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21 79. 1601년의 일상 =========================================================================
다음 날 큐슈 서쪽 고토 열도로 이전한 어업연구소 구주 분소를 방문했다. 임진왜란 전에 이민호가 외륜선을 몰고 가서 조선 수군 포로들을 구출했던 고토 열도는 지금은 섬의 해안 전체가 양식장이나 종묘생산장으로 변해 있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해산물이 식단에서 거의 유일한 단백질원이므로 큐슈의 수산업은 다른 농경지대의 축산업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했다. 어업연구소 구주 분소는 큐슈 어부들에게 어종별로 금어기를 설정하고, 종묘를 부화시켜 키운 치어를 방류하고, 양식기술을 개발해서 어민들에게 전파하는 등의 업무를 관장했다.
“잘 오셨습니다, 전하. 전하께 작년 봄에 새로 만든 방어 양식장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방어가 아주 굵직굵직하구려.”
분소장을 따라 방어 가두리 양식장을 구경했다. 순행 함대를 따라온 기자들은 국왕이 연구원들에게 현장 지도를 했다고 보도하겠지만 사실은 단순히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예전에는 이민호가 어부들을 연구원으로 고용해 양식장을 만들라고 시켰다. 잘 모르는 이민호는 겨우 몇 마디 지시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이들이 그물을 치고 알을 구해 부화시키고 사료를 배합해서 치어를 생산했었다. 지금은 연구원들이 이민호보다 훨씬 전문가였다.
“방어는 체구가 크면서도 양식하기 쉬운 어종입니다. 방어는 클수록 맛있고 봄 산란기 전의 겨울에 가장 맛있습니다. 그러나 여름에는 기생충 때문에 출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인공종묘는 성공하지 못했다면서요?”
“예. 종묘 부화가 수온보다는 일조량에 관계있다는 의심이 듭니다. 그래서 더 연구 중이며, 당분간은 지금처럼 봄에 치어를 잡아서 가두리 양식장에서 키울 예정입니다.”
방어는 한국과 일본 사이 바다, 류큐열도 북쪽, 고산국 왕도 북동쪽까지 회유하는 어종이었다. 지금은 어획량이 충분하지만 다른 어종들이 흔히 그렇듯 언제 확 줄어들지 몰랐다. 그래서 주요 어종에 대한 양식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시험 양식을 하고 있었다.
현대에 들면 양식어업이 해수면 어업, 내수면 어업, 원양어업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올린다. 당장 큰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기술 축적과 어족 유지 차원에서 계속 국가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신기하게도 방어는 자연산보다 양식산이 훨씬 맛있습니다. 마치 사육장을 좁게 만들어서 살만 찌운 돼지고기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연산 방어의 어획량이 충분하더라도 양식산으로 표를 달고 고급 어종으로 승부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살 색깔이 빨간 편이라 안타깝습니다.”
“흐음. 도대체 어느 정도 맛이 있기에 그렇소?”
분소장을 비롯해 연구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목울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이민호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살에 빨간색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흰 살 생선을 선호하는 조선이나 고산국에서 소비가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오나 지금은 초가을이라서 안전을 위해 전하께 진상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안타깝소.”
다양한 어종의 치어 양식과 방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큐슈와 고산국, 그리고 약간 떨어진 유구국과 조선의 어부들이 미친 듯이 잡는 어획량 중에서 몇몇 어종은 절반 이상이 어업연구소의 치어 방류 사업을 통해 풀려났다가 바다에서 성장한 물고기였다.
“현재 어획량만으로 구주의 모든 왜인들이 먹고도 남습니다. 일부는 고산국에 보내고 있지만 조만간 한계에 부닥칠 것 같습니다.”
“수요가 부족하게 됐다니 기쁜 일이오. 그런데 명나라에 수출하려 해도 환관들 때문에 시장이 텅 비어 있어서 문제요.”
“심각하군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술을 계속 축적해놓으시오. 어업연구소가 적자를 봤다고 뭐라 할 사람은 하나도 없소. 사실 어업연구소에서 치어를 대량으로 꾸준히 방류하기에 어획량이 유지된다는 사실 자체도 모를 것이오.”
어업연구소가 구주를 비롯한 주변 해역의 어업을 지탱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평가가 아니었다. 예전에 비해 어황 변동이 크지 않은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었다.
오후에 순행 함대는 북 큐슈의 간몬 해협을 통과했다. 한때 양측 합해서 10만 단위 병력이 집중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해협은 지금은 거세게 흐르는 물살 말고는 조용했다. 간몬 해협의 진짜 관문인 모지코 성에서 예포를 발사해 함대를 환영했다.
다른 함선들을 세워놓고 국왕좌승함만 선착장에 접안하자 모지코 성의 수비대 지휘관이 국왕 일행을 영접했다. 모지코 성에는 혼슈에서 몰려올지도 모를 대규모 적에 대비해 대포와 기관총을 보유했다. 그래서 큐슈에서 유일하게 고산국 본토에서 파견된 1개 중대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국왕전하를 환영합니다!”
