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62화 (711/1,000)

00762  85. 1606년 장강에서  =========================================================================

“알았소. 내가 황상께 진주해서 도적들을 잡도록 하겠소. 산채와 수채들이 집중된 지역을 쓸고 오겠소.”

“항상 바쁘신 분께 죄송해요, 전하.”

“그 동안 바쁘게 비쳐져서 미안하오.”

이민호가 주상아 공주를 끌어안았다. 주상아 공주도 둘째 아이를 사내아이로 가져 벌써 세 살이었다. 이제는 시아버지 이응화 앞에서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게 됐다. 왕자를 낳은 다음 시아버지인 이응화가 며느리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어 회복실에 누운 주상아 공주를 몹시 당혹스러우면서도 기쁘게 만들었다.

작년 여름 성탄절에 주상아 공주가 아들, 딸과 함께 북경에 다녀오고 나서야 만력제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이민호도 확신할 수 있었다. 황실이란 인간으로서 상상 가능한 모든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끔은 상상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상아 공주가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황제의 건강 상태가 몹시 좋지 않은 것을 이민호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태정을 하는 것을 기화로 환관들이 날뛰는 바람에 명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험! 험!”

분위기가 갑자기 야릇하게 돌아가자 눈치 빠른 유모가 아기를 데려 나가고 시뻘건 대낮에 갑작스럽게 잠자리가 준비됐다. 대낮에 남편을 맞아들인 경우가 거의 없던 주상아 공주가 몹시 곤혹스러워 했으나 이민호는 아랑곳 않고 주상아 공주의 겉옷을 벗겼다.

시녀들이 호들갑스럽게 뛰어다니며 두꺼운 장막을 쳐서 햇빛을 최대한 가렸다. 원래 오늘은 예정에 없던 날이었으나 이민호가 주상아의 별궁을 방문하면서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됐다.

“부끄러워요. 저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으니 전하께서는 젊은 후궁들을 취하세요.”

“무슨 소리요? 공주는 아직 젊소. 앞으로도 꾸준히 운동을 해서 몸매를 가꾸도록 하시오.”

전족을 하지 않았는데도 작고 예쁜 주상아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이민호는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시녀들이 침전에서 나가기만 하면 곧바로 입에 물고 싶었다.

“어명을 받들겠어요. 그런데 스텔라와 나타샤가 그 동안 궁중 생활에 적응한 것 같아요.”

“응? 혹시 그 하얀 애들 말이오?”

잊어먹고 있었는데 루스 차르국에서 데려온 알비노 자매가 아예 주상아 공주의 별궁에 눌러 살았다. 예전에 갈라티아 궁녀들을 무시한 것 때문에 혼쭐이 났던 주상아 공주의 시녀들이 아주 잘 대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 애들은 피부가 약해서 궁중에 사는 것은 이해하겠소만, 왕실 여자로 들일 필요는 없소.”

“특이하게 생겨서 아마 시집가지 못할 것 같아요. 불쌍하니 전하께서 거둬주세요.”

“내가 시집 못 간 노처녀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아니지 않소? 그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기회가 있을 것이오.”

“그럼 일단은 제가 계속 데리고 있을게요.”

이민호가 딱히 알비노를 선호하는 취향도 아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옷을 잘 차려입고 들어온 알비노 자매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알비노는 이민호가 생각했던 흰색 캔버스가 아니라 무색투명한 캔버스였다. 화장을 하면 하는 대로 고스란히 피부에 먹혀 들어갔다. 주상아의 고급스런 화장법이 적용된 알비노 자매의 미모는 놀라울 정도였다.

다만 나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몸이 지나치게 가늘고 길어서 조금 어색한 면은 있었다. 앞으로 잘 먹고 운동을 잘하면 더 기가 막힌 몸매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가 됐다.

왕립 병원에서도 알비노 자매에게 관심을 갖고 햇빛에 쉽게 화상을 입는 피부를 관리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조만간 자외선 차단제가 개발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화장술이 아니라 변장술을 넘어 거의 둔갑술 수준이오. 의상 전시회 때 둘이 나서면 서양 상인들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소.”

이민호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알비노 자매를 당장 침전에서 내보내기는 했지만 별궁에서 내보내라는 소리는 다시 하지 않게 됐다.

