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45 83. 1604년 =========================================================================
“저희들은 전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추밀원 의원입니다. 무지렁이 백성들의 투표를 통해 뽑힌 시의회 의원들과는 신분이 전혀 다릅니다.”
추밀원 의원의 발언을 들은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우선 고산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왕정국가라 백성들이 투표로 선출한 시의원보다 국왕이 임명한 추밀원 의원이 정치적 정당성 면에서 우월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원이 일반 백성들을 낮잡아 보는 것이 영 불쾌했다. 혹시 조선에서 천한 백성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양반 출신인가 하고 추밀원 의원 명단을 살폈다.
그러나 발언자는 북미 새인천 의원이며 직업은 농부, 조선에서 가죽 신발을 만들던 갖바치 출신이었다. 갖바치라면 조선에서 대표적인 천민이었다. 방금 발언을 한 추밀원 의원이 조선에서 양반이었다면 파직시키려 했는데 천민 출신이라 특별히 한 번만 용서해주기로 했다.
“고산국은 국왕 이외에 신분 차별이 없는 나라요. 되도 않을 특권 의식을 내세우면 파직시킨다고 규정에 나와 있소.”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파직시키지 마시옵소서, 전하!”
의원은 모처럼 관직을 차지했는데 여차 하면 쫓겨날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차별을 당하고 고산국에 와서 추밀원 의원이 됐다 해서 다른 백성들을 차별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징계위원회를 열어 파직 절차를 밟겠소.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용서해줄 테니 추밀원 의원의 의무와 상벌 규정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시오.”
“감, 감사합니다, 전하!”
추밀원 의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국왕 입장에서 추밀원 의원이나 농민이나 똑같은 신분을 가진 백성이었다. 그러나 다른 추밀원 의원들은 이민호가 화를 낸 이유를 다르게 해석했다.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뭔가 오해한 것 같지만, 어쨌든 절차를 지키시오.”
몹시 답답해진 이민호는 왜 독재자가 생기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사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독재정치를 해왔었다. 국왕 개인과 왕실 가족들, 그리고 몇몇 조정 대신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정책결정이나 법안 의결에 참가할 권리가 없었다.
조선에서는 국왕이 사대부 중의 일부 세력과 함께 국정을 주도했다. 유럽에서도 군주는 영주나 귀족들과 힘을 합쳐서, 혹은 그들과 협상과 양보를 통해서 정책을 추진했다. 폭군으로 유명한 자들도 최소한 군대라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에 폭정이 가능했지, 아니면 오래지 않아 쫓겨나거나 살해당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군주가 소수 특정 계층에게 일정한 특권을 나눠주면서 함께 나머지 대다수 농민들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식이 여전히 모든 지역에 통하고 있었기에 특권층이 없을 것 같은 신생 고산국에서도 자칭 특권층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꽤나 많았다. 특히 추밀원 의원이나 시의원들 같으면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쥐게 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며칠 후에 추밀원 회의가 다시 열렸다. 농업연구소 어느 부서에 연구를 의뢰했다는데 사흘 만에 뚝딱 보고서가 완성됐다. 당연하게도 의원들이 요구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 참새가 농사에 끼치는 피해만 조사한 것이었다.
“본토와 구주, 여송, 여진 땅, 서 시베리아, 북미, 호주 등 농업지역에서 참새가 먹어치우는 곡식의 양이 매년 수천 톤에 달합니다. 작은 새라 해서 우습게 볼 것이 절대 아닙니다. 참새는 고산국과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이니 시급히 물리쳐야 합니다.”
“큭!”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이 실제 정책이 된다고 상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었다. 여기서 의원들을 무식하다고 비난만 하면 앞으로 추밀원에서 다양한 의견을 구하려는 이민호의 의도가 막힐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추밀원은 고산국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을 교육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이민호가 직접 추밀원 의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신문 기사에 고스란히 실려 백성들이 왜 이런 정책이 입안되고 어느 정책은 시행되는 반면 어느 정책은 폐기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반대하는 의원은 없소? 참새가 알곡을 쪼아 먹긴 하지만 그건 가을 한 때요. 봄과 여름에는 참새가 해충을 잡아먹고 살고 있소. 농사에 도움이 되는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오.”
“전하. 참새가 봄여름에 논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참새 한 마리가 일 년에 알곡 네 근, 에, 그러니까 2.4킬로그램을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벌레를 몇 마리나 잡을지 모르나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봄여름에 내버려뒀다가 추수 전에 참새를 잡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아도 바쁠 수확기의 농민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봄에 수확하는 밀이나 보리도 참새의 표적입니다.”
