해서 친척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왕가의 친인척이 모이는 종친부도 아직 설립하지 못했다. 이민호가 자식을 많이 가질수록 부친이 입이 찢어질 정도로 기뻐했다.

“참! 간난아!”

이민호가 부르자 여동생이 흠칫하더니 부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부친이 헤벌쭉 웃었고, 대부인 칭호를 받은 계모는 몹시 긴장했다.

여동생이 이민호를 두려워하는 것은 젊은 계모가 이민호를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시중에는 젊은 여자가 평생 무골인 대원군을 유혹했다느니, 대원군이 가련한 간호사를 덮쳤다느니 말이 많았다. 그러나 계모가 어리지도 않았고, 노인이 덮친다고 순순히 당해줄 만큼 호락호락한 여자도 결코 아니었다.

“우리 귀여운 간난이한테도 군호(君號)를 줘야 할 텐데요.”

“임금의 여동생은 당연히 공주 아니냐. 지금도 공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게 아버지가 왕일 때 이야기죠. 간난이는 국왕의 여동생이며 대원군의 딸이라고요. 간난이 말고 이름이나 제대로 지어주세요.”

그러나 아직 어려서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에 이름을 정하기로 했단다. 이민호야 항상 앞서가지만 부친은 여전히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내가 죽으면 추숭해줄 거지? 그럼 간난이가 왕이나 황제의 딸이 맞으니까 공주로 불러줘.”

“언젠가 나중에 공주가 될 테니 그렇게 하세요.”

“떽! 그럼 내가 언젠가 죽는단 말이냐?”

“그럼 돌아가시지 말고 천년만년 사세요. 아버지가 계시면 안심하고 왕도를 비울 수 있으니 저야 좋죠, 뭐.”

이민호가 다시 간난이에게 고개를 돌리자 꼬마가 역시나 눈길을 피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지 말라고 해봤자 말로 통할 것도 아니었다.

“간난이 너는 무슨 공주로 불리길 바라니? 아버지 생각해두신 것 있어요? 그럼 정해주세요.”

“생각해둔 호칭이야 있지. 덕이 높고 두텁다 해서 덕후 공주는 어떠냐?”

“그 이름은 좀......”

이민호는 귀여운 여동생이 덕후라고 불리길 바라지 않았으나, 일본어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시대의 별명이라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덕후 공주로 결정돼 버렸다.

“간난아! 덕후 공주. 선물이다.”

이민호가 포장을 뜯어서 인형 세 개를 여동생에게 내밀었다. 얼마 전에 혜진이 한복을 입은 조선 여인, 드레스를 입은 백인 여인, 군복을 입은 흑인 여인을 목제 인형으로 만들고 옷을 입혔다. 제작비가 많이 들고 인기가 좋아서 하나에 은 한 냥씩이나 하는 비싼 인형이었다.

“간난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라고 전하께 고해야지.”

“오빠라고 부르는 게 좋은데 말입니다.”

계모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가 이민호가 대꾸하자 얼른 상체를 조아렸다. 그 사이 간난이는 예쁜 인형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오랜만에 이민호 앞에서 미소까지 지었다.

“간난이가 버릇 나빠질까 걱정이옵니다, 전하.”

“오래 전부터 가족입니다. 전하라는 호칭은 빼주세요, 어머니.”

“저는, 흑!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전하. 아니.”

계모가 그 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계모는 이민호 부친의 건강관리를 책임지면서 외부적인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다. 문제를 일으킨 적도 전혀 없어서 이민호도 안심했다.

오후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국립묘지 충혼탑에 헌화했다. 그리고 몽골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묘비를 찾아가서 일일이 헌화하면서 묵념했다. 보급대장 최성한 소령은 중령으로, 국방연구소 연구원 김 씨는 선임 연구원으로 추서됐다.

유족들을 차례로 위로하는 동안 이민호도 몹시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쏟아냈다. 마치 조선에서 장례식 때 곡을 하듯이 유족들과 어울려 실컷 울었다.

“미안합니다. 괜히 욕심을 부렸다가 귀한 목숨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서 전쟁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제 자식 놈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다만 저 어린 것들이 걱정될 뿐입니다.”

“제가 이 아이들의 후원자가 되겠습니다.”

국가유공자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겠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정서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이들이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왕자, 공주들과 나이가 비슷해서 함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실컷 눈물을 쏟고 나서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혜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민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국왕으로서 체면이 있어요.”

“몰라. 울고 났더니 아주 후련하다.”

“이렇게 마음이 약하시면서 남들 앞에서는 그 동안 강한 척하셨어요. 그러다 병나요.”

“나는 그나마 낫지. 전쟁에 자주 참가한 계복이나 감동이 이야기 들어보면 부하들이 죽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더라.”

돌아오는 길 내내 혜영이 이민호의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1월 초순에 농업연구소에 들렀다. 세계적으로 아주 독특한 연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이민호가 수경재배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주고 연구원들에게 씨감자 생산을 맡겼다. 수경재배를 통해 씨감자를 바이러스나 병충해 감염으로부터 막을 수 있었다. 춥지 않은 지역에서는 농업연구소 분소에서 생산한 씨감자를 농가에 배포해 생산량을 높였다.

“글쎄요. 나는 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큰 배에는 필요가 없고 작은 배에는 수경재배를 할 공간이 부족하오. 작은 배가 멀리 나갈 일도 없지 않소?”

