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42 82. 1603년 =========================================================================
“아니, 어떻게 자형께서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전하. 잠시 휴가를 받은 차에 엄친 대신 올해 소출도 바치고 고산국 구경도 할 겸 제가 왔습니다.”
연말에 평소처럼 오희문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오윤겸이 왕도로 찾아왔다. 매년 연말에 사돈 오희문이 올 때마다 숨기 바빴던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도 오랜만에 만나는 사위를 반겼다. 이응화는 사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피한다고 했으나, 아무리 봐도 무서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잘 오셨네. 사돈께서는 강녕하시고?”
“예, 빙장어른. 환갑 지나시고서도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사돈은 건강하신 것이 아니라 꼬장꼬장하신 거야.”
오윤겸은 수준 높은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학자들과 달리 당파를 따지지 않고 사농공상의 신분도 가리지 않았다. 오윤겸은 심지어 적서 차별은 집안문제에 불과하기에 국가를 위해서는 서얼 여부를 따지지 말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이민호와 이응화는 고산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여전히 많은 친지나 친구를 두고 있어서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찾아갔다. 작년 제주목사 이경록의 부친상 때 한성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민호는 비교적 조선 방문을 자제하는 편이었으나 부친 이응화는 고산국 대원군 자격으로 호위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시로 조선을 방문했다. 조정 대신들을 만날 일은 없고 겨우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돈을 뿌려서 조선인들의 호감을 사는 외교사절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냈다. 그리고 무관의 자식이나 별시무과에 합격한 다음 관직을 받지 못해 놀고 있는 한량들을 꼬드겨 고산국 기병연대 장교로 보임시켰다.
이들은 일정 기간 근무를 마치고 나면 4분의 3 정도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산국은 비싼 기병장교 교육비를 안 들이고도 유능한 기병장교를 공급받을 수 있었고, 조선에서는 수십에서 수백 명을 지휘하며 실전경험을 쌓은 장교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이 화기 위주로 편제가 변해가면서 고산국의 군제를 많이 참고했다.
“그런데 우리 사위는 문관인데 어쩌다가 함경도까지 갔나?”
“관리로서 한성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정에서 배정한 외직에서도 일해야 합니다.”
“에이! 나도 귀가 있는데.”
“하하! 꼭 제 스승님이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학자 분들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고지식한 유학자 분들은 학설이 다른 분을 심하게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오윤겸은 성균관 직강이었다가 스승인 성혼을 변론했다 하여 집권당파인 북인의 미움을 받아 작년에 경성판관으로 좌천됐다. 전형적인 학자 관리가 함경도에서 서리와 바람을 맞으며 거칠고 품계가 높은 무인들을 규찰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무관들이 겁을 주지 않아? 무관들은 만만한 판관이 오면 은근히 위협하고 그러던데.”
“저는 고산국 국왕전하의 매형 아닙니까? 함경도 무관들이 제 앞에서는 쩔쩔 맵니다. 덕택에 일은 아주 편합니다.”
예전 임진왜란 때 이민호 밑에서 함께 싸웠던 전력도 있고, 무관의 서얼 자식들이 고산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함경도 무관들이 오윤겸의 품계가 낮다고 무시할 일은 없었다.
“설마 고산국왕의 매형이라 해서 조정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빙장어른. 오히려 전하의 덕을 많이 보는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 좋게 좋게 하는 소리였다. 오윤겸은 문과 급제 이후 빠르게 승진하다가 고산국왕 이민호의 자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주로 외직을 전전하게 됐다. 이응화가 딸이 보고 싶다고 부르고 이민호가 고산국에 와서 도와달라고 청했어도 오윤겸은 끝까지 조선에 남겠다고 했다. 이원익처럼 오윤겸도 농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동법을 찬성하는 쪽이었다.
“빙장어른. 잠시 공무부터 논의해야겠습니다. 전하! 올해 소출을 보시지요. 올 여름부터 냉해는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명나라와 달리 조선에서 굶어죽은 사람은 없다지요?”
“여차 하면 고산국에서 쌀을 구할 수 있어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고산국과 조선이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도 좋지요.”
임진왜란 전에 오희문과 누님에게 사창을 운영하게 한 다음 한성의 빈민을 구제하고 남는 자본으로 양평과 부평을 비롯해 곳곳에서 산과 논밭을 사들였다. 아직 사유지에서 금광을 운영할 수는 없었지만 조만간 민간경영도 가능하게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조선에서 고산국과 대규모 교역을 유지하려다 보면 금과 은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잣이 어마어마하게 생산됐군요.”
