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19 79. 1601년의 일상 =========================================================================
“어떠냐?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믿겠지?”
비행장에서 돌아오는 승합차에서 이민호가 턱을 치켜들고 어린 왕자와 공주들에게 자랑했다. 이민호의 자식들은 대부분 미취학이었고 장남만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머니인 후궁들의 등쌀에 밀려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래서 현장 견학을 핑계로 애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일단 왕궁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들떴다.
“아바마마께서는 연구원들의 공을 가로채지 마세요. 그리고 이면 항공대장님이 허름한 천 조각을 매달고 다리가 부러져 가면서 비행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유명한 사실이에요.”
“크윽! 그래도 내가 지시하고 자금을 대서 만든 건데. 중요한 기술적 선택은 내가 했단다.”
국방연구소나 항공대에서 오랜 시간 연구해서 개발했어도 결국 비행기는 이민호가 만든 셈이었다. 형태 설계와 동력계통 등은 이 시대 기술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왕자와 공주들은 믿지 않았다.
“직접 만든 사람들이 더 중요해요.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자본주로 인정해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이것이 국왕이나 경영자가 할 일이란다.”
섭섭했지만 아이들이 전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항상 실무자들의 역할을 강조했기에 비행기를 제작한 공을 실무자들에게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바마마! 넓은 비행장에 기다란 활주로를 놔야 한다면, 비행장이 없는 곳에는 비행기가 못 가죠?”
“수상비행기도 있지만 마찬가지다. 비행기는 이착륙 거리가 길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1493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공중 나사돌리개와 비슷한 것을 제작하는 중이란다. 수직으로 뜨고 내리는 기계장치인데 일단 헬리콥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산은 제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가 상속했다. 1570년에 멜지가 죽음으로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케치와 노트, 그림과 저술 등이 세상에 나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귀족과 상인들이 나눠 소유하고 있던 유산을 이민호가 몇 년 동안 자금을 대거 투입해 그림 외에는 대부분을 입수했다. 그리고 저서 23권은 조선말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많은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저술과 스케치를 연구하면서 그 동안 왕립대학에서만 박사 5명, 석사 23명이 탄생했다.
“대나무 잠자리 같은 것인가요?”
“오! 바로 그 원리로 비행한다.”
죽천정(竹蜻蜓), 또는 대나무 잠자리라 해서 기원전부터 사용된 어린이 장난감이 있었고, 양쪽에 잎이 달린 식물 줄기나 나무로 간단히 만든 것을 손에 비벼 돌려서 날리는 놀이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기원후 4세기에 동진의 학자 갈홍이 쓴 연단술 책 <포박자(抱朴子)>의 내용 중에, 탕왕 때 날아다니는 수레 비차가 있었다면서 비행 원리로 헬리콥터와 비슷한 설명을 했다.
“아바마마는 윤선이나 장갑차처럼 항상 남이 설계한 것만 만드시는 것 같아요.”
“그게 만들기 쉽잖아. 기차나 비행기나 다 옛날 책에 나오는 것들이야. 그러니 너희들도 책을 많이 읽으면서 쓸 만한 옛 것이나 새로운 발상이 눈에 띄면 직접 만들도록 해라.”
이민호가 발명했다고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고, 항상 출처나 다른 발명가가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이 시대에 절대 과학의 천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그가 원하는 바였다.
“아바마마! 하오면 비행기보다 먼저 만들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요?”
“물론이다. 뭐든지 장단점이 있으니까. 긴 활주로가 필요 없는 대신 헬리콥터는 비행기만큼 속도가 빠르지 않아. 그리고 사람과 짐을 싣는데 한계가 있단다. 그래서 비행기를 먼저 만들었다.”
헬리콥터는 고정익 비행기보다 먼저 개발이 시작됐고, 증기기관을 탑재해서 비행에 성공한 것은 1870년의 엔리코 포라니니였다. 그러나 무인비행기였고 이후 다양한 제작과 비행시험이 이어진다.
1907년에 프랑스의 자크와 루이스 브레게 형제가 만든 헬리콥터가 조종사를 태우고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으나 구속구 등이 연결된 채로 비행했다. 같은 해 말에 폴 코르누가 첫 자유 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비행기와 다른 항공역학적인 문제 때문에 현대 헬리콥터와 같은 실용화는 1930년대에 가능해졌다.
“필요한 곳마다 선택해야겠네요.”
“그렇지. 헬리콥터 개발이 성공하면 말이다. 새로운 기계를 개발하려면 많은 자금과 과학자, 장인들이 필요하기에 쉽게 시작하기 어렵단다.”
이민호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아이들이 절반, 뒤에서 장난치는 애들이 절반이었다. 특히 장남이란 놈은 수업태도가 영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장남은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은 잘 듣는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장남이 이제 기껏 초등학교 1학년이고 9월에 2학년에 올라간다.
“조선소에 도착했습니다, 전하.”
“아! 수고했소. 내리자, 애들아!”
