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51 84. 1605년 루스 동란 =========================================================================
눈부신 아침 햇살과 새 소리에 잠이 깬 이민호가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일곱 시가 넘었다. 호위대와 함께 마을에 주둔한 장갑차 1대대 병력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내는 소음이 귀에 들어왔다.
에바가 물을 채운 세숫대야에서 세수를 한 다음 테라스 밖에서 계속 울리는 새 소리에 이민호가 귀를 기울였다. 테라스로 통하는 문 너머 고개를 내밀어 본 곳에서는 난간에 걸터앉은 루스인 궁녀 이리나가 손에 알곡을 담아 작은 새들에게 주고 있었다. 작은 새들이 날갯짓하며 이리나의 손과 어깨, 머리를 오가고, 이리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야! 보기 좋다.”
“저도 저렇게 할 수 있어요, 주인님.”
이리나와 새들이 놀랄까봐 작은 소리로 감탄했더니 민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생활력 강한 여진족이나 함경도 호위들이 흉내 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새를 보면 통닭이나 참새구이를 먼저 떠올려서 저렇게 안 돼. 새들이 접근을 안 할 거야.”
“저희들 먹보 아니에요.”
“그래, 그래.”
어부가 일하는 곳에 바닷새들이 가까이 왔던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자 아내가 새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새를 잡으려고 작정한 어부에게 바닷새들이 다시는 다가오지 않았다.
“전하! 서쪽 10km에 반란군의 선발대가 나타났습니다. 그 뒤로도 줄줄이 행군해서 접근 중입니다.”
“알았다. 오늘 안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전령을 돌려보내고 나서 이민호가 혀를 찼다. 이번 전투에서는 이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서 선택 가능한 작전이 대폭 줄어들었다.
가장 좋은 것은 루스인과 폴란드 군을 분리해서 폴란드 군을 먼저 와해시킨 다음 루스인의 항복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아침 식사 후에 이민호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마을을 살폈다. 저 멀리 모자이스크의 정교회 교회에서 고산국 병사들 수십 명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병사와 교회를 연결해 생각하면 약탈이나 임시 야전병원밖에 안 떠오르는 이민호는 잠시 긴장했다. 그러나 정교회 사제들과 병사들이 서로 정중히 인사를 나누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고산국 군대에 정교회 신자는 얼마 없어도 가톨릭 신자는 꽤 많았다. 그리고 군종장교의 숫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몇 년 더 지나야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젊은 사제들 일부가 군종장교로 복무할 예정이었다. 새로 건국한 나라라서 불교와 이슬람 군종장교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호위대에도 신자가 있을 텐데, 교회 안 가나?”
“저긴 정교회잖아요.”
비올레타와 가까이 지내는 민혜가 가톨릭 신자라서 이민호가 물어봤다.
“다른 교회라도 미사에 참가하는 것은 상관없잖아?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그렇게 합의한 것으로 아는데?”
“그래도 꺼려져요.”
11세기 중반에 가톨릭과 정교회가 서로 파문하면서 분리됐다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모스크바에 총대주교좌가 설치됐을 때도 로마와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이스탄불 등 5개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
두 교회는 고위 성직자 수준에서 꾸준히 통합 논의가 있었으나, 십자군이 정교회 국가들을 약탈한 이래 정교회 신도들은 통합에 반대했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루스인들은 정교회 국가였던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와 통합한 다음 로마 가톨릭의 교세가 강해지자 폴란드와 가톨릭에 대한 불신감이 더 커졌다. 폴란드가 더 발전한 나라임은 분명했으나 교류가 지속되다 보면 루스인들의 정교회 전통이 가톨릭에 비해 무시당할 거라는 걱정이 한몫했다.
“예수회는 왜 가짜 드미트리를 지원하는 거여요?”
“가톨릭과 정교회를 다시 하나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모양이야. 평화적으로 안 되니 강제로라도 말이야.”
“그렇다면 종교를 강조해서 가짜 드미트리 군대를 와해시키는 방법도 있겠어요.”
“지금은 아니야. 폴란드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짜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다음에는 다시 정교도로 돌아온다고 약속했거든.”
“폴란드에서는 가톨릭 신자로, 모스크바에서는 정교회 신자로 매번 변신하는군요. 필요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정치적인 이유로 가짜 드미트리를 필요로 하는 보야르들이 많아서 문제야.”
종교가 결국 가짜 드미트리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다. 실제 역사에서 가짜 드미트리를 열렬히 환영했던 모스크바 시민들이 일 년도 안 돼서 폭동을 일으킨 것은 폴란드 귀족의 딸 마리나 므니제치가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고 가톨릭 신자 신분을 유지하면서 황후 대관식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마카오에 자리 잡은 예수회는 고산국의 도움을 받으며 명나라에서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었다. 고산국 왕립대학교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여러 학과의 교수를 맡았다. 의학을 고산국 의과대학에서 다시 배우는 선교사들도 많았다. 의학은 선교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선교 수단이었다.