“양평에서는 아낙네들이 미운 서방에게는 잣죽을 주고 예쁜 샛서방에게는 쌀밥을 먹인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겼습니다.”
“잣 가격이 그 정도로 폭락했습니까? 남는 것은 여기로 보내주세요. 예년 가격을 지불하겠습니다.”
“설마 그 정도야 되겠습니까? 해송자가 풍년이 들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잣 생산량 절반은 이미 아리수 항 창고로 옮겼습니다.”
금광을 소유하려는 욕심 때문에 한성 동부 양평과 가평, 청평에서 산과 농경지를 사들였는데 엉뚱하게 잣나무 숲에서 가장 큰 소득이 생겼다. 오윤겸이 간벌할 것을 조언하고 부지런한 오희문이 사람들을 시켜 숲을 관리해 잣나무의 성장을 도왔다. 예전에도 생산량이 꾸준했다가 올해에 대풍이 들었다.
잣나무는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 자라는 냉대성 유실수이며 개화결실 주기성을 갖는다고 했다. 3~5년마다 풍흉이 반복돼서 운이 없으면 수확을 거의 못 거두는 해도 있었다. 그러나 오희문이 매년 꾸준히 식재를 함으로써 개화시기를 분산시켜 풍흉에 따른 수확량의 변동폭을 줄였다.
“양평과 청평, 가평 인근 농지에서 3만 2천 석을 거둬들였습니다. 쌀값이 올라 은으로 거의 3만 냥입니다. 작년에 만 석 이하로 소출이 떨어져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소출은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실제 역사에서 조선에서도 3년 연속 흉년이 들어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은 기근 구제 제도가 완비된 편이라 수확량이 급격하게 감소된데 비해 인명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고산국에서 쌀을 수입해 조선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동안 조선이 고산국과의 교역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하다가 쌀을 대량 수입하면서 3년 연속 적자가 났다.
“그래도 전하의 땅인데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쌀 대신 은으로 바꿔 왔습니다. 그리고 소작농들에게 논과 밭 50결을 팔고 받은 은입니다.”
“항상 그랬듯 자형께서 좋은 일에 쓰십시오. 이제 양평이나 청평, 가평에 전업 소작농은 없겠네요?”
“예. 감사합니다. 예전 소작농들이 자작농으로 독립해도 충분합니다만, 남는 일손으로 거들고 있습니다. 농번기에는 한성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해서 일을 시킵니다.”
이민호가 관심을 둔 것은 은 3만 냥이 아니라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시킨 다음 생산량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3년 연속 냉해가 들어서 엄밀한 비교가 어려웠다.
“냉해가 들었다 하나 자작농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논밭을 살려냈습니다. 다른 지방 소작농들이 하늘만 바라본 것과 확실히 비교됩니다. 확실히 자작농들이 훨씬 적극적이라서 소출도 많습니다.”
온돌에 흙을 덮고 불을 때우는 식의 조선식 온실을 만들어 종자를 일찍 파종하고 싹이 튼 다음 이것을 밭에 옮기는 식으로 냉해를 피했다고 한다. 오윤겸이 그 동안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기간에 배운 영농기술이었다.
“잘 하셨습니다, 자형. 자작농이 늘어나야 세곡이 늘고, 그래야 조선 조정에서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자작농이 백성의 근간입니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자작농을 군인으로 뽑아야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무기와 갑옷, 말 등을 정병이 자비로 마련해야 했기에 조선 조정에서도 국초부터 자작농을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관료와 양반 대다수가 지주였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흔했다.
지금은 이앙법이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빨리 정착해서 광작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농지에서 밀려난 소작농들이 고산국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대신 명나라와 달리 조선을 떠도는 유민은 거의 없었다.
“건주 여진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압록강 쪽에서는 아주 조용합니다. 가끔 만포에서 첨사가 위무할 때 여진족들이 수백 명씩 건너와서 대접을 받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북방의 정세 변화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건주 여진 영토 건너편 만포 첨사진이 여진족의 관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국서나 다름없는 공문서의 전달이나 인원의 통행이 모두 만포를 통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국경 무역이 이뤄졌다.
“건주 여진은 흉년을 겪지 않았을까요?”
“반대인 것 같습니다, 전하. 쌀을 좁쌀로 바꿔가는 양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여진족은 좁쌀이 주식이라고 들었습니다.”
“요동에서 기근 때문에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했다면서요?”
“예. 명나라 전역에 흉년이 들었기에 요동의 한인들이 주로 건주 여진 쪽에 투탁한다고 들었습니다.”
“거 참 문제로군요.”