아이들하고 같이 있으면 말투 하나에도 주의해야 했다. 애들이 배울까봐 승합차 운전사에게 함부로 말을 낮추지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 승합차에서 내려 맨 처음 본 것은 건조 중인 거대한 군함과 수송선, 여객선이었다. 크기에 압도당한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바마마! 이렇게 큰 배가 필요한가요?”
“물론이다. 배가 작은데다 수도 적어서 제대로 무역을 못하고 있다. 작은 화물선 100척이 할 일을 큰 배 한 척이 훨씬 적은 선원만으로 해낼 수 있단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보다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
“대포 달린 것은 군함이네요.”
“그래. 저렇게 큰 배가 돌아다니면 고산국에 전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겠지? 전쟁을 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래서 오히려 이익이란다.”
현재 1만톤급 순양함 두 번째 함선이 건조 중이었다. 첫 번째 순양함은 진수된 지 오래됐으나 함체 설계 잘못과 누전 위험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해군에 취역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여기서 얻은 교훈을 적용해 두 번째 순양함이 순조롭게 건조되고 있었다.
“혹시 배가 물속을 다닐 수도 있나요?”
“좋은 질문이다. 보통 배들은 물 위에 떠서 다니지만 물속을 다닐 수 있는 잠수함이라는 배도 있단다. 저길 봐라.”
“작아요.”
조선소 한 켠에서 잠수함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신규 수송선이나 순양함에 비교되지 않을 200톤 정도의 잠수정에 해당했다.
“큰 배에 비해 작을 뿐이다. 그리고 시험용이니까 일단 작게 만든 거지. 제대로 작전에 투입되려면 열 배는 커져야 할 것이다.”
“물속으로 몰래 접근해서 적선에 구멍을 뚫는 일을 하나요?”
“아니. 잠수함을 전쟁에 투입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속에서 해류가 어떻게 흐르는지, 깊은 물속에는 어떤 생물이 사는지 조사하는 과학조사용이란다.”
고산국 해군 함선들이 외국에 비해 지나치게 강해서 군용으로 잠수함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재래식 잠수함은 일반 선박보다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잠수함을 해전에 투입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나 잠수함의 개념이 기원전부터 이미 생겼고 언젠가 만들어지면 해군에 큰 위협이 될 수 있기에 미리 군용 잠수함도 만들 계획이었다.
잠수함을 공격용으로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라 군용으로는 기껏 대항군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뢰 같은 공격용 무기도 개발하지 않았다.
음파탐지기도 만들어서 지금은 해저지형과 암초를 파악하는데 조금 활용되고 있었다. 음파 정보를 제대로 표시할 전시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활용에 제한이 많아서 어군 탐지기로도 쓰지 못했다.
“외국에도 다 있겠죠? 이탈리아나 잉글랜드에서는 특이한 것들을 만드는 것 같아요.”
“없단다. 유학 온 외국인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외국에는 이만큼 큰 배도, 비행기도, 기차나 승합차도 없다. 파나마 운하에 있는 기차는 고산국에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다.”
물론 기차와 승합차를 구경한 명나라 사람들은 제갈량이 목우와 유마(木牛流馬)를 기계장치로 만들어 저절로 움직이게 했으니 그것이 기차나 승합차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지연의>는 물론 정사인 <촉한기>의 주석에 제작방법이 자세히 언급됐으니 일단 그런 운송장치가 있는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조선의 세종 이래 선조까지 군량 수송을 위해 여러 번 목우유마의 제작을 시도했으나, 당연히 저절로 움직이는 장치는 재현하지 못했다. 좁은 촉의 잔도나 험지를 통과하기 위해 제작된 바퀴 하나 달린 수레로 추정된다.
“우와! 정말요?”
“우리 고산국의 과학과 기술이 외국에 비해 앞서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이것들을 최대한 잘 활용해서 국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외국에서 당연히 모방하려고 시도할 테니까 베낄 엄두도 못 내도록 너희 세대에서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아이들이 꽤나 감동한 것 같았다. 외국인들을 만날 때는 기술을 숨기느라 바빴는데 아이들에게는 제대로 자랑할 수 있어서 이민호도 무척 뿌듯했다.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다는 자랑도 하고 싶었으나, 인구 이야기가 당연히 따라 나올 것 같아 차마 하지 못했다.
“아바마마! 저는 땅속을 달리는 차를 만들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다. 착암기라는 건설 장비를 만들고 있으니 참고하도록 해라. 아니면 땅속에 굴을 파고 기차가 다니는 방법도 있단다.”
“저는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고 싶어요. 무당이 쓰는 주술이나 오르골 같은 단순한 것 말고, 기계부품을 사용해서 움직이게 할래요.”
“그래. 방법이 있을 거다. 연구해보도록 해라.”
오늘 분위기만 보면 꼬마 발명가 수십 명이 한꺼번에 생길 것 같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일 오후의 현장 학습은 음악과 미술, 무용 등 예술 분야였다. 그리고 모레는 쌀농사와 밭농사, 과수원 견학, 글피에는 군대의 훈련을 참관하기로 했다.