“알겠소. 이 제안에 찬성하는 의원들은 제안찬성자 이름 옆에 서명을 하시오. 나는 반대하지만, 의원들의 요구를 수락하겠소.”
추밀원 의원들이 바짝 긴장했다. 왕정 시대에 국왕과 다른 의견을 가진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원들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새는 농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해조일 뿐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러나 급격하게 시행할 수는 없는 법, 일부 지역에 시범적으로 참새를 잡는 정책을 실시하겠소.”
모택동이 국가주석으로서 권력을 잡은 1950년대 후반 중국에서 참새와 쥐, 모기와 파리를 잡는 전국적인 제사해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참새는 모두 잡았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참새가 사라진 몇 년 동안 농업생산량이 급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여기에 철강 생산량 증산을 추진하는 토법고로 정책으로 농기구를 녹이고 나무를 베어 화로에 넣는 바람에 홍수가 빈발했다. 식량 생산량은 더더욱 감소했다.
그러나 공산당 지방 당 간부들이 보고한 수확량은 지난해의 두 배, 세 배, 심지어 열 배로 증가했다. 생산량 증대를 위한 참새 박멸 정책을 시행 중이니 농업 생산량 변화가 좋은 쪽으로 나와야했고, 당연히 충성스런 당 간부들은 중앙당에 허위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취합한 통계상 식량생산량은 분명히 증가해서 쌀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외국에서 식량을 긴급히 수입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 기간에 소련에 차관을 상환할 때 곡물로 갚았고, 인민공사는 집단농장의 비효율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결국 인민들이 전국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모든 사실이 드러나고 나서도 모택동은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참새 잡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결국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민호는 그런 답답한 나라를 절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참새를 멸종시켜야 합니다, 전하. 하오나 전하께서 시험 삼아 일부 지역에만 우선 적용하라고 명하셨으니, 저는 북미 전체에서 시험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시험이라지만 한 지역의 농사를 완전히 망칠 수도 있소. 좀 더 작은 지역으로 축소하시오. 가능하다면 섬 같은 폐쇄된 지역이 좋겠소.”
“그럼 호주는 어떻습니까? 곡물 생산량이 전체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섬 지역입니다.”
“호주는 너무 넓어서 병사 몇 만을 투입한다 해도 참새를 다 잡는데 10년은 걸릴 것 같소.”
고산국 사람들의 스케일이 참으로 커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의원이나 농민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에 교훈을 주기 위한 시험이었으나, 크게 손해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실패로 인해 의원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다.
이민호는 대형 지도를 펼쳐 본토와 루손 섬 사이 해협에 위치한 작은 섬 몇 곳을 가리켰다. 바탄 섬은 마닐라 만 입구 북서쪽의 바탄 반도와 전혀 다른 지역이었다.
“몇 년 전부터 농업연구소가 시험 작물 재배용으로 사용 중인 섬들이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남 시 남쪽 잇바얏 섬과 그 남쪽 바탄 섬은 토양의 성질이나 수확량이 비슷하오. 같은 면적의 논에 볍씨를 파종하되 한 섬에는 참새를 살려두고 다른 섬에 참새를 다 잡아서 수확량을 비교하도록 합시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혹여 전하의 뜻에 따라 연구원들이 수확량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신뢰 문제는 중요하오. 그렇다면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 의원들이 두 섬에 교대로 파수를 서시오.”
한참 나중 일이지만 일 년 후에 수확량 차이가 3할 정도 생겼다. 추밀원 의원들은 태풍에 의한 피해라느니, 다른 이유가 있느니 변명을 많이 했다.
다음 해 봄부터 추밀원 의원들이 이민호 몰래 직접 나섰다. 논에 창궐한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짚불을 태워 연기를 쐬려다가 적발됐다. 의원들이 농업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직접 손으로 벼멸구나 해충을 잡아가며 어떻게든 논을 살려보려 노력했으나 죄다 실패했다.
2년째에는 수확량 차이가 6할 정도로 벌어졌다. 3년째에 참새를 다 잡은 섬의 수확량이 거의 0에 가까웠다.
그 전에 시험에 찬성한 추밀원 의원들 일부가 자진 사퇴하거나 선거에 불참했다. 자기는 처음부터 참새 박멸을 반대했다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국왕이 오히려 참새 박멸 주장을 펼쳤으나 충심으로 반대했다고 왜곡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민호는 의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들이 다수였다.