“수고하네. 별 일은 없나?”
몇 년 전에는 관동 지역에서 근거지를 잃은 사무라이가 거지꼴이 된 병사들 30여 명을 이끌고 해협을 넘어오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주 조용했다.
“예! 전하. 가끔 해협을 건너와 투항하는 혼슈의 왜인 말고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서 올해는 열 가구, 40명도 안 됩니다.”
“관동지역도 드디어 조용해졌다는군. 계속 잘 지키게. 조만간 이곳을 지킬 필요가 없어질 거야.”
직할지도 아니고 속국도 아닌 애매한 큐슈에서도 외딴 성에 파견된 중대 병력은 심심해 죽으려 했다. 그러나 현지인 마을에 놀러갈 수도 없어 근무 기한인 3개월이 지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저녁에 온천 휴양도시로 개발된 벳푸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받은 구주 총독이 대기하고 있다가 국왕좌승함이 접안한 다음 국왕 일행을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에게서...... 상황 보고부터 받으시겠습니까?”
“총독 말투가 좀 그렇소. 출출하니 식사부터 합시다. 순행 요원들을 잘 대접해주시오.”
“왜인들 말투가 옮은 모양입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전하.”
고산국 식단은 조선식을 기본으로 했고 튀김이나 후식 위주로 유럽식이 약간 가미된 정도였다. 그러나 말이 유럽식이지 케이크나 아이스크림 등 달짝지근한 후식 종류와 생선 또는 고기 튀김은 혜진이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이민호가 아이디어를 주면 혜진이 시험을 거쳐 음식을 완성해냈고, 혜진에게 배운 식당 주방장들을 통해 대중화됐다.
현대 프랑스 요리를 비롯한 유럽 요리의 기원은 이탈리아에 두고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왕실이나 귀족 가문에 이탈리아 요리사들이 고용되고, 귀족 가문들끼리 경쟁이 붙으면서 요리가 발전한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나 귀족 영주들의 몰락 이후 실업자가 된 요리사들이 식당을 차린 다음에 유럽에서 요리가 대중화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그나마 그럴 듯한 이탈리아 요리사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왕실이나 귀족 가문에 고용되지도 못한 시대였다. 마닐라의 에스파냐 사람들이나 마카오의 포르투갈 사람들이 교역하러 오는 외에 괜히 고산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벳푸에서 대접받은 식사는 일본식과 조선식이 합해진 정도의 느낌이었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가문의 생존을 위해 검소하게 식사하는 것이 상식이었으므로 화려한 요리가 드물었다. 그래서 생 재료 그대로 먹는 반찬들이 있었으나, 이민호의 입맛에 잘 맞았다.
“총독! 구주를 다스리는데 문제는 없소?”
“예, 전하. 뜻밖에 왜인들이 아주 고분고분합니다. 이 자들이 과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노략질했던 놈들과 같은 종족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큐슈를 점령한 이후 반란에 대비해 한동안 큐슈 총독은 주로 무관이 임명됐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순응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 얼마 전부터는 총독으로 처음 임명되는 고위 관료들의 첫 부임지로 고정됐다.
조선인으로서 임진왜란을 겪거나 고산국 이주 후에 전쟁에 참가하거나 간에 조선인 출신이라면 누구나 침략자 일본인들을 강하게 혐오했다. 그러나 큐슈 총독으로 근무하면서 몹시 순종적인 일본인들을 다스리다 보면 자연히 호감이 생긴다고 했다.
“왜인들이 사납지만 확실한 지배자에게는 무척 순응한다더군요.”
“예, 전하. 왜인들이 말하길 고산국에서 지배한 이후 살기가 훨씬 좋아졌다고 합니다. 아! 물론 전하의 은덕과 저의 전임 총독들이 잘 다스려준 덕택입니다.”
전쟁에 휘말렸던 큐슈에 딱히 고산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재정적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히시카리 금광에서 나는 금을 재원으로 재건사업을 진행했을 뿐이었다.
사실 매년 금 20만 냥이라면 큐슈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충분한 자금이었다. 물론 금은 고산국으로 바로 빠져 나가고, 그와 같은 액수의 은이 노역 임금 등으로 큐슈에서 유통되다가 면직물 등 고산국 상품을 수입하면서 점차 빠져 나가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투자한 자금보다는 토지 재분배 정책이 큐슈의 일본인들을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데 큰 효과를 봤다. 다이묘와 사무라이 등 대지주들이 모두 사라지고 작은 개인 소유지마저 몰수했다가 재분배하면서 큐슈의 땅 전체를 왕토로 바꿔버린 효과도 있었다. 바로 몇 년 전까지 높은 전세와 부역으로 혹독하게 고생한 일본인들에게 넓은 경작지를 배분한 다음 수확량의 5할을 걷자 매우 관대한 세율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만족스런 삶을 살았다. 불만이 있는 자들이라면, 히시카리 광산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자들뿐이었다.