이렇게 고산국과 예수회가 건국 초부터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었으나 동유럽에서는 몇 가지 이유로 반대편에 서게 됐다. 이민호는 폴란드를 근거지로 동유럽에 교세를 확장하려는 예수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늦은 오전에 마을 남쪽에 위치한 언덕의 성채로 향했다. 므스티슬라브스키 장군이 시시각각 돌아오는 전령들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수고하시는구려. 밤에라도 제대로 쉬고 계시오?”
“물론 밤에는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지휘관인 제 머리가 맑은 상태로 유지돼야 제대로 된 판단과 명령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예하 제대의 지휘관들에게도 반드시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 취침을 하라고 명령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교대로 야간 당직을 선다 해도 최고지휘관이 필요할 때가 잦았다. 특히 전쟁터에서는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선택은 최고지휘관이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고 자다 깨면 피곤이 더 쌓일 수 있었다.
“그게 이상적이긴 하지요.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요.”
“고산국에서 개인 저술 형식으로 발간된 전쟁론과 전술 서적들이 제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민감한 분야는 일부러 외국어로 번역하지 않았는데도 술술 빠져 나가는 것 같소.”
“지금까지 이룬 고산국 군대의 성공을 보면 외국군에서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배울 게 참 많습니다만, 저희들이 한참 뒤떨어졌다는 자괴감을 갖게 합니다.”
이민호가 성벽 너머 평원을 살폈다. 갖가지 깃발이 휘날리고 무수한 창날이 번뜩거렸다. 총이 등장한 이래 장창의 효용이 극히 떨어지더라도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정 비율을 창병으로 운용했다.
“반란군이 넓게 분산해서 진영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적을 칠 좋은 기회입니다만, 전하의 어명에 따라 치지 않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적이 다수의 아군을 포위할 수도 있겠군요.”
“지형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소수인 군대가 다수인 군대를 포위하는 것이 오히려 최악의 포진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입장에서는 반란군이 여전히 다수라고 우겨야 하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넓게 배치한 것 같습니다.”
반란군의 본진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반란군 각 부대는 시간에 따라 도착한 순서대로 급히 진채를 세워 최소한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란군에서 보병이 3분의 2에 달하고 기병은 후사르와 코사크, 루스 기병대를 합쳐 3만 정도였다.
“전하! 적이 다 도착해서 진채를 내린 다음 아군이 출동합니까?”
“나는 신사가 아니오. 새벽에 아군 기병대가 이미 출동했소. 미리 알리지 않아서 미안하오.”
“아! 적을 속이기 전에 아군을 먼저 속이셨군요. 대규모 기병이 움직이는 소리를 못 들어서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제1 기병연대는 모자이스크 마을과 성채 주변에 남고 제2 기병연대와 토르구트 족 기병 2만은 밤에 숙영지에서 사라졌다. 멀리 남쪽으로 돌아 반란군을 치려는 목적이었다.
“혹시 아군 기병대가 적의 본진을 공략하고 있습니까?”
“고산국 전술 관련 책에 쓴 대로요.”
“아! 적 보급부대를 공격하고 있겠군요.”
“포병대 포함이오.”
전술 교과서에 나올 만큼 제식화된 전술이란 더 나은 전술을 선택하기 어려울 때 다른 전술보다 효율적이기에 살아남은 것이었다. 병참선을 차단하고 가급적 적의 화력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승리는 이미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병참선을 지키거나 보급부대를 미끼로 하는 전술이 생기지만 잘못했다간 전선이 엷어져 상대에게 중앙돌파를 당하고 만다.
토르구트 족은 기병으로서 기동성이 높으면서도 찰갑 종류의 갑옷을 주로 착용했다. 날랜 중장기병이라는 모순적인 토르구트 족이라서 노가이 족이나 다른 유목민들을 제압할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시대에 적 총병의 존재는 무시 못했다. 특히 방어진을 단단히 갖춘 상태에서 총을 쏴대면 기병으로서는 공격하기가 난감했다. 그래서 제2 기병연대가 적의 총병부대를 먼저 격파하도록 공동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전하! 적의 선발대가 전진 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후에 전선에 변화가 생겼다. 반란군 전체가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미리 명령을 받았는지, 진채를 완성한 반란군 부대들이 모자이스크의 성채 방향으로 이동했다. 대부분 총병인 스트렐치가 본대를 구성하고 기병이 뒤에 배치돼 예비대로 운용되는 루스인 부대였다.