기근이 들지 않더라도 평소에 농지에서 밀려난 한인 유민들은 내몽골이나 여진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들은 현대와 달리 소수민족의 비율을 줄여 중국 중앙정부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민족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농민과 기술자 외에도 관료제도의 한 축을 담당해 이민족 지도자에게 효율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한족 지식인들이 금나라와 원나라 행정조직에서 일한 경우가 많았듯이, 이 시기에는 여진족의 행정조직에 편입돼서 일했다. 여진족 땅으로 한족 농민의 이주가 많아지면서 한족 팔기가 구성될 날도 멀지 않았다. 명나라는 조약을 체결해 고산국에 백성을 빼앗기지 않는 대신 예상치 못하게 여진족과 몽골족에게 백성을 빼앗기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평안도에 산성을 수축하고 병사들을 꾸준히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건주 여진이 침공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그럼 좋겠지만 말입니다.”
기마민족의 가장 큰 장점이 빠른 기동력이었다. 기마군단들이 몇 가지 길을 통해 수도를 향해 달리면 농경민의 전령보다 빨라서 농경민족의 중앙정부에 심리적인 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
“전하께서는 만약의 경우 조선을 도와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 고산국의 지원을 꺼리다가 중요한 시기를 놓칠까봐 두렵습니다.”
“휴우~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민호가 고향에 대한 영토적 야욕이 없다고 누누이 반복했어도 조선 조정에서는 고산국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정상이라 이민호도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새로 설계한 일만 톤 급 순양함 네 번째 함이 진수됐다. 기준 배수량이 일만 톤에 육박하고 만재배수량은 거의 1만 3천 톤에 달했다. 기존 5천 톤 이하 철 구조물을 이용한 목제 함선을 경순양함, 일만 톤 이상을 중순양함으로 구분했다. 그 이하는 호위함, 순찰함 등의 이름을 달았다.
이 시대에 과도하게 큰 전함은 필요가 없었다. 전함 대신 대양에서 단독 혹은 소규모 전대별 작전이 가능하고 다양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순양함이 선호됐다. 이차대전 초기의 3만톤 급 중순양함은 없었으나 이 정도면 웬만한 기후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누빌 수 있었다.
“크군요.”
“예, 전하. 배가 아주 커서 든든합니다.”
배는 클수록 좋다. 이민호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재직하면서 해군과 일할 때 숱하게 듣던 소리였다.
배가 크면 더 많은 무장을 탑재할 수 있고 연료 탑재량이 늘어 항속거리가 늘어난다. 웬만한 악천후에도 작전에 나갈 수 있으며 전투 중에 같은 피해를 받더라도 작은 배에 비해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또한 여유 공간이 있어야 나중에 새로운 장비를 추가 탑재해서 성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대한민국 해군은 항상 예산에 쪼들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 숫자를 충분히 늘릴 수 없어 한 척에 무장을 가득 채우고, 또한 다른 무장을 줄일 수 없는 상황에서 예산을 줄이다 보니 건조비라도 아끼려고 배 크기를 줄였다. 결국 자그마한 함체에 갖가지 무장을 꽉 채우는 식으로 운용했다.
“전하! 결국 일만 톤 급으로 함체를 키운 순양함인데도 탑재무기라곤 현용 순양함과 거의 비슷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총함장님. 그 이상은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만한 크기에 8인치 함포면 좀 약한 감이 듭니다. 함포라도 대형화하면 어떻겠습니까?”
“기존 함선에 5인치도 큰 편입니다. 8인치면 충분합니다.”
순양함에는 주포로 8인치 3연장 함포 6문, 부포로 5인치 연장포 6문 등으로 무장했다. 주포 포탑은 앞에만 달았다.
그러나 총함장 이순신은 공간이 남는다며 더 강력한 무장을 원해서 설득하느라 혼이 났다. 지금 이대로도 세계에서 고산국 해군을 상대할 해군이 없었다.
“전하. 네 번째 순양함은 어쩌면 진수 후 취역 전에 실전에 투입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나라 해적이 또 발호하고 있습니까?”
“이번에는 절강이나 광동이 아니라 안남과의 국경 지대입니다. 기근 때문에 발생한 명나라 유민들이 그나마 식량 구하기 쉬운 남쪽으로 대거 몰려갔다고 합니다. 육지에서는 금방 관군에게 토벌 당하니까 바다로 내몰린 셈입니다.”
“냉해 막바지에 또 다시 봉기했군요.”
명나라 해안에서는 고산국 해군과 해양경비대 때문에 더 이상 해적질을 할 수가 없었다. 1598년 이후 계속된 유민들의 반란은 점점 그 강도와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603년이 끝나고 다음은 1604년입니다.
별 일이 없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