요즘 농업연구소에서는 이민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주 독창적인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함선이 장기 작전에 나갈 때 승조원들에게, 그리고 극한지대에서 활동하는 탐사대에 채소를 공급할 수경재배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재배 작물은 상추와 미나리, 토마토와 가지, 딸기 등이었다.

어느 연구원은 수경재배로 2년생 인삼과 같은 크기의 인삼을 단 4개월 만에 수확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잔뿌리가 너무 심하게 많이 나서 상품성은 떨어졌으나, 그 연구원은 인삼의 효용이 잔뿌리에서 나온다고 주장해서 좀 더 연구하기로 했다. 사포닌 함량은 수경재배한 쪽이 확실히 높긴 했다.

“전하! 탐사선이 바로 그런 배입니다. 배가 작으면서도 작전기간이 길지요. 탐사선에 수경재배 공간을 만들면 선원들과 탐사대원들에게 신선한 채소를 꾸준히 공급할 수 있습니다. 과일즙이 상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배에서 수경재배라니, 이건 현대 해군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현대 해군은 채소가 떨어질 정도로 장기적인 작전에 나가지도 않고, 또한 핵잠수함 같으면 식품을 냉장고에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혹시나 작전기간이 길어져 채소가 필요해지면 보급선에서 공급하면 된다. 건조식품도 충분해서 대항해시대처럼 각기병에 걸릴 염려는 없었다.

그런데 고산국의 탐사선은 대항해시대의 범선처럼 작전기간이 긴 경우가 흔했다. 한대지역이든 열대든 채소를 쉽게 구하지도 못했다.

각기병을 예방하기 위해 보통은 탐사선 탑승자들에게 쌀과 보리를 섞은 혼식을 먹게 했다. 그러나 보리밥은 천민들이나 먹는다는 인식 때문에 탐사대원이나 선원들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상추와 미나리요? 흐음.”

“기관실 바로 앞이나 위층에 재배실을 두면 온도 문제도 해결됩니다. 배양액도 순환식으로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병충해로부터 확실히 안전해집니다.”

우스갯소리로 전투함 상부갑판에 미나리를 재배한다고 소문 난 친환경 북한 해군이 되는 것이 아닌지 이민호는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보통 배들은 설계 당시에 어떻게 공간을 활용할 건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수경재배를 할 공간을 비우려면 그곳에 있던 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배에서 채소를 재배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소.”

“쌀과 보리를 섞은 밥에서 쌀만 골라 먹다가 각기병 환자가 발생한 경우가 있습니다, 전하.”

“탐사대원들이나 해군 승조원들은 억지로라도 보리밥을 먹는데 민간인 선원들이 문제요.”

결국 탐사전단 장교와 부사관들 몇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좁은 탐사선의 공간을 수경재배실로 전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각기병은 고산국에 현실로 찾아왔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결국 함선에서 혼식이 폐지되고 쌀밥을 제공하는 대신 승조원들에게 과일즙을 강제로 먹이기로 했다. 그러나 멸균 처리된 병에 든 과일주스는 별로 맛이 좋지 못했다. 결국 맥주 음용도 허용됐다. 조금만 신경 쓰면 해결될 각기병 때문에 귀중한 인원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수경재배 연구가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감자 반도나 여러 지역의 측후소처럼 추운 지역의 격오지에 장기간 근무해야 하는 곳에는 수경재배실이 만들어졌다.

온도를 맞추고 조명을 키고 배양액을 공급하는 것이 수경재배의 기본이었다. 근무자들이 수경재배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수송 중에 시들어버리는 채소에 대한 보급요청이 급감했다. 대신 딸기와 토마토, 상추 등을 직접 재배해서 먹게 됐다. 일단 유리온실이나 지하 수경재배실이 완공된 다음에는 연료 공급량이 조금 늘어난 외에 큰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전하. 창업한지 얼마 안 돼서 아직도 국사를 독립된 과목으로 가르치기는 어려워요. 역사의 일부로서 국사를 가르쳐야 하니 국사의 범위를 지정해 주세요.”

“시공간 말이오?”

최 선생의 요청에 이민호가 몹시 고민했다. 고산국 백성들의 주축이 조선에서 나왔다지만 조선 사람만 고산국 백성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고산국은 조선인 외에도 본토 원주민인 고산족과 일본인 처녀들 등 건국 당시부터 다민족 국가로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 역사에 중점을 두고 가르칠 수는 없었다.

지역도 문제였다. 고산국 본토만 신경 쓴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북미와 호주, 시베리아까지 영토를 넓혔다.

“학생들에게 세계사만 가르칠 수도 없고, 결국 환태평양 지역의 역사가 될 것 같소. 범위가 너무 넓소?”

“조선 북방지역의 주민 변화, 몽골 초원의 시대별 인종 변화, 고산족이 태평양 도서지역에 확산된 경로, 말레이 족의 해양 진출 등을 다 다루란 뜻인가요?”

“직접적인 저술은 역사학자들에게 맡기시오. 최 선생은 학생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서 역사책을 저술하시오. 그런데 유구국, 오스만 제국, 몽골사, 여진사, 중국사, 일본사, 조선사는 더 자세히...... 어휴!”

“전하도 한숨 나오시죠?”

“어쩔 수 없소. 최 선생이 판단해서 적당히 책을 엮으시오.”

이민호는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최 선생이 어떻게 역사책을 만들든 뒷말은 안 하기로 약속했다. 이런 역사책은 누가 보더라도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똑한 최 선생이 잘 해나갈 것으로 믿었다.

============================ 작품 후기 ============================

특별한 일이 없을 것 같은 1601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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