“적의 본진이 지평선에 나타났습니다. 가짜 드미트리의 깃발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코사크 기병은 물론 외국인 용병들도 없습니다. 후사르로 구분되는 기병이 3천 정도입니다.”
“토르구트가 잘 하고 있는 모양이오. 장군!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므스티슬라브스키 장군의 부대는 성채에 머물면서 굳건히 지키기만 하시오. 보야르들이 소집한 기병부대들도 마찬가지요. 내 명령을 이해하시겠소?”
“예, 전하! 피아 구분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명령을 보야르들에게 통보하겠습니다.”
므스티슬라브스키가 바로 알아들었다. 적과 아군에 루스인이 다수라서 복장이 같아 피아식별에 문제가 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강제로 끌려온 보야르의 기병 2만이 갑자기 고산국 본대의 뒤를 들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덕택에 기병 2만과 성채의 기병 5천을 포함해 루스인 병력 4만이 아군에서 잉여 병력으로 남았다. 대세가 완전히 결판날 때까지 보야르의 기병들을 전투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확실한 아군인 므스티슬라브스키의 병력까지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고산국 병력은 적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적습니다. 장갑차 연대와 기병연대 하나, 그리고 공격할 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노가이한국의 기병 일만뿐입니다.”
“상관없소. 노가이한국 기병이 약한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노가이한국 서쪽에 자리 잡은 크림한국이 루스 차르국과 여러 차례 싸울 때, 10만이 넘는 루스 군이 크림한국을 향해 진군하는 동안 요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루스군이 보급품이 떨어져 퇴각하는 동안에는 등 뒤를 노리는 유목민 경기병들에 의해 루스군은 재앙을 맞는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싸웠다.
지난 1월의 전투에서 확인했듯이 코사크 기병들도 사실 전면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유목민 기병들이 불리한 상황에서 도주하는 것은 그들의 오래된 생존 전술이었다. 다만 패주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코사크나 노가이나 다들 악마로 변했다.
“그리고 나중에 루스 군대에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주겠소. 보야르들이 소집한 군대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초반은 아니오.”
“예. 승세를 점한 다음에는 저희들을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올가!”
이민호가 성벽 밑, 군악대와 함께 있는 루스인 궁녀를 불렀다. 그러자 키 높이 곰 가죽 모자를 쓰고 화려한 복장을 갖춘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게임 주제가였던 음악이 여기서는 행진곡으로 연주됐다.
고산국 직할군 중에 유럽인 이주민들이 가장 많이 포함된 부대가 군악대와 합창단이었다. 남성 합창단이 굵은 목소리로 합창했다. 일명 ‘서부군 행진곡’이었다.
“우리 서부군은 우랄산맥의 거대한 곰처럼 적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우리의 영토를 노리는 승냥이 떼 같은 외국 침략군을, 서부군의 곰은 과감하게 사냥에 들어간다.”
가사 자체는 짧았다. 2절은 올가가 확성기를 앞에 두고 솔로로 불렀다. 가사가 좀 다르고 특히 러시아어로 불러서 모자이스크의 성채에 대기 중인 루스인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말발굽 울리는 소리와 장갑차 엔진소리에 파묻히지 않고 사나이들의 가슴을 묘하게 떨리는 음률이 계속됐다.
행진곡이 연주되는 동안 제1 기병연대가 앞서고 그 다음이 장갑차 연대, 그리고 노가이한국 기병대 일만이 뒤따랐다. 반란군은 4만 정도였으니 두 배 이상이었다. 이민호는 호위대와 함께 장갑차에 탑승한 다음 선두 기병 대열을 따라잡았다.
“구르카 2여단에서 보고에요. 적 기병이 우리 병참선을 공격하고 있어요.”
“그래서, 증원을 요청하나?”
적 지휘부도 바보가 아니라서, 반란군에 속한 기병들이 전술에 따른 작전행동을 수행 중이었다. 이민호가 일정한 거리까지 기마정찰대를 보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시간에 맞춰 후방 병참선에 적 기병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한참 우회한 다음 정확한 시간에 공격했다는 뜻이었다.
이민호는 민지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아군 진형이 정돈되는 것을 지켜봤다. 왼쪽에 제1 기병연대, 오른쪽에 노가이한국의 기병이 배치되고 장갑차 연대가 중앙에 자리 잡았다.
“천만에요. 5대대가 코사크 기병 3천을 물리쳤어요.”
“자! 전면에 집중. 총병들이 사격 대형을 구성했다. 적의 야포를 먼저 제압한다. 쏴!”
============================ 작품 후기 ============================
아군 4만이 잉여... 당시 러시아의 정치적 구도에서 당연한 결과겠지요. 12만 대 10만으로 우세한 것이 아니라 주요 전장에는 2만 대 5만으로 역전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