“구주 총독은 매우 특별한 자리요. 구주는 아직 고산국 영토로 편입된 것이 아니니 딱히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소. 적당히 하시오.”
“예, 전하. 알고 있습니다. 왜인들을 더 이상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기리시탄 병사들은 지금 이대로도 구주가 천국이라고 합니다.”
구주 총독과 식사하는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민족을 경계하면서 지배하는 것이 불편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총독이나 관리들 입장에서는 같은 나라 백성으로 인정된 여진족이나 북미 원주민, 호주 원주민들과 함께 일하며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것이 훨씬 편했다.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을 것이오. 한 세대 정도 지켜본 다음 구주 사람들에게 본국과 같은 대우를 해줄 생각이오. 자치권을 줄 수 없으니 속국은 곤란하고, 아마도 직할령으로 삼게 되겠지요.”
“왜인들은 기뻐하겠지만 본국의 이민 세대에서 반대가 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조선인들은 일본이라면 치를 떱니다.”
“그렇다 해도 누구든지 고산국의 영역에서 가난하게 사는 꼴은 못 보겠소.”
“예. 하오나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하면 왜인들이 훨씬 잘 사는 편입니다. 물론 고산국 본토와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큐슈가 정식으로 고산국 영토가 된 것은 아니므로 왜인들은 기본 소득을 못 받았다. 왜인들이 의료와 교육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받는다 해도 아직 대학교도 없었다. 못 먹고 못 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토와 비교해 이런 저런 차별이 존재했다.
“다른 문제는 없소?”
“작년부터 신교도 목사라는 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루터파와 칼뱅파 목사가 합해서 다섯 명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입니다. 본토에 유학생으로 위장해 들어왔다가 구주로 잠입한 것 같습니다.”
이민호가 어리둥절했다. 고산국 어딜 가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됐다. 당연히 선교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큐슈의 특수성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오해한 것 같았다.
“신교도 목사들이 숨어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소?”
“예. 일본에서 기독교를 탄압한다는 오래된 정보를 갖고 온 자들 같습니다. 가끔 신고가 들어옵니다만 체포하지는 않았습니다.”
“딱히 선교를 지원해줄 필요는 없으나 목사가 원하면 교회 건물을 지어주도록 하시오. 선교 활동비도 제공하시오. 그리고 혹시 모르니 기리시탄이나 불교도들로부터 잘 보호해주시오.”
“예. 본토 기준으로 다른 종교 선교사들과 동일하게 활동비를 제공하겠습니다. 비밀리에 선교한다고 생각하던 목사들이 꽤나 놀라겠습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숨어서 열심히 일본인들에게 선교하는 목사들에게 총독부에서 활동비를 지급하고 교회를 만들어준다면 아마도 황당할 것이다. 낙심해서 돌아갈 수도 있고, 더 많은 유럽인 목사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큐슈를 방문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다행히 가톨릭 신부들이 유럽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교도라고 화형에 처하지 않았다. 어느 종교든 소수일 때는 얌전하고 순수한 편이었다.
이민호는 고산국 영역에서 가톨릭교회와 신교를 소수 종교로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이이제이처럼 다른 종교를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불교와 유교를 지원하고 있소?”
“전쟁 기간 동안 절이 불 타 없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왜인 스님들의 청을 받아들여 불교 사원을 몇 개 세웠습니다. 그러나 유교를 가르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불교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한자를 좀 가르쳐주는 정도입니다.”
“유교 교육을 원하는 일본인이 있는지 모르겠소.”
“유교에 대해 어렴풋이 알면서 지식인들이 유교 교육을 받으면 고산국과 심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구주가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정도입니다. 그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러나 한자 교육과 유교 교육은 수준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였다. 유교를 퍼뜨리려 해도 교육에 시간이 워낙 많이 들고 적당한 선생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떤 정신 나간 조선인 선비가 큐슈에 와서 서당을 열 가능성도 없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어서 유교 교육에 대한 지원을 접어두기로 했다. 유명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훌륭한 사상을 현실에 실천하면 좋겠지만 이 시기 이후 조선의 유학은 다른 사람들과 아예 말이 안 통하는 교조주의로 흐르기 쉬웠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든 원리주의로 가면 답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왜인 아이들은 자기들이 고산국 백성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리시탄 병사들도 마찬가집니다.”
“같은 교과서로 배우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소.”
큐슈 학생들은 분명히 모든 과목을 일본어로 배우는데도 고산국 학생들과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고산국 최 선생이 만든 교과서를 단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조선말 수업 시간을 늘려달라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요구가 강했으나 일주일에 세 시간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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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북미에 잠깐 갔다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중간에 순행 분위기가 돼버리는군요.
어떻게 되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