열 살 이하 아이들에게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평생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생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었다.
집무실에서 최 선생과 함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최종적으로 교정했다. 한 권뿐이라서 이민호와 최 선생이 나란히 옆에 앉아서 같은 책을 읽었다.
그 짧은 시간에 최 선생이 수정을 완벽하게 마쳐서 이대로 출판해도 될 것 같았다. 한 달 후가 학기 초였지만 북미나 호주의 학교에 배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중학교 교과서는 쉽고 흥미롭게, 고등학교 교과서는 다양한 주제를 잘 살린 것 같소. 나라가 아니라 기후와 지역에 따라 음식 문화가 달라진다는 결론은 아주 좋았소.”
“감사합니다, 전하.”
“오탈자도 없는 것 같으니 이대로 출판하도록 합시다.”
수십 명이 눈에 불을 키고 찾아도 오탈자가 생기는 것은 도리가 없었다. 글자 한 자 한 자 읽지 않고 단어 단위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자 인식 방법 때문이었다.
“하온데 수업 시간을 좀 늘려야 하지 않나요? 새로 생긴 역사와 사회 과목은 일주일에 최소 두 시간씩 가르쳐야 과정을 마칠 수 있어요.”
“그럼 다른 과목 시간을 줄이시오. 조선말이나 수학 같은 것 말이오.”
최 선생이 깜짝 놀랐다. 특히 두 과목은 이민호가 주도해서 교과서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학교 수업 시간을 연장할 생각이 없었다. 학부모들은 당연히 학생들이 학교에 오래 남아있을수록 좋아하겠지만, 아무리 자유로운 학교라도 학생들이 학교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물론 집을 좋아하는 학생들도 적었다. 고산국에서는 학생들이 방과 후에 몇 시간씩 실컷 놀거나 다양한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다.
“조선말과 수학은 애국심과 과학에 관련돼서 수업시간을 줄이기 어려워요.”
“역사와 현실로 애국심을 키우고 사회 과목으로 세상을 알게 하는 게 나을 것이오. 수학이 어려울수록 과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알겠지요?”
“네. 그래서 수학공식 외우기를 못하게 했어요. 그리고 어떤 시험이든 교과서나 다른 책을 보면서 치르게 하고 있어요. 기억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아이들은 그저 뛰어노는 게 최고라고 했지만, 사실 나도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이 많길 바라고 있소. 몇몇 고등기술을 익히려면 제대로 대학공부를 마쳐야 하는 수도 있소.”
“예. 학생들이 공부에 짓눌려서 공부하는 재미를 잃지 않도록 할게요.”
이민호는 오래 전부터 최 선생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민호의 착각일지 몰라도 언제든 유혹하면 바로 넘어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 선생이 보수적인 것은 물론 이민호도 업무 관계에서는 철저히 구별하는 편이었다. 물론 후궁들과 호위들은 달랐다.
“전하께서는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시는 것 같아요.”
“지적 수준이 비슷해서 그렇소. 강아지하고도 쉽게 친해진다오.”
“고양이는 아닌 것 같아요.”
최 선생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민영이 키우는 나비는 카라칼답게 일반 고양이보다 훨씬 사람에 친화적이었으나 유독 이민호에게만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이민호를 볼 때마다 발톱을 세우던 새끼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험! 이것은 결혼반지요.”
이민호가 탁자 밑에서 작은 보석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리고 최 선생의 손을 잡아 가늘고 하얀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웠다. 최 선생의 눈가에 이슬이 잔뜩 맺혔다.
유대인 보석세공업자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느라 일곱 달 동안 원석 열한 개 중에서 겨우 두 개를 사용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 두 개와 중간 크기 8개, 작은 크기 70개 정도가 세공이 완성됐다.
최 선생에게 준 것은 중간 크기였고, 다른 주요 후궁들은 이미 받았거나 다음에 받을 예정이었다. 큰 것은 당연히 판매하기로 했다. 이미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에서 두 개나 세 개를 사겠다고 알려왔다.
“고마워요. 전하.”
“그 동안 오래 기다리셨소.”
이민호가 얄밉게 한 마디 하자 최 선생이 화가 나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셨으면서 몇 년이나 저를 기다리게 해요?”
“악!”
최 선생이 주먹을 치켜드는 동시에 책상 아래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터졌다. 최 선생이 얼른 주먹 쥔 손을 내렸다.
“오해하지 마세요. 때릴 생각은 없었어요. 갑자기 화가 났을 뿐이에요.”
“몇 대 때리더라도 충분히 이해하겠소.”
“호위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오늘도 좀 다르네요?”
“최 선생이 입궁하기로 이미 확정됐으니까 더 이상 질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이민호가 최 선생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 당겼다. 그러나 최 선생이 바짝 긴장하고 있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는데도 최 선생은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저, 호위가 머리를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지윤이는 돌머리라서 괜찮을 것이오.”
이민호는 책상 아래 구조를 알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원래 역사에서 그랬듯이 헬리콥터 개발은 고정익기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릴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