문제는 계속됐다. 새로 구성된 추밀원에서는 다른 지역에 대규모로 시험해볼 것을 제안했다. 책임 질 사람들은 다 도망갔고, 새로 추밀원에 들어온 의원들은 아무리 연구보고서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설득이 되지 않았다.
참새를 박멸하자는 주장은 추밀원의 대표적인 흑역사였으나 추밀원이 항상 바보짓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추밀원에서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좋은 제안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한 다음 괜찮은 제안은 즉시 시행하고 몇 가지는 수정하거나 장기적으로 시험한 다음 시행했다. 그러나 다양한 제안이 쏟아지다 보면 이민호가 몹시 싫어할 만한 제안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전하! 기본 소득 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을 하기 싫어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누구나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른 백성들이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본 소득은 국고가 아닌 왕토 사상에 의한 수입, 즉 왕실 금고에서 나오는 돈이오.”
“그래도 아깝습니다. 게을러빠진 인간들에게 돈을 주더라도 고마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백성들을 위해 돈을 어떻게 쓰더라도 아까워하지 마시오. 그리고 똑같은 기본 소득을 받더라도 의원은 고마워하지 않는 반면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소.”
“저는 기본 소득을 안 받아도 됩니다. 돈을 공짜로 나눠준다 해도 국가에 과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업을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도 수입이 생기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소비를 더 많이 할 수 있소. 기업이나 식당, 가게 주인들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소. 의원은 고중 시내의 식당 여러 곳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되어 있군요. 맞소?”
“맞습니다, 전하. 가장 싱싱한 식자재를 위생적으로 가공해 식당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기본 소득이 없어지면 직업이 없거나 수입이 적은 사람들은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아니라 돈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직접 해먹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고중 시에서 영업 중인 식당의 절반가량이 손님이 없어서 폐업할 것이오. 의원의 수입 절반 이상, 대충 4분의 3 이상이 줄어들게 돼 있소. 그럼 의원의 기업이 계속 경영이 가능할 것 같소?”
“으윽!”
보통 잘 되면 본인이 잘난 덕택이고 잘못 되면 조상 탓이었다. 그러나 기업가나 자영업자들은 국가에서 시행하는 경제정책에 따라 사업의 성패 가능성이 많이 달라질 수 있었다.
기본 소득제는 빈민이나 노인들뿐만 아니라 기업가나 자영업자들에게 큰 이익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경제주체는 기업과 상인들에게서 세금을 받고 지분 투자를 한 정부였다. 다양한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왕실도 재산을 꾸준히 불려갔다.
“전하! 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은행에서 대출을 더 많이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이 창업할 때 중소기업청에서 지분 참여를 하고 있으므로 자금이 모자란 경우는 드물 것이오.”
“그것은 아니고, 백성들에게 빚을 지우려는 의도입니다. 백성들이 빚을 져야 빚을 못 갚거나 큰 빚을 갚느라 오랜 기간 허덕일 테니까요.”
백성들로 하여금 일부러 빚을 지게 해서 못 갚게 하는 것이 대출의 목적이라는 주장에 이민호는 몹시 놀랐다.
“백성들이 빚을 지면 뭐가 좋소?”
“빚꾸러기, 그러니까 빚을 진 자들은 어떤 일을 시켜도 대들지 못하고 고분고분해집니다. 조선 같으면 소작농들이 지주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모든 백성들이 감히 국왕전하나 관리들에게 대들지 못할 것입니다.”
“어이가 없군.”
“국왕전하에 대한 충심에서 알려드리는 경세법입니다. 교육과 의료도 무료가 아닌 적당한 비용을 받아내야 합니다.”
“의원이 의사는 아니고, 혹시 아들이나 친척이 의사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순수한 의도로 전하께 충언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삶이 고달파지고 세상이 불안해질수록 백성들이 강한 권력자, 즉 전하께 더욱 의존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너 체포. 국기문란이다.”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 의원은 추밀원 경위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충심을 다했다.
“전하~ 간신들의 달콤한 아부에 속지 말고 저 같은 충신의 고언을 받아들이십시오. 전하아~”
문이 닫히고 메아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추밀원 의원을 회기 중에 체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됐다.
“고가 나라를 세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서였소. 왕실의 안녕과 영속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그것을 이유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추밀원 의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단지 의원이 체포되면서 겁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산국의 건국이념을 홍익인간이라 했는데, 이는 고산국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이 포함됐다. 고산국이 아프리카나 명나라를 정복하지 않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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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대한민국 국회가 생각나는군요. ㅡ.ㅡ
추밀원 회의 장면은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