“저번 달에 열린 전시회에서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서양 상인들의 넋을 쏙 빼놓았어요. 전하께서도 마음에 드시죠?”

“설마 그대만 하겠소?”

오랜만에 주상아와 대낮에 관계를 가졌다. 공주는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았으나 이제는 두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과감한 체위도 거부하지 않았다.

향긋하고 나긋나긋한 몸은 예전 그대로였다. 남자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매력도 여전했으며, 그 사이에 완숙미가 조금 더 느껴졌다. 끝나고 나서 주상아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쌓였던 걱정거리를 한꺼번에 다 날려 보낸 듯했다.

급하게 북경에 사신을 보냈다. 겨우 며칠 뒤에 칙령을 모시는 칙사가 바로 그 배를 타고 왕도에 도착했다.

새파란 나이의 환관이 칙사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잠시 후 칙사가 눈치를 보면서 고산국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저어...... 이건 아닌데. 조선처럼 칙사가 길일을 택해 왕도에 입성하고 국왕전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시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습니까? 역관은 이 말을 통역하되 당당히 말씀을 전하여라.”

“너 고산국에 처음 온 모양이구나? 선배들이 안 가르쳐주든?”

“헉!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민호는 알현실 옥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직접 중국어로 말하자 놀란 젊은 환관이 몹시 당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만약 조선처럼 칙사 대접을 정중하게 해줬다간 끊임없이 콧대를 세울 인간이었다.

“건방진 놈!”

“그, 그래도 저는 황명을 받고 온 황제폐하의 대리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황상의 사위이며 명나라의 관작이 주애공이다.”

“그래도......”

“고북 시에서 교역하기 싫은 모양이지?”

“아닙니다, 전하. 제가 뭘 모르고 건방을 떨었습니다. 죄송하옵니다.”

몇 년 사이 칙사로 오는 행인사 행인이나 환관들도 많이 썩어서 경제적 이익이 아니면 협박이 안 통했다. 아무리 황제의 수족으로서 호가호위하는 인간들이라지만 외국 국왕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틀려먹었다. 조선에서 받는 칙사 대접을 고산국에서 받으려는 것은 칙사들의 과대망상이었다.

“칙서 내놔.”

“저어. 그래도 최소한의 절차가 있습니다. 칙서에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은 안 치르십니까?”

“내가 왜? 하루에 칙서 세 장도 받아봤다.”

이민호가 옥좌에 앉은 채 칙서를 펼쳤다. 온갖 미사여구 끝에 원정군의 작전 범위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면서 병력 5천에 한해 도적 토벌 활동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이거 황상의 친필이 아니잖아? 내용도 시원치 않아.”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 황상께서 편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설마 내용도 환관들이 정한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태감들이 진언을 해서 황상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게 그 말이지. 결국 군사를 하나도 모르는 환관 놈들이 마음대로 정했다는 뜻이군. 모르면 공부라도 하든지 말이야.”

군사 문제라면 최소한 실전 경험이 있는 오군도독부의 어느 도독이나 총병관에게 물어보고 나서 결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명나라 환관들은 무관들을 지독히 무시하기 때문에 물어볼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혹시 병력이 더 많이 필요하십니까?”

“명나라에서 반란이 터졌다 하면 기본이 10만 단위인데 5천으로 어떻게 하라고? 미친 거 아냐?”

“하오나 주애공 대인께서는 도적을 토벌하겠다고 상주하셨지 않습니까? 반란은 이번 도적 토벌과 상관없습니다.”

“척하면 알아채야지. 지금까지 우리가 명나라에서 반란을 몇 번이나 진압해줬는데. 도적들이 반란군하고 결탁하는 것 몰라? 반란은 매년 봄에 장강 주변에서 일어나니까 이번에 도적 잡으러 갔다가 반란군하고 마주치기 십상이잖아!”

물론 그 동안 반란 진압 작전에서 결정적인 공훈을 고산국 군대가 세웠더라도 전공은 명나라 장수들이 독차지했다. 전공은 상관없더라도 기본적인 군사 상식이 있길 바랐지만, 권력다툼과 부정부패밖에 모르는 환관들이 군사적 능력을 갖추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전하의 윤음을 들어보니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당장 돌아가서 칙서를 바꿔 오겠습니다. 고산국 배를 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열흘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어. 귀찮아. 5천으로 해볼게. 대신 상황에 따라 병력을 증원할 수 있게 황상께 상주를 할 테니까 칙사가 직접 들고 가서 고하도록 해.”

“맡겨주십시오, 전하!”

대신 보급부대나 지원 병력을 5천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마음대로 결정했다. 이민호는 제2 기병연대와 제2 구르카 여단에서 1개 대대씩 뺀 감편 편제에, 장갑차 제3대대와 1개 포대를 포함시켰다. 해군에서는 국왕좌승함을 포함한 경순양함 4척과 수송선 20척을 동원했다. 그 외에 가벼운 해안경비대와 탐사대 함선 10여 척을 포함시켜 수심이 낮은 지류에서 활동하도록 준비했다.

이민호가 이들 병력을 다 합해서 5천이라고 우기니까 환관의 턱이 내려앉았다. 해군은 도적 혹은 반란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군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지상군 병력이 최소 6천은 넘었다.

지금까지 고산국 상선들이 장강을 무수히 왕복하면서 수심을 측정해 정밀지도를 제작했다. 흘수가 깊지 않은 5천 톤 급 경순양함이라면 우한 정도까지는 사계절 진입이 가능했고, 유량이 풍부한 기간에는 1만 톤 급 선박도 우한까지 항행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수심에 따라 달라졌지만 이번 작전은 우한으로 한정했다.

“그런데 황상께서 상방검은 안 내려주셨어? 지방 관리가 대들면 베어버려야 하잖아.”

“지난번에 하사받은 상방검을 전하께서 아직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하의 관작이 바뀐 게 아니니까 상방검의 권한 역시 그대로입니다.”

“아차! 그렇군.”

혹시나 해서 은근슬쩍 물어봤는데 명나라 군대의 지휘권과 관련된 상방검에 한해서만큼은 황실에서 제대로 관리하고 있었다. 황제로부터 임무를 받을 때마다 매번 상방검을 받아서 알현실에 장식하면 좋을 텐데, 아쉽게 됐다.

“국왕전하! 저도 이번 원정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왕궁에서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고 장군들을 기다리는데 명나라 황태자 주상락이 먼저 달려왔다. 주상락은 왕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명나라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관전 무관 자격으로 자주 참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가실 필요 없습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도적들을 잡는 것뿐입니다.”

“도적을 잡는 것이 민생을 안정시키는 길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전하께서 직접 친정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주상락을 말리느라 한참 설득해야 했다. 이번 작전에 괜히 이민호가 명나라에 직접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번만큼은 황태자가 따라오면 문제가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참모본부 정보참모가 멍한 눈길로 주상락을 바라보고 있어서 이민호가 눈치를 주었다. 주상락이 낙담을 하고 돌아선 다음에 정보참모가 물었다.

“이번 작전의 목적을 혹시 황태자가 알고 계신 것은 아닐 것으로 믿습니다.”

“알면 뭐 어때? 황태자를 암살하거나 명나라하고 전쟁을 하면 돼.”

“의심을 좀 사겠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음모와 책략이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의 멸망에 대비해 강남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두루 만나서 유사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일 뿐이었다. 이를 위해 큐슈에 거주하는 묘족 일부도 이번 작전에 참가시켰다.

병력을 소집하고 함선에 유류 보급을 하는 등 원정 준비가 진행됐다. 항상 그랬듯이 원정 대상 국가에 따라 갖가지 교육을 병사들에게 실시했다. 그 나라의 지리와 기후, 문화, 최소한의 언어 등이 교육 과목이었다.

이웃나라라도 중국어 통역이 충분치 않아 몇 가지 문장은 원정군 수첩에 따로 인쇄했다. 명나라는 지역에 따라 방언이 심하고 장강 남쪽에 소수민족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언어를 준비했다.

‘아가씨 하룻밤에 얼마?’ 같은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홍등가에 갈 인간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서 고무장화를 대량으로 준비해 원정군 병사들에게 배포했다.

약간의 훈련을 거쳐 원정 함대가 4월 초순에 남경을 향해 출발했다. 장마철 전에 작전을 끝내야 해서 조금 서둘렀다.

============================ 작품 후기 ============================

바로 출발시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